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의 말 속에는 너울처럼 일렁이는 감정과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일렁임은 이내 파도가 되어 더 넓은 대양으로 뻗어 나가는 중이다. 자신과 팀 그리고 피어나를 껴안을 수 있을 만큼 푸르르며 깊고 힘차게. 

이전에 위버스에서 애니메이션을 추천받는 걸 봤는데, 혹시 요즘 관심을 둔 작품이 있나요?

허윤진: 예전에 ‘블루 피리어드’라는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았어요. 꿈을 좇다 포기하는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는데, 친구가 보면서 제 생각을 많이 했다며 추천했거든요. 시간 날 때 보려고요.(웃음)

 

윤진 씨가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시각적이거나 감각적인 요소에 관심이 많다고 느꼈어요.

허윤진: 원래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어릴 때 만화가를 잠깐 꿈꿨어요.(웃음) 지난번 자작곡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어릴 적 생각이 나더라고요.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창작하고 만드는, 시각적인 것에 예민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쓰며 그림을 같이 그리기도 했고요. 제가 평소에도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어릴 때는 판타지에 관심이 엄청 많아서 뱀파이어나 늑대 소녀 같은 이야기도 쓰고요.(웃음) 크면서는 시를 좋아해서 시도 써보고, 단편소설이나 리얼리스틱 로맨스도 좋아했어요.

 

그런 관심이 윤진 씨의 취미인 독서와도 연결되는 듯해요. 예전에 ‘FIM-LOG’에서 에세이를 추천하기도 했고요.

허윤진: 최근에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엄마가 ‘킨들’을 보내주셔서 앞으로 들고 다니며 읽으려고 해요. 저는 대화할 때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어떤 마인드로 살아가는지 관심이 되게 많거든요? 사람을 알아가는 게 흥미롭고 신기해요. 그래서 에세이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삶의 방향성에 대해 말하는 책, 나를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책, 남을 알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책이요.

 

독서에서 얻은 지식들이 윤진 씨의 경험과 삶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어요?

허윤진: 요즘은 이 세상에 아름답고 예쁜 게 너무 많은데 제가 살고 있는 삶 하나로 다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느껴요. 그래서 책이나 노래로 조금이나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게 좋고, 더 끌리는 것 같아요. 에세이가 아니어도 픽션의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생각이 들 수 있는 글을 보며 영감도 많이 얻고요. 제가 경험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이 있으니 그걸 최대한 느끼고 싶어요.

 

윤진 씨는 그렇게 체화시킨 감상과 생각을 글의 형태로도 잘 풀어내더라고요. 자작곡의 가사들이나 앨범 ‘Thanks to’ 같은 곳에서 특히 느껴졌어요.

허윤진: 자작곡은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싶은 순간도 있었는데, 그냥 솔직하게 썼어요.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 것도 있지만, 그런 얘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나도 같은 사람이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어요. ‘Thanks to’를 쓸 때는 진짜 투명해지려고 해요. 정말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게 와닿을 수 있도록 표현하려면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다 내려놓고 진심을 전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 다 내려놓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더 보여줄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렇게 진심을 담았던 데뷔 앨범의 ‘Thanks to’가 이번 앨범에서 ‘Burn the Bridge’로 들어갔어요.

허윤진: 너무너무 뿌듯했어요. 모든 사람 그리고 저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남겨진 유산이잖아요.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이 반영되고 가사로 쓰여서 아름다웠고, 이렇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게 신기하고 뜻깊었어요.

 

윤진 씨가 1년 전 남긴 말을 다시 마주하니 어땠어요?

허윤진: 내용은 같지만 디테일의 차이가 생겼더라고요. 제가 글을 썼을 때는 ‘잠긴 문’에 대해 “내가 아무리 두드려도 반대편에서 계속 대답이 없고 열어주지 않았다.”는 뉘앙스였어요. 그런데 ‘Burn the Bridge’는 제가 직접 그 문을 여는 걸로 바뀌어서, 그게 엄청 크게 와닿았어요. 내가 내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성장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마찬가지로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지난 트레일러 ‘The Hydra’를 위해 윤진 씨가 썼던 “I’m a mess, mess, mess” 부분이 들어갔죠?

허윤진: 어우, 너무 신선하고 신기했어요. 한층 더 입체감 있고 깊이(depth)가 생긴 것 같아요. 트레일러에서는 “나는 내가 입고 싶은대로 입을 거야.”라면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서는 “네가 입지 말라고 해도 난 입을 거야.” 이런 느낌이에요. 더 강해지고 더 당당해진 것 같아서 정말 좋았습니다. 발음이 빠르고 반복적이라 멤버들이 어려워할까 봐 녹음할 때도 은채랑 계속 연습하고 꾸라 언니도 봐주고 그랬는데,(웃음) 잘 소화해줘서 멋있게 나올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곡 중 하나예요.

