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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NHK紅白歌合戦 인스타그램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은 NHK에서 매년 섣달그믐날마다 방영하는 연말 결산 가요 프로그램이다. 1951년부터 방영하여 올해 햇수로 72년을 맞은 홍백가합전은 2017년에 ‘한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음악 경연 프로그램’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처럼 남녀 가수들이 각각 홍팀과 백팀으로 나누어 겨룬다는 것이다. 그러나.홍백가합전은 어디까지나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연말을 함께 마무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는 연말에는 집에서 홍백가합전을 본다는 클리셰가 존재할 정도다.

 

한 해를 결산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NHK는 매해 홍백가합전 출연 자격을 까다롭게 심사하는 편이다. 그해의 활동 여부와 그 성과는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앙케이트 결과 역시 선정 기준에 반영한다. 그렇기에 홍백가합전 출연 여부는 일반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지난 11월 13일, NHK는 제74회 홍백가합전의 출연이 결정된 아티스트 목록을 최종 발표했다. 앞서 설명한 홍백가합전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선정 기준 등을 염두에 두고 출연 아티스트 목록을 가볍게 살펴보자.

  • ©️ NHK紅白歌合戦 Instagram

​쟈니스 아이돌이 빠진 그 자리 

홍백가합전에는 본래 같은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출연을 제한하는 관례가 존재했다. 쟈니스 소속 아이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1997년 이후로는 SMAP와 TOKIO, 이렇게 두 그룹만 출연하곤 했다. 하지만 60주년을 맞은 2009년에 처음으로 ARASHI까지 출연하게 되면서 쟈니스에서만 2개 이상 팀을 출연시키는 경우가 늘어났다. 2015년에는 26개의 백팀 중 쟈니스 소속 그룹이 7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여 비판을 받았는데, 작년만 해도 첫 출전이었던 나니와단시(なにわ男子)를 포함해 SixTONES와 Snow Man, King&Prince, 칸쟈니∞(関ジャニ∞), KinKi Kids까지 여섯 팀이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출연 명단에서 쟈니스 소속 그룹을 찾아볼 수 없다. 202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고故 쟈니 키타가와의 성착취 파문으로 인해 NHK를 포함한 전 방송사가 쟈니스 소속 그룹을 보이콧한 것. 쟈니스 소속이 출연하지 않는 홍백가합전은 무려 43년 만이라고 한다. 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건, 새롭게 부상한 J-POP 가수들과 K-POP 가수들이다. 

​J-POP의 약진은 계속된다
올해 첫 출전하는 아티스트들의 면면들이 화려하다. 먼저 남성들이 소속된 백팀에는 국내에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첫 번째 일본 앨범에 수록된 ‘Force’를 작곡하기도 한 Mrs. GREEN APPLE과 올해 1월 개봉하여 ‘슬램덩크’ 붐을 일으킨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엔딩곡 ‘제0감(第ゼロ感)’을 담당했던 10-FEET, 13년 가까이 꾸준히 활동해온 MAN WITH A MISSION이 처음으로 홍백가합전에 선다. 그리고 보컬로이드 프로듀서 출신으로 이번에 ‘주술회전’ 2기 오프닝을 부른 싱어송라이터 키타니 타츠야도 처음 출전한다. 

홍팀에서는 ano와 새로운 학교의 리더즈(新しい学校のリーダーズ)가 처음으로 홍백가합전에 선다. ano는 이전 유루메루모!(ゆるめるモ!)라는 아이돌 그룹에서 속해 있었으나, 2020년에 졸업 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명 ‘천년돌’이라 불리는 하시모토 칸나와 대조되는 사진으로 유명하다. 현재 ano의 유튜브 팔로워는 31.6만 명이고 총 조회수는 8,646만 8,326회(12월 20일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2023년 틱톡 상반기 트렌드 어워드 음악 부문에서도 수상을 하는 등 트렌드를 이끄는 존재로 부상 중이다. 

