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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김리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빌리프랩

뱀파이어의 사랑

강명석: 뱀파이어는 영원히 사는 불멸자다. 그래서 인간은 뱀파이어의 영원한 생을 함께할 수 없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는 인간과의 짧은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널 사랑하는 것”. 엔하이픈의 새 앨범 ‘ORANGE BLOOD’ 첫 곡인 ‘Mortal’의 가사는 인간에게는 사랑에 대한 진심의 강조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에게는 사랑을 위해 영원한 고통마저 받아들이겠다는 맹세다. ‘DARK BLOOD’와 ‘ORANGE BLOOD’ 두 장의 앨범 컴백 트레일러 영상에서 묘사한 것처럼, 앨범 속 엔하이픈은 뱀파이어가 연상되는 초자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불멸자가 필멸자를 사랑할 때의 마음이란 얼마나 깊고 절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것인가.

 

‘ORANGE BLOOD’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불멸자의 내면을 진지하게 파고든다. ‘Mortal’의 가사처럼 불멸자가 인간을 사랑을 하려면 “불멸 따위 너를 위해 얼마든지 버려주겠다고 다짐”하며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 타이틀 곡 ‘Sweet Venom’의 “데려가 새로운 세계로” 같은 문장은 뱀파이어를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Sweet Venom’의 “새로운 세계”는 “필멸을 내게로” 달라는 불멸자의 바람이다. 인간을 흡혈하는 뱀파이어가 오히려 인간에게 “all I need is your poison”이라며 인간의 ‘독’이 자신의 “혈관 속에 퍼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 영원한 생 속에서 인간에게 두려움이자 유혹하는 존재였던 불멸자는 사랑 때문에 유혹당하는 자의 위치에 선다. ‘Sweet Venom’의 퍼포먼스에서 엔하이픈은 손으로 그들의 목을 잡고, 천천히 얼굴을 돌린다. 이 관능적인 동작은 목을 물리는 자, 유혹 당하는 자의 모습이다. “Sweet”의 발음을 길게 반복하는 후렴구 일부의 멜로디는 경쾌하지만, 엔하이픈의 목소리는 마치 호러영화 속 뱀파이어처럼 음산하게 곡 전체에 퍼져 나간다. 사랑은 불멸자 또한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어둠 속에서,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며 살아온 자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Sweet Venom’에 이은 ‘Still Monster’의 가사 “하지만 나는 알아 내 안의 심연 입을 벌린 채 나를 기다리는 걸”은 불멸의 존재가 필멸을 원하는 사랑을 하면서 생긴 역설이다.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존재가 “내 안의 심연”이 있는 “Still a monster”일까 두려워한다. 인간에게는 평범한 사랑이 “이런 괴물 같은 나”에게는 “감히 널” “갈망”하는 것이 될 때, 그럼에도 “결국 답은 항상 only you”란 결론은 손으로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감춘 뒤, 다시 고개를 떨구는 슬픔의 독무를 출 수밖에 없는 슬픔이 된다. 이어지는 “Na na na na na na na na still l a monster”의 멜로디가 격정적인 목소리로 시작하지만 “still a monster”에서 애잔하게 변하는 것은 ‘ORANGE BLOOD’가 불멸자의 이야기여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두려움이, 타인을 사랑하는데서 오는 기쁨과 자신이 그 사랑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자학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은, 필멸을 택한 불멸자, 뱀파이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 묘사를 가능케 한다. ‘ORANGE BLOOD’가 엔하이픈의 ‘넥스트 엔터테인먼트’로 불릴 수 있다면, 뱀파이어를 비주얼 콘셉트나 앨범 스토리텔링에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ORANGE BLOOD’는 불멸자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과 비극, 현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환상이 뒤섞인 특별한 로맨스로서의 사랑을 다시 대중음악 안에 설득력 있게 불어넣는다. 경쾌한 팝의 멜로디와 뱀파이어의 캐릭터를 반영하는 보컬 디렉팅이 동시에 있고, 베이스와 드럼으로 구성된 심플한 비트가 듣는 쉽게 듣는 사람의 귀를 잡아 끌면서도 유혹적인 퍼포먼스가 가능한 ‘Sweet Venom’은 뱀파이어가 왜 대중문화 속에서 영원한 것처럼 살아남았는지 탐구한 결과다.

 

엔하이픈의 ‘Polaroid Love’는 “사랑”을 “어차피 뻔한 감정”이라며 외면하려 하지만, “가슴 아프게 나의 심장이 쿵쿵”거릴 수밖에 없는 청춘의 사랑을 그렸다. ‘썸’이나 ‘환승연애’ 같은 단어가 사랑이란 단어를 상당 부분 대체한 시대에 사랑은 그만큼 가지면 부담스러운 감정처럼 여겨진다. ‘ORANGE BLOOD’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됐을 때, 그것을 필멸을 원하는 불멸자의 마음으로 표현한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현 시대의 인간들 또한 사랑의 유한함을 알고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Polaroid Love’의 세대에는 “촌스런 그 감정”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모두가 이 마음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ORANGE BLOOD’는 불멸자의 사랑을 통해 이 마음이 고통스럽지만 소중한 마음인지에 대한 이야기와도 같다. “Monster”는 자신의 생 전체를 걸고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Still Monster’의 가사처럼 너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그늘 한 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나로 인해 당신이 목에 물리는 것 같은 상처를 입지 않길 바라면서도, 너에게 한없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 이것은 뱀파이어가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자 로맨틱한 연인일 수 있었던 이유이자, 청춘의 사랑에 대한 복원이다. 머릿속은 폭발할 것 같지만 당신을 볼 때만큼은 웃는 얼굴로 행복할 수 있는, 미칠 것 같지만 영원하길 바라는, 그 사랑 말이다.

