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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 riizeofficial.com

‘Love 119’의 뮤직비디오는 인공위성 발사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과 함께 늦잠을 자고 있던 라이즈(RIIZE) 멤버 소희의 핸드폰에 도착한 정체불명의 문자메시지로 시작한다. 미지의 저편에서 날아온 사랑의 예언과 함께 우연히 튕긴 탁구공이 라디오 채널을 돌리자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익숙한 과거의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2005년 밴드 이지(izi)가 KBS 드라마 ‘쾌걸춘향’을 위해 노래한 ‘응급실’의 피아노 전주는 ‘Love 119’의 기초가 되어 이 노래가 음악으로 만든 타임머신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행선지는 2000년대다. 

2024년 라이즈의 첫 디지털 싱글은 노스탤지어와 향수의 복합 작용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는 정서로의 노스탤지어부터 살펴보자. ‘Love 119’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할 세대는 2000년대에 10대 혹은 20대로 살았던 1990년대생들이다. 영상 속 멤버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주황빛 미러볼 조명의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응급실’을 불렀던 이들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 있게 이 노래를 골라 부를 수 있다. 멤버 전원이 연기에 도전한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1990년대 말 조성모의 ‘To Heaven’과 함께 21세기 초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대유행한 드라마타이즈 장르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고, 영상이 레퍼런스로 삼는 아시아권의 학원물의 팬으로 자란 세대다.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되는 일본 지하철역과 소품으로 등장하는 브라운관 TV는 그리운 옛 시간의 증거다. 1월 11일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가진 컴백 무대에서 곡의 지향을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라이즈 멤버들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화면은 2000년대 휴대폰의 UI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래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 시기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이다. 목표가 분명하다. 

 

왜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보이 그룹은 세 번째 싱글부터 레트로 문법을 선택했을까. 팬데믹 시기의 Y2K 리바이벌과 함께 이제는 익숙해진 2000년대 재유행 흐름 혹은 VHS 캠코더를 든 가상의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구현한 뉴진스의 시간 여행물 ‘Ditto’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Love 119’는 우연한 일회성 기획이 아니다. 라이즈의 음악 행보와 그들에 내재된 강한 복고의 정서를 고려했을 때 이 곡은 2000년대로의 귀환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필연적으로 등장했을 결과에 가깝다. NCT DREAM이 H.O.T.의 ‘캔디’를 가져오고 에스파가 광야의 중심에서 S.E.S.의 ‘Dreams Come True’를 외친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나 리메이크가 아닌 샘플링, 선배들의 곡이 아닌 그들과 동 시기에 경쟁했던 원 히트 원더의 정서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라이즈는 시간에 대해 갖는 감상적 그리움의 정서 노스탤지어를 넘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의 향수를 기획의 근간에 배치한다. SM 컬처 유니버스의 신세계를 등진 이들의 발걸음은 2000년대 중후반 SM엔터테인먼트의 부흥과 르네상스를 향한다. 역순으로 살펴보자. ‘Love 119’의 따스한 프로듀싱은 EXO의 겨울 스페셜 앨범 ‘12월의 기적’과 온화한 기운을 품고 있던 2000년대의 SM타운 겨울 앨범의 무드를 계승한다. ‘Talk Saxy’의 뮤직비디오가 선보이는 얼굴 클로즈업과 화려한 네온사인 배경은 f(x)의 ‘라차타 (LA chA TA)’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샤이니가 스스로의 음악을 컨템퍼러리 팝으로 수식했다면 라이즈는 동시대의 음악에 감정을 싣는 이모셔널 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거대 담론이나 철학 대신 경쾌한 청춘의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다. 동방신기와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데뷔하던 시기 K-팝 아이돌 대신 아카펠라 댄스그룹이라는 설명을 즐겨 사용한 것처럼 라이즈도 ‘Get A Guitar’의 후렴과 두 번째 벌스에서 목소리로 화음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들려준다. 음악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음악으로 이슈를 만들어온 흐름 역시 최근 등장하는 그룹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데뷔 전 가장 큰 이슈는 윤상의 아들 앤톤의 합류 소식이었고, ‘Get A Guitar’와 ‘Talk Saxy’에서 악기를 과감히 제목에 명기할 뿐 아니라 소리를 기초로 하여 1980년대 스타일의 댄스 팝과 808 베이스 중심의 힙합 장르를 선택하는 등 충실한 창작 자체로 화제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시공간적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복고의 시도에 새로운 작법이 결합하며 입체적 그룹으로의 라이즈를 완성한다. 성찬과 쇼타로의 합류로 예고된 NCT의 감각은 ‘Talk Saxy’에 이어 ‘Love 119’에서 랩으로 구성한 후렴으로 구체화된다. 무한 확장의 대전제 아래 영원한 우정의 감동으로 빛난 NCT DREAM의 정서가 ‘Memories’로 이어진다면 퍼포먼스 곡 ‘Siren’과 타이틀 곡에서의 역동적인 안무는 NCT와 서브그룹의 향상된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Love 119’의 무대에서 멤버들은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서로 눈을 맞추며, 브리지 파트에서는 두 명의 멤버가 짝을 이뤄 저음부와 고음부를 맡아 화합을 구현한다. 2000년대의 유산을 적극 활용하나 시간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설정과 세계관의 뮤직비디오는 과거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계승하는 듯하나 그 표현 방식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과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를 연상케 한다. 2000년대 SM엔터테인먼트의 까마득한 선배 그룹들을 열렬히 지지했던 이들의 ‘핑크 블러드’를 자극함과 동시에 신세대 K-팝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치를 활발히 활용한다. 라이즈가 빠른 시일 내 팬덤을 확보하고 신인 보이그룹 중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라이즈는 SM엔터테인먼트가 SM 3.0 기획으로 조직을 개편한 후 처음으로 출격한 신인 그룹이다. 복잡다단한 세계관이나 기획자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는 자연히 획기적인 도전보다 오래 쌓아온 강점을 활용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라이즈가 신인 그룹임에도 고향을 환기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실질과 형식 두 영역에 고루 채택하는 이유다. 그들의 유산은 30년 이상 K-팝의 역사와 함께하며 쌓아온 안정적인 제작 과정과 트레이닝 시스템, 즉각적으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각과 기획 노하우다. 때문에 그들의 시선은 계속 과거를 향한다. 수더분한 소년들이 기타 한 대로 소소하게 합을 맞춰보다가 선배들이 섰던 세트장에서 고전적인 카메라 구도로 춤을 추고, 틴에이지 로맨스물의 주인공이 되어 연기에 도전하는 성장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하지만 Z세대에겐 너무 멀게 느껴지며 히트 작곡가들의 작가주의와 기획자의 성향이 강하게 묻어났던 1990년대는 더 이상 기준이 될 수 없다. K-팝이 새로운 시작의 기지개를 켜던, K-팝이 전성기를 맞이하려 하던 시대가 새로운 참고 지점이 된다. 

 

‘Love 119’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미래를 사는 누군가가 멤버들에게 파란색 수수께끼의 메시지를 보낸다. 라이즈가 우리에게 보내는 음악은 최신 메신저 서비스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과거에서 날아온 초록창 문자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익숙하다가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노래 제목처럼 긴급한 사랑이 아니다. “이 모든 게 내가 널 좋아하는 건가”를 궁금해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렇게 거듭 보고 나면 어느 순간 “난 그럼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아”라 확신하는 때가 온다. 라이즈가 마음을 뺏어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