새로운 학교의 리더즈는 컨셉추얼한 4인조 걸그룹으로, ‘일본의 전투복’이라는 세일러복을 입고 파워풀한 댄스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중에서도 ‘OTONABLUE(オトナブルー)’라는 노래가 지난 6월 틱톡에서 무려 25억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한국의 유튜브 채널 Killing Voice와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는 THE FIRST TAKE에 출연한 영상은 공개된 지 약 10일 만에 조회수 천만 회를 달성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새로운 학교의 리더즈에게 작사작곡을 해준 적 있는 아이묭(あいみょん) 은 벌써 다섯 번째 출연을 앞두고 있다. 4인조 혼성 록밴드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녹황색사회(緑黄色社会)도 올해로써 두 번째로 홍백가합전 무대에 오른다. 요아소비는 어느덧 세 번째 출연이다. 요아소비는 올해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의 오프닝 ‘아이돌’이 유튜브 조회수가 3.9억을 돌파하면서 일본 내 스트리밍 기록을 연신 갈아치우고 있고, 그 외에도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의 오프닝과 ‘장송의 프리렌’의 오프닝, 그리고 게임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의 1주년 기념 뮤직비디오 삽입곡까지 담당했기 때문에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 기대해볼 만하다. 

borderless, 얼굴 없이 경계를 넘나들다 

올해 홍백가합전에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세 팀이나 출연한다. 바로 MAN WITH A MISSION과 Ado, 그리고 스토로베리 프린스(すとろべりーぷりんす) 통칭 스토푸리(すとぷり)가 그들이다. 세 그룹 모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MAN WITH A MISSION는 5인조 밴드로, 항상 늑대 가면을 쓰고 라이브 활동 및 방송 출연을 한다. 늑대 가면의 입이 벌어져 있어 그 사이로 얼굴이 보일 수는 있으나, 암묵적인 룰이 있는지 카메라가 집요하게 그쪽만 찍지 않는다. 지난 6월에 처음으로 참가한 THE FIRST TAKE 영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얼굴 없는 가수 Ado도 이번이 첫 참가다. 작년 홍백가합전에는 자신이 노래를 담당한 ‘원피스 필름 레드’의 캐릭터 ‘우타(uta)’ 명의로 출전했기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Ado는 2022년부터 국내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는데, 항상 조명을 이용해 본인의 실루엣만을 드러낸 채로 공연하고 있다. 

 

그리고 일러스트를 내세워서 활동하고 있는 신개념 아이돌 스토푸리도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전한다. 2019년에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주로 트윗캐스트와 유튜브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무려 유튜브의 총 동영상 조회수가 76억 회를 넘어설 정도로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2022년부터 지금까지 테레비 도쿄에서 자신들의 그룹명을 내건 채 레귤러 방송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다. 이들의 경우 역시 악수회를 열거나 아레나 투어를 도는 등 오프라인 라이브도 하는데, 현장에 한해서만 얼굴을 공개한다. 다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유튜브 라이브에서는 CG 등을 이용해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 그 외에도 스토푸리에는 특기할 만한 점이 있는데, 바로 FTM 트랜스젠더 멤버 리누(莉犬)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제58회 홍백가합전에 MTF 트랜스젠더인 나카무라 아타루가 출전했던 이후로 역대 두 번째 트랜스젠더 아티스트다. FTM 트랜스젠더로는 최초다. 올해 홍백가합전이 내세우는 주제가 borderless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사실 홍백가합전은 기로에 서 있다. 2022년에 방영한 제73회 홍백가합전의 경우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유관중으로 개최했으나 시청률은 오히려 하락하여 역대 최저 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온 가족이 모두 보는 홍백가합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타겟 시청자의 범위가 넓다 보니 2020년대에 들어서는 무대장치나 연출 등이 올드하다는 평가를 다수 받고 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하는 이 팀들이 과연 ‘올드하다’라는 이미지가 강한 홍백가합전 무대를 어떻게 연출할까?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번 홍백가합전이 좀 더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K-POP의 바람  

