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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리
사진 출처. (주)NEW,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괴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 (주)NEW

따지고 보면 ‘괴물’의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오로지 사랑이다.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교사 호리(나가야마 에이타)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미나토는 친구 요리(히라키 요우타)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고 벼랑 끝 상황에 몰린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가 쓴 시나리오는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세 차례 보여주는 도돌이표 구조를 택했다. 1장 시점의 주인은 사오리, 2장은 교사 호리, 3장은 미나토와 요리다. 세 장은 모두 동네 한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출발해 폭우로 끝난다. 단 1장보다 2장이, 2장보다는 3장이 폭우 이후 더 긴 시간을 보여준다.

 

남편과 사별하고 세탁소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사오리는 다정다감한 초등학교 5학년 아들 미나토에게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다. 운동화 한 짝을 잃고 귀가하고, 가위로 머리를 마구 자르는가 하면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 다치기까지 한다. “나의 뇌는 돼지의 뇌가 아닐까?”라는 알쏭달쏭한 질문도 한다. 대화 끝에 호리라는 교사의 학대를 의심한 사오리는 학교를 찾아가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처음에 막연한 사죄로 응대하던 호리는 실은 미나토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라고 불쑥 주장한다. 충격을 받은 사오리는 상대로 지목된 소년 요리를 만나 아이의 진술을 통해 교사 호리를 반박하고 징계를 받아낸다. 2부 시점의 주인공 호리는 진심으로 학생을 아끼는 태평한 성격의 교사다. 특이점이라고는 오탈자에 예민한 것 정도인데 주변에서는 “당신이 웃으면 무서워.”라든가 “자네는 눈빛도 인상도 안 좋으니 나서지 말게.” 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호리의 진짜 결함은 상대방을 제지할 때 말보다 완력이 먼저 나간다는 점이고, 이는 오해의 씨앗이 된다. 학교에서 밀려난 후 작문 숙제를 무심코 검토하던 그는 미나토와 요리가 말하지 않은 진실을 발견하고 폭우를 뚫고 사오리의 집으로 달려간다. 3부는 어른들이 수수께끼와 씨름하는 동안 11세의 미나토와 요리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매혹되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괴물의 표식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숲속 버려진 열차 칸 안에 둘만의 세상을 만든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의 조반니와 캄파넬라처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고 가장 먼저 ‘은하철도의 밤’을 떠올렸다고 한다.).

 

‘괴물’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걸작 ‘라쇼몽’이 자주 동원되지만, 정확한 비교는 아니다. 우선 ‘괴물’에서 진실은 하나다. 주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진실이 크고 복잡해 제한된 시야를 가진 개인은 전모를 보지 못하고 오해할 뿐이다. 인물의 캐릭터도 ‘라쇼몽’과 달리 3장에 걸쳐 일관성 있다. 그렇다면 ‘괴물’은 어째서 굳이 서사를 세 토막으로 분절했을까?

 

‘괴물’이 2023년 5월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됐을 때 ‘라쇼몽’과 함께 많이 거론된 영화는 전년도 칸 국제영화제 상영작인 루카스 돈트 감독의 ‘클로즈’였다. 역시 사춘기 이전 소년들의 친밀한 관계가 이성애 중심적인 주류 사회 통념에 노출되면서 겪는 고통을 묘사한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두 영화의 다양한 차이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클로즈’가 소년 둘을 클로즈업한 반면, ‘괴물’은 둘의 비밀이 만들어내는 여파에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괴물’은 혐오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생긴 비밀과 거짓말이 당사자들을 넘어 연결된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잉크가 물컵 안에서 번지는 광경을 그리려 한다. 과연 한국에 소개된 작품 ‘마더’, ‘그래도 살아간다’, ‘최고의 이혼’으로 미루어 볼 때 사카모토 유지는, 인물은 곧 그가 타인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고 믿는 작가로 보인다. ‘괴물’ 3장 형식은 주변인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에 두 소년의 그것만큼 무게를 싣는 ‘착시 효과’를 자아낸다. 한편 영화의 분할은 좀처럼 건너가기 힘들게 분리된 엄마와 아들, 교사와 학부모의 생활 세계를 암시한다. 초자연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데도 ‘괴물’이라는 제목과 은근히 호응하는 SF 호러의 무드를 조성하는 것은 이와 같은 단절의 표현이다. 특히 1장에서 사오리가 교무실을 찾아왔을 때 그를 에워싸고 앵무새처럼 사죄하는 교사들은 마치 외계인에게 신체를 강탈당한 껍데기처럼 보인다. 사죄는 아끼지 않지만, 실질적 해결책에는 무관심한 일본 사회의 벽을 이미지화한 느낌마저 있다.

 

‘괴물’은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를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기 위해 쓰는 만능의 프레임이다. ‘괴물’이 아니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교훈이다. 그러나 공포는 아는 함정에 다시 빠지게 만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에세이집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에서 “이해가 안 돼서 무섭다면 이해하도록 노력하면 될 텐데.”라고 타자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을 슬퍼한 바 있다.