 

또 다른 한 곡은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가 아닐까 싶네요.(웃음)

허윤진: 맞아요.(웃음)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는 ‘Raise y_our glass’를 쓰기 전 완성시킨 곡이었어요. 처음엔 트랙에 멜로디와 가사를 영어로 쓴 다음 가이드를 녹음했어요. 제가 항상 하는 “우리 만남이 운명 같다.”는 말을 생각하면서요. 지금 가사는 최대한 진정성 있게 편지 쓰듯, 저희가 서로에게 한 말을 반영해서 썼거든요. 팬분들께 이런 곡을 선물해줄 수 있어 기대되고, 가사에 귀 기울여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윤진 씨의 프로듀싱이 담긴 첫 르세라핌의 곡이자 뮤지션 적재 씨와의 컬래버레이션이라 더 의미가 있겠어요.

허윤진: 작년에 적재 선배님과 작업을 했는데 같이 편곡을 하며 선배님이 트랙도 직접 연주해서 만들어주시고, 멜로디 라인을 함께 수정하고 가사를 붙였어요. 외부분들께 작업을 보여드린 게 처음이라 너무 떨리고 걱정했는데, “작곡도 잘하고 윤진 씨만의 감성과 색깔이 있는 것 같다.”고 칭찬해주셔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어요. 작사만 할 때와 프로듀싱은 조금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긴 해요. 더 정이 가기도 하고,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표현하고 싶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려는 욕심이 컸어요. 앞으로 더 멋있는 곡을 만들고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앨범의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에는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하기도 했죠.

허윤진: “진짜 미쳤다. 이건 됐다.” 싶었어요.(웃음) 너무 멋있는 분이셔서 신기하고 꿈인가 했어요. 화상 미팅에서 우리 노래가 나오는데 저희는 일본에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리스트의 연주가 같이 들리는데 뒤에는 익숙한 PD님 얼굴이 있고.(웃음)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모든 게 신기했어요. 진짜 이렇게 마음에 드는 타이틀 곡은 처음인 것 같아요. 힙합 트랙인 것도 완전 제 스타일이고, 영화 ‘석양의 무법자’ 테마 곡이 샘플링으로 들어간 것도 너무 신선해요. 가사도 마음에 들고요.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의 가사가 지닌 어떤 메시지가 매력적이었어요?

허윤진: 저는 히어로보다 빌런의 서사가 궁금하고 더 끌려요. 그런 거 있잖아요. 히어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너를 버리겠다.”라면, 빌런은 “너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버리겠다.”(웃음) 후자가 너무 흥미로워요. 빌런도 처음부터 빌런은 아니니까요. ‘말레피센트’ 같은 빌런의 입장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세상의 반응이 어떨지라도, 난 빌런이라도 상관없다.” 이런 거죠.

 

윤진 씨가 설명한 매력적인 빌런이 퍼포먼스를 통해서도 발현되는 것 같아요.

허윤진: 제가 뒤로 젖혀서 허리를 꺾는 부분이 이번에도 나와요.(웃음) 그 부분이 표정도 중요하거든요. 진짜 포기한 듯, “난 이제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다 다시 빌런으로 변신하며 “아니,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걸을 거야. 빌런이 될지라도.” 이렇게요. 너무 잘 표현하고 싶어 욕심이 났어요.

 

르세라핌의 퍼포먼스에서 윤진 씨가 허리를 젖힌다거나 텀블링을 하는 고난도 동작을 지속적으로 소화해왔잖아요. 그런 점에서 부담은 없어요?

허윤진: 몰랐는데 저는 고되고 힘든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아쉬워요. “아,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마음이 있어서요. 어려운 도전이 던져졌을 때 일단 해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어떤 순간에 결과가 안 좋더라도, 모든 경험은 소중하고 나한테 좋은 영향이 될 거라고 믿는 편이거든요. 그런 경험을 안 했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테니까요.

 

윤진 씨가 말한 도전 정신은 르세라핌의 퍼포먼스와 팀워크의 핵심 같기도 해요.

