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뒤집는 축제의 서막

김리은: ENHYPEN의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의 타이틀 곡 ‘Given-Taken’의 뮤직비디오는 송곳니를 가진 미지의 존재를 연상시켰다. 그다음 앨범 ‘BORDER : CARNIVAL’의 타이틀 곡 ‘Drunk-Dazed’의 퍼포먼스는 이전 앨범에 등장했던 죽음의 메타포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한다. 멤버들이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오는 인트로를 비롯해 손바닥을 꺾어 관절을 강조하거나 팔다리를 직선으로 활용하는 후렴구의 안무들은 좀비 또는 뱀파이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존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정작 퍼포먼스가 보여주는 것은 무대 위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ENHYPEN 멤버들의 에너지다. 1절에서 니키와 성훈과 함께 춤추던 희승이 무대 정면으로 나와 결의를 표현하는 동작이나 후렴구에서 멤버들이 좀비나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동작들을 빠르게 추면서 동시에 뛰어오르는 K-팝 특유의 ‘칼군무’는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강조한다. 그사이에 놓이는 것은 ‘사실 무서워 난'이나 ‘그 끝에는 목이 타는 내 맘' 같은 가사에 맞춰 제이크와 희승이 머리를 감싸 쥐는 것처럼 내적 고뇌를 표현하는 연극적인 장치들이다. 니키가 ‘나에게 주어진 그 빛 성화의 불길’에서 다른 멤버들이 만든 왕좌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후, 성훈이 ‘주인이 될 때까지 Imma ride’라 노래하는 것은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연상시켰던 ‘Given-Taken’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햄릿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어머니가 독주를 마셔 삶을 마감하는 것과는 달리, ENHYPEN 멤버들은 ‘즐겨봐 이 Carnival’을 노래할 때 그들의 손으로 만든 잔을 스스로 마시고 전력으로 춤춘다. 요컨대 ‘Drunk-Dazed’의 퍼포먼스는 비극과 죽음의 메타포들을 전복시키고, 그사이 멤버들이 겪는 고뇌를 부활을 위한 축제의 과정으로 승화시킨다.

 

ENHYPEN은 오디션 프로그램 ‘I-LAND’를 통해 데뷔했다. 그들은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쳤고, 지금은 무대 위에서 투표 결과가 아닌,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인정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Drunk-Dazed’의 마지막에서 ENHYPEN 멤버들이 외치는 가사는 ‘난 나를 깨워 심장을 태워 내 꿈을 채워'다. 이는 노래가 끝나기 전 절정을 앞두고 제이가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을 표현한 뒤, 다시 멤버들이 ‘갈 때까지 가봐 Go’라며 힘을 다해 춤추는 이유일 것이다. ‘Drunk-Dazed’의 퍼포먼스는 소위 앨범의 ‘세계관'이라 해석될 만한 죽음의 메타포들을 K-팝 특유의 동적인 군무와 섞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전복시키고, 그사이에 연극적인 요소들을 배치해 이를 팀의 현재와 연결한다. 그 결과, ‘나를 가둔 Carnival’과 ‘즐겨봐 이 Carnival’이라는 모순된 가사가 공존하는 ‘Drunk-Dazed’의 복잡한 감정선이 3분 내외의 퍼포먼스 속에서 직관적으로 표현된다. 수많은 이미지와 장르가 섞인 이 ‘규칙 없는 세계'를, ENHYPEN이 뒤집는 방법이다. 

4세대 K-팝의 우주

강명석: ENHYPEN의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과 새 앨범 ‘BORDER : CARNIVAL’은 그들이 주인공인 로드무비와도 같다. ‘BORDER : DAY ONE’에서 ‘Intro : Walk the line’을 시작으로 경계를 따라 걷던 ENHYPEN은 마지막 곡 ‘Outro : Cross the Line’에서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BORDER : CARNIVAL’의 첫 곡 ‘Intro : The Invitation’은 그들을 카니발로 부르는 초대고, ENHYPEN은 타이틀 곡 ‘Drunk-Dazed’에서 카니발의 무대에 선다. 조명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사람들은 크게 웃고 떠든다. 그러나 사람들을 ‘high' 상태로 만드는 EDM, ’Drunk-Dazed’를 부르는 ENHYPEN은 ‘이 가면 뒤 초라한 진실’이 벗겨질까 두렵다. 그들은 기교를 좀처럼 부리지 않고 ‘즐겨봐, 이 Carnival’이라고 외치지만, 카니발의 넓은 공간에 울리는 더 큰 사운드에 가로막힌다. ‘Drunk-Dazed’는 표면적으로 클럽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신나는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이 소리들은 넓은 공간에 퍼지듯 울리고, 멤버들의 목소리는 그 안에 묻힌다. 이는 복고적인 R&B 스타일의 멜로디와 밴드  편곡을 기반으로 한 사랑 노래이면서도 불길한 분위기의 효과음을 넣은 ‘FEVER’, 청량한 분위기의 팝 같지만 음을 늘이고 퍼지게 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Not For Sale’ 또한 마찬가지다. 이 음악들이 울려 퍼지는 세상은 신나고, 멋지고,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ENYHPEN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FEVER’는 사랑을 ‘너 때문에 온몸이 타올라’처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Not For Sale’은 달콤한 러브 송 멜로디에 ‘차가운 심장 위의 Price tag’ 같은 비관적인 표현을 한다. ‘Intro : Walk the line’은 내레이션이 흐르는 사이 다양한 효과음들과 복고적인 인디 록을 연상시키는 사운드가 결합된다. 

