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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리(영화평론가)
사진 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필름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잡지 기자가 되기 전에 나는 사학과 대학생이었다. 서양사학과 신문 편집부였던 나는 그때부터 잡지쟁이 기질이 있었는지 ‘부록’을 기획했는데 내용인즉슨 영화로 엮은 서양 역사 연표였다. 어쩌면 나는 역사학 공부에서 얻을 줄 알았던 재미를 영화에서 발견하기 시작한 자신을 무의식중에 정당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사란 떡 버티고 있는 고정불변의 암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움켜쥐기 불가능한 매우 미끄러운 물건이기도 하다. 자격 갖춘 학자들의 논쟁 끝에 명문화되는 기록을 역사라고 부르지만, 대중의 집단 기억이나 그들이 상상한 과거도 현실에서 역사로 기능한다. 그리고 여러 예술 중에서도 영화는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관해 우리가 만들어낸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영화는 추체험(追體驗)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이 영화에 매혹되는 동시에 경계하는 이유다. 내 생각에, 영화감독들은 불가피하게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일종의 역사가이고, 역사학자들은 마음속에 감독 한두 명쯤을 품고 있다. 

  • ©️ 롯데엔터테인먼트

‘플라워 킬링 문’은 전작 ‘아이리시맨’(2019)을 잇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미국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오랜 관심사가 가톨릭적 원죄와 구원이었음을 고려하면, 미국이 열강이 되기까지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 포함된 백인 우월주의의 원죄를 적시하는 ‘플라워 킬링 문’은, ‘비열한 거리’(1973) 이후 일련의 스코세이지 갱스터 영화들과도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는 남부에서 이주한 아프리카계 시민, 이주지에서 유전이 터진 아메리카 원주민 등 비백인 시민들이 처음 부를 축적한 지역이었고, 매체에 의해 널리 보도된 그들의 경제적 번영은 백인들의 질시와 분노의 표적이 된다. 이 같은 혐오의 극악한 발현이 1921년 털사의 블랙 월 스트리트 학살과 1921년부터 1923년까지 24명이 희생된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이다. 후자의 끔찍함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들과 친구가 되거나 결혼해 심지어 한 집에서 자식까지 함께 낳고 기르며 살인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오세이지족이 백인에게 땅을 매각할 수는 없으나 상속은 가능하다는 사실이 행운을 죽음의 저주로 뒤바꾼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The Osage Murders and the Birth of the FBI)’을 각색하되 범죄를 수사한 초기 FBI 요원들로부터 오세이지족과 백인 살인자들이 뒤섞여 살아가던 공동체 내부로 서술 시점을 옮김으로써, 우리가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나쁜 백인을 정의로운 백인 메시아가 벌주고 비백인을 구원하는 서사와 차별화했다. 원래 FBI 요원 톰 화이트 역으로 캐스팅됐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시나리오의 변화에 따라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결혼한 백인 어니스트 버크하트로 배역을 바꿨다. 오세이지족의 친구를 자처하는 지역 유지이자 어니스트의 삼촌인 윌리엄 헤일 역의 로버트 드 니로는 여러 스코세이지 영화에서 정신적 불안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남성을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없다(극중에서 윌리엄 헤일이 직접 행하는 유일한 폭력은 조카 어니스트의 엉덩이를 때리는 체벌이다). 

 

영화가 분명히 하는 대로 오세이지족은 순진한 희생자가 아니다. 몰리를 비롯한 오세이지 여인들은 백인 남자들이 구애하고 청혼하는 첫 번째 이유가 오일 머니의 상속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취할 것만 취하면 족하다는 태도로 백인과 연을 맺는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인 몰리는 결코 순진하거나 금욕적인 인물이 아니다. 몰리는 어니스트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알지만 그가 섹시하고 귀엽다고 여겨 결혼한다. 그러나 1921년부터 오세이지족들이 병, 중독, 의심쩍은 사고로 죽어가는 위험스런 국면이 시작되자 몰리는 살인자들의 제1표적이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립 탐정을 고용하고 나아가 몸소 워싱턴 D.C.로 가 연방정부에 수사를 청원한다. 영화의 3막에 이르면 막 창설된 FBI가 오세이지족의 요구에 응하고 톰 화이트(제시 플레먼스)가 주도하는 수사는 윌리엄 헤일과 어니스트를 향해 포위망을 좁힌다.

