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던 11년 전, 모두의 관심은 이 노래가 한국인 최초의 빌보드 핫 100 차트 정상을 차지하느냐에 쏠렸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당시 ‘강남스타일’은 2012년 9월 22일 한국어 노래 최초로 100위권에 진입한 후 2주 만인 10월 6일에 98계단을 뛰어넘어 2위까지 오른 상황이었다. 모두가 마지막 한 단계 도약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둘째 주를 보내고, 셋째 주 발표를 기다려도 끝내 1위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강남스타일’은 7주 동안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를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때의 1위 곡이 바로 8주 연속 빌보드 핫 100 차트 맨 꼭대기를 장식한 밴드 마룬파이브의 ‘One More Night’이다. 마룬파이브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사랑받는 그룹이지만 10여 년 전 기대하고 싸이의 기록을 지켜본 이들에게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벽처럼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최근 K-팝 팬들에게 2012년 마룬파이브처럼 다가오는 가수가 있다. 모건 월렌이다. 1993년생 컨트리 가수 모건 월렌은 올해 3월 3일 발표한 세 번째 정규 앨범 ‘One Thing At A Time’으로 미국 음악 시장을 정복했다. 여기서 ‘정복했다’라는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실에 대한 표현이다. 발매 첫 주 앨범 수록 곡 36곡 모두가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고 그중 다섯 곡이 10위권 내에 안착했다. 앨범 판매량은 데뷔 주에만 50만 장을 기록하며 빌보드 200 차트 10주 연속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트와이스, Agust D, 세븐틴, 르세라핌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One Thing At A Time’의 위세를 꺾지 못하고 2위에 머물렀다. 이들의 앨범 판매량은 평소라면 충분히 빌보드 200 1위를 할 수 있는 수치였지만, 모건 월렌의 앨범 판매량이 더욱 높았다. 그나마 핫 100 차트에서 마일리 사이러스, SZA, 지민이 모건 월렌의 독주를 일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앨범 메인 싱글 ‘Last Night’의 엄청난 흥행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다. ‘Last Night’은 모건 월렌의 첫 빌보드 핫 100 1위 곡이며 1980년 에디 래빗(Eddie Rabbitt)의 ‘I Love a Rainy Night’ 이후 처음으로 나온 남성 컨트리 가수의 빌보드 넘버원으로 현재 5주 동안 정상을 지키고 있다.
미국 백인 사회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장르 컨트리는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 속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빌보드 싱글 및 앨범 차트에서 어렵지 않게 컨트리 가수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고, 컨트리의 심장 내슈빌에서 매년 열리는 CMA 어워즈(Country Music Association Awards)는 미국 내 가장 중요한 음악 행사 중 하나다. 플로리다 조지아 라인, 댄 앤 셰이 등 가수들은 비비 렉사나 저스틴 비버와 같은 인기 팝스타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하며 2019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을 거머쥔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처럼 평단의 찬사를 확보하기도 한다. 빌보드 핫 100 차트 최장 기간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는 릴 나스 엑스의 ‘Old Town Road’는 컨트리와 힙합의 교배였으며 곡의 성공을 이끈 결정적 계기는 마일리 사이러스의 아버지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컨트리 가수 빌리 레이 사이러스의 참여였다. 고루한 음악, 중장년층에만 소구하는 음악이라는 편견도 걷히고 있다. 2021년 기준 R&B/힙합, 록, 팝에 이어 미국 내 스트리밍 중 7.9% 비율을 차지하는 컨트리 소비는 스트리밍과 틱톡 중심의 소셜 미디어 인기에 힘입어 젊은 세대 중심으로 큰 성장세를 보인다. 앨범 판매량은 기성 컨트리 스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루크 콤스, 잭 브라이언 등 Z세대에게 사랑받는 컨트리 가수들은 스트리밍 서비스와 틱톡을 적극 활용하며 젊은 컨트리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모건 월렌은 그 흐름의 선두를 이끄는 스타다. 그는 컨트리 음악계에서도 아웃사이더이자 반항아다. 컨트리 음악 산업을 다룬 드라마 ‘모나크’ 속 등장하는 유서 깊은 음악 가문의 후손도 아니고, 컨트리 수도 내슈빌에 입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인기 가수들의 공연장을 따라다니는 음악 지망생도 아니다. 