Carpe diem

김리은: 지금까지 엔하이픈의 타이틀 곡들은 자아의 성장기와도 같았다. 데뷔 곡 ‘Given-Taken’을 비롯해 ‘Drunk-Dazed’, ‘Tamed-Dashed’,’ ‘Blessed-Cursed’로 이어진 네 개의 타이틀 곡들은 그들의 존재론적 고민을 수식하는 형용사였다. 처음으로 ‘나’가 아닌 ‘우리’의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 ‘Future Perfect (Pass the MIC)’는 “너를 내게 실어”라는 가사처럼 그들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선언이었고, ‘Bite Me’ 역시 상대방에게 “구원”을 바라는 ‘나’의 이야기였다. 반면 새 앨범 ‘ORANGE BLOOD’의 타이틀 곡 ‘Sweet Venom’은 그들 자신이 아닌 ‘너’에 대한 정의다. “필멸을 내게로” 가져오지만 그렇기에 “구원”인 존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Sweet Venom’의 의미는 첫 트랙 ‘Mortal’에서 “너 없이 영겁의 시간을 보낼 바에야 유한한 시간 속을 너와 함께 떠돌고 싶다.”라는 희승의 내레이션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그간 엔하이픈의 노래 가사에서 멤버들은 “송곳니”를 가진 존재였고, 그들과 서사를 공유하는 컬래버레이션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 ‘DARK MOON : 달의 제단’에서도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뱀파이어로 묘사됐다. 그러나 ‘Sweet Venom’에서 엔하이픈은 “영원 따윈 포기”하고 “지금 내겐 오직 taste of your / Sweet Venom”이라며 취한 것처럼 나른한 가성으로 노래한다. 그들의 서사에서 처음으로 ‘너’라는 외부의 세계를 “혈관 속”으로 받아들이고 몰입하는 순간이다.

 

달콤한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Sweet Venom’의 시작부터 깔리는 베이스 라인이 춤추기 좋은 흥겨움을 만들어내지만, 플랫이 붙은 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멜로디가 마냥 밝지만은 않은 정서를 내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안은 몰입을 불태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ORANGE BLOOD’ 콘셉트 필름 ‘KSANA’ 버전에서 사랑은 뭉쳐진 구름이나 하늘을 가르는 벼락처럼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멤버들은 안전한 장소인 차 안이나 집에 머무는 대신 벼락이 치는 바깥으로 달려나가기를 선택한다. ‘Mortal’에 등장하는 이번 앨범의 핵심 메시지인 ‘Carpe diem’은 단순히 현재를 즐기는 자세라기보다, 불안을 인내하고 상대방과 함께하는 현재를 택하는 성장에 가깝다. ‘Still Monster’에서 화자가 “Still a monster”와 “I’m not a monster”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존재론적 고민은 그대로다. 하지만 “이대로 두 눈이 멀”지라도 “널 찬양”하는 ‘멀어’나 “스러진 모든 찰나 / 너를 섬기며 살 테요”라는 ‘Orange Flower (You Complete Me)’의 가사는 순간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사랑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담는다. 유광굉 감독이 ‘DARK MOON : 달의 제단’ 속 설정을 변용해 연출한 ‘ORANGE BLOOD’ 콘셉트 트레일러는 “영원한 힘”이 떠난 이후 엔하이픈 멤버들이 수하와 함께 상처가 나거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인간의 유한한 일상을 즐기는 찰나를 보여준다. 그리고 ‘ORANGE BLOOD’ 콘셉트 필름 ‘ENGENE’은 수하의 위치에 보는 이의 시선을 놓는다. 멤버들이 화면을 향해 손짓하거나 다 함께 둘러싼 대상은 엔하이픈의 팬덤 엔진일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Mnet ‘I-LAND’를 통해 선발된 이후 자기증명에 대한 서사를 전개해왔던 팀이, 이제 그들 고유의 판타지를 바탕으로 전개된 서사의 중심에 팬을 위치시킨다. 이 팀이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하는 것”(‘Mortal’)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전까지 엔하이픈은 자아에 대한 선언이나 상대방에 대한 호소를 선명한 목소리로 외치듯 노래했다. 반면 ‘ORANGE BLOOD’에서 엔하이픈 멤버들은 주로 호흡이 많이 들어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수록 곡들은 절정에서 고음을 터트리는 클라이맥스적 구성 대신 코러스 파트에서 리듬감을 강조하는 이지리스닝의 경향을 따른다. ‘나’에게 몰입하던 세계가 ‘너’에게 몰입하는 세계로 넓어지는 사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편안하게 노래할 수 있게 된 아티스트의 성장이 음악적 트렌드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판타지와 아티스트의 현재를 결합하는 엔하이픈의 서사 구축 방식은 시대정신의 반영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 K-팝 산업 내에서 대안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ORANGE BLOOD’에서 엔하이픈은 판타지적인 설정 안에서 보편적인 메시지를 아티스트의 진정성과 결합하는 동시에, 이를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들의 “새로운 세계”가 확장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