홍백가합전에 한국 국적 가수가 처음 출전한 건 언제였을까? 1987년 조용필이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연하면서 한동안 그를 포함해 패티 김이나 김연자, 계은숙 등 주로 원로 가수들이 무대에 서곤 했다. 그러나 2002년 일본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보아가 댄스가수로 최초로 홍백가합전에 서게 되었다. 2007년까지 보아의 출연은 계속 이어졌다. 2008년과 2009년에는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동방신기가 백팀으로 출연했다. 한류 붐이 정점을 찍었던 2011년에는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그리고 카라가 동시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한일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팬데믹 등으로 인해 한국 가수들의 홍백가합전 참가가 다소 뜸해졌다. 이러한 흐름이 다시 시작된 건 작년부터다. 2017년부터 꾸준히 출전하던 트와이스를 포함하여 르세라핌과 아이브, 이렇게 세 그룹이 홍팀으로 출전했다. 올해는 미사모(트와이스의 미나, 사나, 모모로 구성된 유닛)와 르세라핌, 뉴진스, 스트레이키즈(Stray kids), 그리고 세븐틴이 출전한다. 동방신기 이후 K-POP 남자 그룹이 홍백가합전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이다. 거기다 JYP가 주최한 일본 내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결성된 니쥬(NiziU)와 CJ ENM이 제작했던 ‘프로듀스 101 재팬’을 통해 결성된 JO1까지 포함하면 K-POP 관련 그룹은 총 7팀이 출연하는 셈이다. 역대 최다 출전이다. 

 

쟈니스가 빠진 자리를 K-POP 아이돌이 채우는 모양새일 수도 있다. 반면 쟈니스의 빈 자리를 K-POP 아이돌이 채울 만큼, 일본 내에서 K-POP의 위상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에서 K-POP은 어떤 위치를 점해야 할까? 이를 염두에 두고 홍백가합전 무대를 감상해 보자. 

​사카미치 시리즈의 상승  

2019년 이후로 AKB48은 홍백가합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2007년에 AKB48에 가입하여 약 17년 동안 활동했던 카시와기 유키(柏木 由紀)가 내년 3월에 졸업할 것을 발표하면서 많은 팬들이 홍백가합전 출연을 기대했다. 카시와기 유키가 홍백가합전에 출전할 수 있는 마지막 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48그룹의 라이벌인 사카미치 시리즈의 노기자카46(乃木坂46)와 사쿠라자카46(櫻坂46)가 차지했다. 사쿠라자카46의 경우 작년에 낙선한 적이 있다. 홍백가합전에는 한 번 낙선한 여성 아이돌 그룹은 재출연하기 힘들다는 징크스가 있는데, 그 징크스를 깨고 다시 출연을 확정지은 터라 이번 참가는 사쿠라자카46에 있어 의미가 크다. 

 

AKB48을 비롯한 48그룹은 2010년대 후반부터 홍백가합전에 거의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본점’이라 불리는 대표 그룹 AKB48의 경우, 2007년에 단발성으로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연달아 홍백가합전에 나가면서 모닝구 무스메(モーニング娘。)가 소속되어 있던 헬로! 프로젝트(ハロー!プロジェクト)의 걸그룹 최다 출장기록을 깰 뻔했지만 2020년부터 나오지 않으면서 미수에 그쳤다. 

 

이처럼 48 그룹이 출연하지 못하는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사안으로는 2019년에 발생한 전 NGT48의 멤버 야마구치 마호(山口 真帆) 폭행 피해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해 AKB48은 홍백가합전에 낙선했으며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반면 노기자카46을 위시한 사카미치 시리즈는 이전 48그룹이 그러했듯 각 그룹마다 확실한 컨셉을 잡고 꾸준히 활동하면서 AKB48이 놓친 그 자리를 치고 들어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노기자카46은 2012년에 데뷔한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상승세를 그리며 202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그룹으로 우뚝 선 모양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건 사쿠라자카46다. 과거 케야키자카46(欅坂46)이라는 그룹명으로 활동하며 이미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번이나 홍백가합전에 출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에이스였던 히라테 유리나(平手 友梨奈)가 탈퇴한 후 2020년에 그룹명을 사쿠라자카46으로 바꾸고 팀을 리빌딩했다. 이후 새롭게 바뀐 컨셉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성장해 나가고 있다. 지난 10월에 발매한 앨범 판매량을 보면 초동(앨범 발매 첫 주 판매량)이 44만 장을 돌파했다. 여기다 더해 홍백가합전 재출연이 이들의 성공적인 리빌딩을 보증해주고 있는 셈이다. 

 

2023년 이후로 일본에서의 걸그룹 판도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본토 걸그룹인 사카미치 시리즈 외에도 뉴진스와 르세라핌, 아이브, 에스파 등 다양한 한국의 걸그룹들이 일본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일본을 대표하는 이 두 그룹이 홍백가합전에서 어떤 무대를 보여줄까. 거기서 K-POP과 J-POP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