모건 월렌은 1993년 미국 남부 테네시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야구선수를 꿈꾸며 학교 팀에서 운동하던 스포츠맨이었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지만, 진지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척골 인대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나서였다. 그가 대중음악 시장에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자리는 라이브 클럽과 바가 아니라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더 보이스’의 여섯 번째 시즌이었다. 심지어 이 당시 모건 월렌에게는 컨트리 가수의 정체성도 희박했다. 스무 살 조경사로 자신을 소개한 그는 마룬파이브의 애덤 르빈에게 지도받으며 아비치, 원 디렉션, 하위 데이 등 다양한 가수의 노래를 불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방송 출연을 기점으로 모건 월렌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2019년 컨트리 라디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로 선정된 ‘Whiskey Glasses’에서 모건 월렌은 순박하고 주눅 든 남부 청년이 아니라 화끈하게 옆머리를 밀고 체크무늬 셔츠를 찢어 입은 채로 독주를 들이켜는 거친 컨트리 록 스타로 자신을 브랜딩했다.
거친 이미지를 위해 삶의 방향도 바꿨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 두 명의 여성 팬과 키스를 나누는 영상이 유출되며 논란이 됐을 때 그는 진지한 대응 대신 익살스러운 틱톡 사과 영상을 택했다. 내슈빌에서 선배 뮤지션 키드 록이 운영하는 바에 들렀다가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워 체포되기도 했다. 2021년 2월 2일 친구들과 함께 흑인을 비방하는 ‘N워드’를 내뱉는 영상이 유출된 건 심각한 위기였다.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과 유명 스트리밍 서비스, 컨트리 음악 협회가 그를 제명했고, 빅 라우드 레이블은 그의 녹음 계약 중단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모건 월렌은 오늘날의 거대한 성공을 거머쥐게 되었다. 사회적 반발과 경솔한 언행을 지적하는 반응, 이를 지칭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 거부감을 느낀 동정 여론이 등장해 모건 월렌의 음악을 폭발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플랫폼은 그의 음악을 신속히 제거했지만 ‘Dangerous: The Double Album’은 2021년 그해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한 앨범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벤 시사리오가 말한 대로 “비정상적으로 유지되는 히트작”이었다. 논란이 커질수록 인기가 치솟았다. 모건 월렌은 진지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흑인 음악 행동 연합(Black Music Action Coalition)에 3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성숙해져 돌아온 탕아는 자기반성 대신 그를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브로 컨트리(Bro-Country)의 문법에 충실한 백인 사회의 삶을 노래하는 앨범 ‘One Thing At A Time’을 내놓았다. 투어는 즉각 매진됐고, 공연장에서는 공화당 성향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한다.
모건 월렌은 가수를 넘어 상징이 되었다. 테일러 스위프트 이후 이렇다 할 슈퍼스타를 내놓지 못했던 미국 컨트리 시장에서 파괴적인 상업적 성과와 준수한 음악을 선보이는 모건 월렌의 존재는 반갑다.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 케인 브라운, 앨리슨 러셀, 미키 가이턴 등 사회에 변화를 촉구하며 컨트리 음악의 구조적인 젠더 및 인종 불균형을 지적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남부 백인 청년 모건 월렌의 술, 사랑, 야구 이야기가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상황은 이 장르의 주 청취층과 주요 소비 정서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크게 환영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딜레마다. 모건 월렌은 성공적인 브랜딩 전략을 펼쳤고 그 보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대가로 영광을 잃었으며 끝없는 트러블메이커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역사는 대중음악계의 모스트 원티드 맨(Most Wanted Man) 모건 월렌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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