 

‘괴물’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선을 긋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호리의 선배 교사는 극성스러운 부모들을 몬스터라고 부르고 사오리는 교장에게 “당신에겐 인간의 마음이 없다.”고 일갈한다. 요리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것’이라 지칭하며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가 아들에게 던진 “너는 돼지의 뇌를 가진 병자다.”라는 극언은 요리와 미나토에게 죄의식을 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흘러 흘러 요리를 이지메하는 동급생들의 무기로 확산된다. ‘괴물’의 몬스터는 희석된 형태로 공기 중에 퍼져 있다. 이 영화에서 사오리와 호리가 속단하도록 부추기고 미나토와 요리가 거짓말을 하도록 등 떠미는 압력은, 누가 발설했는지 특정하기도 힘든 무리 속의 외침과 속삭여지는 소문에서 나온다. 그중에는 “호리 선생이 밀쳐서 떨어졌어!” 같은 무책임한 모함도 있고 “그러고도 남자냐?”, “엄마는 네가 결혼해서 평범한 가족만 이루면 돼.”처럼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무심코 흘러 다니는 관용구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정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하나씩 얹는 말은 고작 11세인 소년들에게 이번 생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비관을 불어넣어 환생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나 사카모토 유지가 꾹꾹 눌러 쓴 대사처럼, 우리는 이번 생에서 행복해져야 한다.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신군부가 자행한 12.12 쿠데타의 기록을 바탕으로 김성수 감독이 연출한 ‘서울의 봄’에서 ‘괴물 찾기’는 훨씬 쉬워 보인다. 헌법을 위반한 군사 반란 수괴 전두광(황정민)이 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전두광은, 이안 맥켈런이 표현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리처드 3세’)를 연상시킨다. 실제 전두환이 국민에게 남긴 인상은 훨씬 둔탁하고 감정이 메마른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전두광은 리처드 3세처럼 몸을 음험하게 구부리고 도덕적 열등감 따위 가래침처럼 뱉어버리며 권력을 찬탈한다. 권력욕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 ‘불만의 겨울’을 폭력으로 끝내고 민주주의의 봄을 도둑질한다. 닮은 구석 하나 없는 황정민 배우가 전두광의 모델 전두환과 놀랄 만큼 비슷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 잠깐 고민했다. 첫째는 전두환 집권기를 기억하는 세대가 ‘땡전 뉴스’를 통해 눈에 못이 박히도록 새겨넣은 둥근 머리의 실루엣이 큐사인처럼 작동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표현주의적 조명의 효과로 보인다. 일종의 전쟁 영화로서는 실내 장면이 매우 많은 ‘서울의 봄’의 조명은 얼굴에 떨어지는 음영과 발치부터 늘어지는 불길한 그림자를 통해 한국인의 집단 기억에 남아 있는 전두환의 초상을 황정민의 몸에 씌운다.

 

요컨대 전두광은 어둠으로 그린 인물이다. 극중 자택에 하나회 장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쿠데타 계획을 밝히며 그는 전등을 꺼 빛을 몰아낸다. 어두운 방으로 후배를 불러 자기의 집무실 의자에 앉히며 설득하는 장면은 거의 독일 표현주의의 뱀파이어 영화처럼 찍혔다. “이제부터 너는 나고 나는 너야.” 개별성을 지우고 전체(하나회)를 자아와 동일시하도록 최면을 거는 파시스트의 목소리다(실제로 하나회의 규약 중에는 조직을 배신할 경우 “인격 말살을 감수한다.”는 기괴한 조항이 있다.). 불리한 상황에서 반란군 진압에 끝까지 진력하는 수도방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은 장태완 장군을 모델로 삼았지만 실존 인물의 각색이라기보다 전두광의 반대말에 가깝다. ‘비트’ 이후 김성수 감독과 더불어 스크린 페르소나를 형성해온 배우 정우성은 ‘서울의 봄’에서 마치 ‘삼국지’의 조자룡과 장비를 합친 듯한 모습으로 행주대교에서 탱크를 막아내고 첩첩한 바리케이드를 홀로 건너간다. 그가 혈혈단신 홀로 우뚝할수록, 비현실적일수록 관객들은 그의 패배를 ‘우리’의 보편적 패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극장을 나와 1979년 이후 반란군과 진압군 인사들의 정치 계보를 검색하기 전에.

 

12월 12일 밤 9시간의 타임라인을 비교적 상세히 재현한 ‘서울의 봄’은, 쿠데타의 주모자는 전두광이나 국민보다 하나회에 충성하고 서로를 ‘형님’이라고 부른 군인들의 협력으로 실행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서울의 봄’이 지목하는 ‘괴물’은, 내가 속한 패거리가 특권을 누리는 것이 공익을 앞서는 정의라고 믿고 국민이 위탁한 공적 물리력을 자국군과 시민을 향해 휘두른 조직이다.

 

‘서울의 봄’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이 일촉즉발로 대치하는 세종로 시퀀스는 영화적 상상의 산물이다. 이태신의 모델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실제로는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됐다. 일어난 적 없는 시가전을 스크린에서 보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애타게 바란 건, 히틀러를 일찍 제거해버린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처럼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대안 역사조차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은, 독재와 학살을 자행하고 절대 사과하지 않은 그 인물이 합당하게 모욕 당하는 광경이었다. 부끄러움과 모멸감이 순간 스쳐가는 전두광의 얼굴이야말로 끝내 우리가 보지 못한, 보았어야만 했던 무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