  

80대에 접어든 노장이 ‘플라워 킬링 문’을 선택한 동기는 우선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일 터다. 잊혀진 것을 재현하고 투명 인간들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부터 관객이 범인과 동기, 과정을 알고 지켜보는 이 영화는 누가, 왜, 언제 죄를 범했나를 묻는 스릴러가 아니다. 보다 긴요한 의문은 “어떻게?”에 가깝다. 어니스트는 몰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동시에 밤이 되면 오세이지족을 린치하고 처가 식구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다. 그는 삼촌의 권위에 눈멀어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을까? 아니면 바보이거나 분열증을 앓았을까? ‘플라워 킬링 문’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설명하기 힘든 어니스트의 모순된 정신 상태가 개인의 특수한 병리 현상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이 기괴한 의식에 이름을 붙인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무지’ 정도가 아닐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모순이 가능한 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권리와 필요를 가진 인간으로 인지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다른 존재도 사랑할 수 있다. 혹은 사랑한다고 믿는다. 극중 백인들은 오세이지족과 함께 식사하고 친교를 맺지만 그들의 목숨이 백인의 그것보다 무게가 덜하다는 전제를 틈나는 대로 피력한다. 살인만은 금기라던 청부업자도 대상이 원주민이라는 말에 입장을 바꾸고, 오세이지족 아내가 낳은 의붓자식들이 죽으면 자신에게 상속권이 오냐고 공공연히 법률가에게 상담한다. 윌리엄 헤일의 대사가 잘 요약하듯 그들은 오세이지족의 부를 백인에게 넘기는 것은 자연적 질서의 회복이고 적자생존 원칙의 실현이라고 내심 믿는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24명 이상을 희생시킨 살인 음모가 아니라 그것을 묵과한 ‘공모’의 공기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인종주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미국의 거대한 그늘이며 사회적 약점이다. 그리고 이 불합리한 집단적 의식을 명제화하지 않고 복잡한 그대로 우리에게 체험시킬 수 있는 예술은 영화다. ‘플라워 킬링 문’의 결말부는 매우 독특하다. 스코세이지는 어니스트와 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다음 갑자기 관객과 영화 사이 제4의 벽을 무너뜨리고 라디오 라이브 쇼 무대로 이동한다. 전원 백인 성우들이 재연하는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은, 그제껏 3시간 넘게 우리가 지켜본 이야기와 내용은 동일하나 관점은 판이하다. 범죄 실화 엔터테인먼트가 들려주는 역사의 비극은 FBI의 영웅적 활극이고 납작한 권선징악 스토리에 불과하다. 이 대비는 ‘플라워 킬링 문’이 추체험의 예술인 시네마여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스코세이지의 답변으로 보인다. 거기 그치지 않고 스코세이지는 성우 중 한 명으로 에필로그에 직접 카메오 출연한다. “하지만 나 역시 백인 스토리텔러일 뿐.”이라고 한계를 인정하듯. 