허윤진: 저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회를 남기면 안 된다.”는 말을 항상 해요. 어떤 기회가 오는 건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힘들 때가 있죠.(웃음) 데뷔 초에는 서로 힘들다는 얘기를 잘 못했는데, 이젠 친해지고 편해져서 “너무 힘들다. 퇴근하고 싶다~.” 이러면서 열심히 해요.(웃음) 똑같이 힘들지만 그걸 무시하기보다 그냥 힘든 채로 이겨내는 게 진짜 성장이지 않나 싶어요. 그런 저희의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뿌듯해서, 힘들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열심인 분위기가 가능한 건, 그 바탕에 멤버 각자의 방식으로 만든 배려가 있기 때문 같거든요. ‘LENIVERSE’에서 멤버들의 의견이 돋보이게 리액션하거나 모두가 먹기 편하게 돈가스를 잘라 놓는 윤진 씨처럼요.

허윤진: 저도 제가 그렇게 한 줄 몰랐는데, 팬분들이 올려주신 사진이나 쇼츠를 보고 알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캐치하시는지.(웃음) 일부러 ‘이렇게 해야지~’ 이런 건 없었지만(웃음) “다섯 명 모두 예쁘고 잘하니까 예뻐해주세요~!” 이런 마음은 있는 것 같아요.

 

윤진 씨의 사려 깊음은 멤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느껴져요. ‘케이팝 제너레이션’에서 카즈하 씨에게 발레를 그만둘 때의 ‘설렘’을 묻는 것처럼요. 

허윤진: 즈하랑 저랑 상황이 비슷한 게 많은데요. 저도 성악에서 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나 대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을 때 얘기를 하면, 무거운 분위기로 대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생각해보면 두렵기보다 드디어 내가 좇은 꿈을 조금씩 이루기 시작한다는 설렘이 제일 컸거든요. 즈하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렇게 윤진 씨처럼 나의 경험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이끌 수 있는 시선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허윤진: 사실 이렇게 보여지는 직업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골라서, 더 신경 써서 보여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입체적이고 다방면이니까요. 분명 숨기는 감정과 숨기는 모습이 있을 텐데, 그걸 알아주는 게 저한테 힘이 많이 되거든요. 그래서 멤버들한테는 그런 모습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가 봐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윤진 씨는 겉모습보단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중시하는 것 같아요.

허윤진: 내가 나를 드러내는 만큼 더 깊이 와닿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로 영향을 주는 것도 당연히 좋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좋은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 저는 공감하고 기댈 수 있는 안식처 같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그 사람을 보면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이고, 가슴이 덜 두근거리고, 내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법을 알아갈 수 있는 사람이요. 저는 제 자신에게도 저희를 응원해주는 분들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르세라핌 허윤진이라는 사람은 진짜 피어나분들이 만들어준 사람이라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 모습이 저는 좋아요.(웃음) 저를 예쁘게 생각하고 단점을 안아주는 게 감사하고, 그런 제 모습이 좋아서 인간 허윤진이 그렇게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것 같아요. 진짜 허윤진과 피어나분들이 기대하는 허윤진이 같을 수 있도록.

 

윤진 씨가 생각하기엔 르세라핌 허윤진과 인간 허윤진에는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걸까요?

허윤진: 이번 앨범의 ‘Thanks to’에도 얘기했는데, 저는 사실 되게 되게 소심하고 불안도 많고요.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감이 엄청 높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진짜 진심인데(웃음) 피어나 덕분에 엄청 올랐고, 그런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1년 전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진짜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르세라핌이 여러모로 윤진 씨에게 큰 의미 같아요. “헤매고 방황을 했는데 그걸 잡아주고 찾아준 게 르세라핌”이라고 ‘케이팝 제너레이션’에서 말하기도 했잖아요.

허윤진: 그때는 저라는 사람에 대한 방황도 많이 하고, 꿈을 좇으면서 제 자신을 많이 잃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다시 발견해주고, “너는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사람이고,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를 알려준 게 이 팀이에요. 그 꿈도 르세라핌으로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꿈을 이루게 한 거네요.

허윤진: 네, 그런 것 같아요.

 

방황이 끝난 윤진 씨가 앞으로 떠나게 될 모험은 어떤 여정이 되길 바라요?

허윤진: 예전에는 “왜 나는 항상 쉽지만은 않은 길을 걸어야 하나?” 이랬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길을 가야 보이는 것도 더 많고, 배우는 것도 더 많고, 느끼는 게 많기 때문에. 저는 곧은 길이 아닐지라도 르세라핌이면 그 길을 걸어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같이 가는 거니까.

Credit
글. 윤해인
인터뷰. 윤해인
비주얼 디렉터. 전유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오민지
사진. LESS / Assist. 이수정, 박순석
아티스트 의전팀. 김형은, 김아리, 손나연, 신광재, 김현호, 박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