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
‘BTS 모뉴먼츠: 비욘드 더 스타(이하 ‘모뉴먼츠’)’ 다큐멘터리는 ‘Life Goes On’의 노랫말처럼 야심 차게 준비한 2020년 프로젝트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앞에 백지화되던 시기를 첫 장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시곗바늘을 돌려 2013년 6월 12일의 데뷔 쇼케이스를 앞둔 방탄소년단 멤버들을 소환한다. 환희와 영광, 전인미답의 새로운 역사를 걸어온 방탄소년단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8부작 다큐멘터리는 시작부터 단순 업적을 나열하고 그 의미를 해설하는 위인전과 선을 긋는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방탄소년단도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되지 않았다.
많은 영미권 음악 매체가 방탄소년단의 세계 진출 과정에서 1960년대 비틀스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언급했다. 미국 땅을 밟은 타국 문화의 상업적 대성공과 거대한 미디어 현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진짜 두 그룹이 공유하는 경험은 지독한 무명기와 슈가가 언급하듯 “몸을 갈아 넣어서” 완성한 고행의 기록이다. 고향 리버풀에서의 공연으로 어느 정도 인기를 얻게 된 신인 밴드 비틀스는 1960년 독일 함부르크로 건너가 하루 12시간 이상 밤낮없이 공연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술과 각성제 없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살인적인 일정과 냉담한 관객들 앞에서 그들이 원하는 노래를 어떻게든 연주해야 했던 시기였다. 1961년 리버풀 캐번 클럽과 함부르크를 오가게 되자 노동의 강도는 더욱 세져 매일 밤 7~8시간 이상의 철야 공연을 했다. 오늘날 세계가 기억하는 위대한 밴드 비틀스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아마추어 시기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다.
마찬가지로 방탄소년단도 하늘에서 떨어진 그룹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초기 힙합 크루에서 K-팝 아이돌로 기획 방향을 바꾸고 나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한 방탄소년단이 경력 내내 팽팽한 긴장감과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선택한 피와 땀을 영상 증거로 제출한다. 6개월 내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지민의 회상은 데뷔라는 목표만 보고 달렸더니 데뷔 후가 더 힘들었노라 말하는 RM의 말처럼 시작이었을 뿐이다. 대대적인 투자와 지난한 작곡 과정으로 승부처가 될 것을 모두가 직감한 ‘Danger’는 음원 차트에서 외면받고 기획사는 경영난에 빠진다. 대형 기획사 출신이 아니고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그룹의 주위에는 항상 조급함, 피로감, 공포, 번아웃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뿐이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몸을 움직이게 만들고 거짓 없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랩과 노래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청춘의 고민이 그렇게 나온다니까요.”라 말하는 슈가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창작은 지난한 반복과 노동 가운데 꽃을 피운다. 진이 말한다. “저희 애들은 위기든 아니든 열심히 했어요.”
‘모뉴먼츠’는 방탄소년단의 놀라운 성과를 애써 조명하지 않는다. 매 순간 눈앞의 목표를 향해 순수하게 집중하고 또 환호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집중하다 보면 그들의 성공은 자연히 따라오는 이치처럼 느껴진다. 2014년 10월 17일 악스홀에서 첫 콘서트를 가진 이들이 2015년 첫 음악 방송 1위와 더불어 이듬해 K-팝 가수들의 꿈의 무대 올림픽체조경기장에 입성할 때, 2016년 Mnet ‘MAMA(엠넷 아시아 뮤직 어워즈)’ ‘올해의 가수상’을 받았을 때, 2017년 저스틴 비버의 독주를 깨뜨리고 톱 소셜 아티스트 트로피를 거머쥐며 본격적인 미국 대중음악 시장 진출을 알릴 때, ‘Dynamite’로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기록하고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팝 듀오 그룹 퍼포먼스에 노미네이트되는 순간, 이 모두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오히려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 그룹과 멤버들을 옥죌 때가 더 많다. 꿈꿔본 적 없던 월드 투어와 세계시장의 중압감이 영혼을 짓누른다. 2018년 단체로 번아웃을 호소하는 멤버들이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할 수가 있었어”의 ‘Fake Love’를 연기하듯 부르는 장면은 세계시장 진출 후 빛나는 순간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전할 수 없었던 진심을 담고 있다.
갈등은 쉬지 않고 찾아온다. 하지만 그 굴곡도 한 명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소중한 계기다. 단지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방탄소년단은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지옥 같은 트레이닝과 무명의 설움을 함께 삼킨 일곱 멤버들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인생의 화려한 순간을 함께하는 친구들이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 매 순간 소통하고 진심을 쏟아내는 이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외롭지 않다. 방탄소년단의 지지자 아미는 무한한 사랑의 동료다. 2013년 RM, 지민, 정국의 생일 파티에서 정국이 눈물을 흘리며 아미를 향해 감사를 표하기 전부터 아미는 방탄소년단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방탄소년단이 노래해야 할 이유로 존재한다. 2016년 11월 12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아미와 함께 팬 송 ‘둘! 셋! (그래도 좋은 날이 더 많기를)’을 부른 장면은 팬덤의 의미를 되새기는 순간이다. 방탄소년단의 팬 송은 여타 그룹의 팬 송처럼 낙관적이거나 다정하지 않다. 처절하고 진지한 그룹의 삶을 고백하며 팬과 공감하기 위한 진심을 담는다. 이어 RM은 “누구보다 노래 잘하고 잘생기고 춤을 잘 춰서가 아니라, 우리만이 갖고 있는 그 특별한 정서”를 방탄소년단의 매력으로 설명한다. 결국 진심의 승리다. 방탄소년단은 파편화된 취향의 세계에서 많은 이들의 진심을 끌어내며 거대한 공동체의 위력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세계 정상에 선 스스로를 적응하고 즐기며, 팬 앞에서 무대를 펼칠 때 가장 행복한 방탄소년단이 된다.
방탄소년단의 10년은 K-팝 역사에 우뚝 선 기념비다. 슈가의 말처럼 8년 경험을 여타 가수의 20년으로 느낄 만큼 몸을 갈아 넣으면서 ‘피 땀 눈물’로 빚은 경력이다. 그 고통마저 즐길 수 있는 경지를 노래하는 ‘ON’과 ‘MAP OF THE SOUL : 7’ 프로젝트를 열려고 할 때, 얄궂게도 세계가 멈춘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히 해나가며 오래 쌓아온 진심으로 세계를 위로한다. “나답게 살아왔다.”는 정국의 자부대로 방탄소년단은 방탄소년단답게 살았다. 그룹 활동을 잠시 멈춘 지금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훗날에도, 방탄소년단은 방탄소년단답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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