 

집단 기억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플라워 킬링 문’의 또 다른 기여가 있다면 박해받는 희생자의 모습으로 각인된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인의 고용주로서 부를 향유하고 미국 자본주의 안에서 공동체의 풍요로운 전통을 지켜가는 이미지를 스크린에 새겨넣었다는 점이다. 스코세이지와 미술감독 잭 피스크, 의상감독 재클린 웨스트는, 본래 뛰어난 미감을 지닌 부족으로 유명했고 획득한 부에 힘입어 초상화와 사진, 홈 무비까지 남긴 오세이지족의 생활상을 재현하는 데에 2억 달러 예산의 큰 부분과 노력을 쏟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어떤 현실 장면보다 담담하고 고요하게 연출된 오세이지족의 죽음에 관한 심상들이다. 예술가들은 각기 다른 말년의 양식에 도달한다. ‘사일런스’부터 ‘플라워 킬링 문’까지 이어지는 후기 대작 시대는, 평생 명장으로 공인받으면서도 독소적 남성성과 폭력을 매혹적으로 스펙터클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스코세이지의 원숙한 응답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 ©️ 필름영

스코세이지와 이력의 부피는 다르지만, 조현철 감독의 데뷔 장편 ‘너와 나’도 과거를 되살리고자 하는 영화다. 아니, 이 경우에는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는 불가능한 갈망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고등학생 세미(박혜수)는 교실에서 엎드려 잠들었다가 슬픈 꿈을 꾸고 깨어난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뺨이 눈물로 얼룩져 있다. 자전거에 치이는 바람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단짝 하은(김시은)에 대해 덜컥 불안감이 치민 세미는 기어이 조퇴를 하고 친구의 병실을 찾는다. 겉으로는 무리해서라도 수학여행을 꼭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것이 목표지만, 실은 세미는 하은에게 사랑한다고 제대로 고백하고 싶다. 오늘은 두 소녀에게 중요한 하루가 될 것이다. 참을성 있게 사랑한다는 말을 배우는 앵무새와 길 잃은 개, 고장난 시계와 흐릿한 거울이 등장하는 꿈같은 봄날을 따라가는 도중 우리는 세미의 수학여행 행선지가 제주도이고 소녀들이 사는 도시가 안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의 사실 관계를 헤아리기 위해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앞서 시도하는 동안 10년이 흘렀고, 이제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의 영혼에 남긴 흔적에 어떤 서사와 형상을 부여할지 숙성의 시간을 거친 픽션 영화가 스크린에 오르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에서 진짜 인간 소년이 되어 사랑받기 위해 방랑하던 로봇 데이비드는 외계인들로부터 엄마와의 완벽한 하루를 선물 받는다. ‘너와 나’는 뜻밖의 방식으로 이별한 어린 연인들에게 조현철 감독이 뒤늦게 선물하는 최선의 하루다. 첫사랑으로 울고불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그런 와중에 누군가를 돕기도 하고 결국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마무리짓는 하루. 조현철 감독은 그것이 우리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선택했다. 피아를 반듯하게 갈라놓은 ‘너와 나’의 제목은 역설적인 동시에 주제에 부합한다. 수학여행 전날의 시간이 바닥을 드러낼수록 관객은 점점 세미와 하은 중 누가 바다로 떠난 쪽인지 누가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끝내는 두 소녀가 어떤 의미에서는 함께 죽었고, 다른 관점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초연해 보이는 감독조차, 하루의 끝에 두 젊은이가 수학여행을 앞둔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감정을 가누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오래 함께 있고 싶어 작별 인사가 하염없이 길어지는 일이야 세상 모든 연인의 일상사겠지만, ‘너와 나’의 그것은 아이들의 ‘내일’이 오기 전에 필사적으로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우리의 불가능한 소원으로 보이기에 고통스럽다. 

 

세미와 하은의 하루를 동행하는 동안 관객은 생면부지의 타인과 함께 울고, 동물과 친구가 되고, 심지어 위태로운 물잔에 감정을 이입하는 소녀들의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마침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 아이는 앞으로 사랑할 숱한 날들에 대한 예감으로 찬연히 빛난다. ‘너와 나’는 그해 봄 어느 날 바다로 여행을 떠났던 소녀와 소년들 속에서 터질 듯 출렁이며 세상으로 흘러나올 태세를 갖추고 있던 막대한 사랑의 부피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