 

‘BORDER : CARNIVAL’의 곡들은 ENHYPEN이 존재하는 공간과 그들이 겪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그래서 장르가 아닌 같은 공간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일관성을 유지한다. ‘별안간 (Mixed Up)’은 힙합 비트에 R&B 멜로디를 얹으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록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유명세를 원치 않은 ENHYPEN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이 곡을 통해 판타지 세계 속 카니발 무대에 선 ENHYPEN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 후 갑작스럽게 주목받은 ENHYPEN이 ‘Mixed UP’된다. 현실과 앨범 속 세계의 ENHYPEN이 뒤섞이고, ‘BORDER : CARNIVAL’ 속 ENHYPEN은 현실의 그들을 연상시키는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음악은 장르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앨범 속 세계의 공간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결과, 앨범은 물론 한 곡에서도 여러 장르를 섞는 음악 장르로서의 K-팝, 판타지, ‘햄릿’과 같은 고전 그리고 아티스트의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인 세계가 탄생했다. 심지어 그 세계 안에서 앨범마다 아티스트의 현재를 다른 세계 속의 이야기로 구현할 수도 있다. 이 앨범의 마지막 곡 ‘Outro : The Wormhole’에는 ‘Multiple dimensions wait for us’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단지 ENHYPEN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별개의 차원처럼 여겨졌던 장르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K-팝 안에서 만들어졌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가버린 K-팝이. 

원하는 대로 갈 때까지 가

오민지: ‘BORDER : CARNIVAL’의 발표 전 공개된 콘셉트 포토 ‘UP ver.’은 'Intro : The Invitation' 리릭비디오 말미의 가면과 인장이 찍힌 초대장과 이어지며 ENHYPEN이 카니발에 초대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멤버들의 의상과 헤어는 단정하게 격식을 갖추고 있고, 경직된 표정과 정적인 자세는 초대받은 공간에 처음 내딛는 순간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다양한 음식과 화려한 금박 장식의 가구는 그들이 있는 장소가 인트로 내레이션의 마지막 문장인 ‘Here, come inside the castle. Take everything’의 화려한 성임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Drunk-Dazed’에서 ‘We’re in love with this carnival’이라며 즐기는 듯 묘사되던 파티는 ‘나를 가둔 Carnival’로 바뀌고, 가면무도회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파티를 즐기기 위해 쓰는 가면은 벗기 두려울 만큼 ‘이 가면 뒤 초라한 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HYPE ver.’에서 그들은 서서히 카니발에 빠져든다. 콘셉트 필름의 붉은 필터와 멤버들의 몽롱한 표정은 ‘Drunk-Dazed’의 ‘도취된’ 모습을 시각화한다. 동시에 여러 영상들과 겹쳐지며 흔들리는 화면은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아름답고 황홀’한 공간이자 ‘모든 것이 바뀌어, 모두 무너져(Drunk-Dazed)’ 혼란스러운 공간임을 묘사한다. 그러나 ENHYPEN은 ‘DOWN ver.’에 이르러 더 이상 이 세계가 두렵지 않다. 콘셉트 필름의 그래픽 효과와 카메라 워크는 세계가 아직까지 혼란스럽다는 것을 표현하듯 혼잡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콘셉트 포토에서 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자동차나 뒤집어진 하늘은 위아래가 뒤집힌 세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규칙 없는 세계는/전부 뒤집혀(Drunk-Dazed)’ 서 있어도 멤버들은 농구공을 들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손전등을 비추거나 부서진 차에 기대며 자유분방하고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란한 카니발을 처음 경험하며 두려워했던 이들은(UP ver.) 점차 축제 같은 분위기에 도취되고(HYPE ver.) 아직은 혼란스럽지만 그 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는(DOWN ver.)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ENHYPEN이 새로운 세계의 카니발에 입성한 것은 직접 ‘뒤집힌 세계의 문을 두드린’ 결과다(so we beat on the door of this flipped world)(Intro : The Invitation).’ 이후 펼쳐질 세계는 예상할 수 없기에 ‘세상이 별안간/뒤집’혀 어지럽고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즐겨볼게 또/세상을 별안간/뒤집어놔 발칵(별안간(Mixed Up))’이라며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카니발은 비로소 ‘즐겨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이 시작점이자 경계선인 데뷔와 자신의 위치가 주어진 것인지 쟁취해낸 것인지(Given-Taken)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BORDER : CARNIVAL’은 데뷔 후 마주한 현실을 화려하지만 두려우면서 낯선 카니발에 비유한다. 그리고 타이틀 곡 ‘Drunk-Dazed’는 이 카니발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후 점점 도취돼(Drunk) 몽롱해진(Dazed) 소년들의 다짐처럼 느껴진다. ‘난 나를 깨워/심장을 태워/내 꿈을 채워’나가고, ‘원하는 대로 갈 때까지 가’라고. 

글. 김리은, 강명석, 오민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빌리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