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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사진 출처. 드림캐쳐 컴퍼니

근래 K-팝 씬에 터프한 록 사운드를 차용한 곡이 부쩍 많이 들린다. 올해는 특히 거친 디스토션 기타 소리를 다양한 비트에 삽입하는 시도가 늘었다. 반항적인 이미지에 적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달려라 방탄’은 올드힙합처럼 루프로 연주되는 드럼 소리 위에, 드리핀의 ‘ZERO’는 요즘 K-팝다운 트랩 스타일 비트 위에,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Good Boy Gone Bad’는 독특하게도 후처리한 콩가 드럼 사운드 위에 디스토션 기타 소리를 얹었다. 기타뿐만이 아니다. 아예 다크한 느낌의 팝 록을 내세운 팀들도 있었다. ‘Test Me’의 엑스디너리 히어로즈처럼 정석대로 밴드 편성 하에 선보이는 경우도 있고, ‘TOMBOY’의 (여자)아이들이나 ‘Ring ma Bell (what a wonderful world)’의 빌리처럼 다크한 팝 록에 중독적인 안무를 가미하는 팀도 있다. 이러한 트렌드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지난 5년간 K-팝 씬에서 디스토션 기타와 난폭한 록 드럼 사운드를 가장 활발하게 선보여온, 과장 좀 보태 그런 사운드를 전유하다시피 한 그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드림캐쳐의 이야기이다.

  • ©️ DREAMCATCHER COMPANY

하드한 록 인플루언스를 품은 K-팝. 드림캐쳐는 2017년 1월에 데뷔해 5년의 시간 동안 음악적으로 일관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분명 가창과 대인원 안무를 선보이는 K-팝 걸그룹이지만, 그 음악의 토대에는 2017년 당시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록과 메탈 사운드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질적이기만 했던 그들이지만, 팝 록의 유행이 돌아오고 있는 지금은 원조 K-팝 록 그룹으로서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남들이 다 하기 전 그것도 무려 5년 전부터 한 우물을 파왔다는 고집 있는 이미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드림캐쳐의 무기다.

 

2010년대 중후반은 영미권 팝 시장에서 ‘록은 죽었다(Rock is dead).’는 선언이 공공연하던 때였다. 키스의 진 시몬스가 2014년부터 인터뷰를 통해 이런 의견을 계속해서 피력했고 이에 호응하는 업계 관계자도 많았다. 긴 시간 당연하게 팝 사운드의 중심을 차지해왔던 록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부상한 힙합과 2000년대 말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EDM의 영향으로 점차 설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2017년엔 일렉 기타 판매량이 지난 10년간 3분의 1가량 감소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며, 음악 소비에 있어 드디어 스트리밍이 실물 음반 판매량를 넘어서기도 했다(힙합과 EDM은 스트리밍 소비가 강세인 반면, 록 장르는 실물 음반 위주였다.). 미국 팝 시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성장해온 K-팝 아이돌 씬 역시 고전적인 록이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단, 자국 음악 시장이 상당히 큰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예외적으로 아직까지 록 음악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인구가 꾸준했고, 실물 음반 판매량도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여전히 높았다. 인터넷을 통해 음악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신인 뮤지션은 대부분 록 인플루언스를 내포하고 있었다. 니코니코 동화 등 동영상 서비스에서는 화려하고 속도감 있는 록 편곡 음악이 유행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 앨범 차트를 장악하다시피 한 AKB48 사단 히트 곡에서도 화려한 기타 연주나 힘 있는 드럼 연주를 쉬이 들을 수 있었다. 20세기부터 그랬듯 아니메에 록 밴드들이 주요 사운드트랙을 장식하는 경향 역시 지속되었다. 한국에서도 록의 오랜 팬들 그리고 이런 일본 서브컬처에 관심 있는 리스너들은 여전히 록에 애정을 표했다. 

드림캐쳐 멤버 5명은 2014년 밍스(MINX)라는 팀명으로 한 번 데뷔했지만, 쏟아져나오는 걸그룹들 사이에서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였다. 정체기 동안 이들의 소속사 해피페이스 엔터테인먼트(현 드림캐쳐 컴퍼니)의 대표 이주원은 팀의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1990년대 일본 음반 수입을 시작으로 엑스재팬의 리더 요시키의 첫 내한 공연을 성사시키는 등 일본 대중음악, 특히 J-록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2000년대 K-팝 걸그룹은 대부분 가능한 한 넓고 얕은 청자층을 타깃으로 기획되어 왔다. 보이그룹처럼 열정적인 팬덤을 모으기보다는 대중을 공략하는 것이 왕도라 여겨졌다. 2010년대 중반엔 트와이스나 레드벨벳처럼 팬덤 위주의 기획도 등장했고, Mnet ‘프로듀스 101’ 시리즈도 걸그룹 팬덤이 단단해지는 데에 영향을 미쳤지만, 밍스가 재정비에 들어간 2015~2016년에는 이것이 K-팝 걸그룹의 미래가 되리라 보장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드림캐쳐는 이런 발상을 뒤집어 아예 록 마니아, 혹은 일본 서브컬처 향유자라는 좁은 타깃층을 염두에 두었다. 전례가 별로 없기에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은 소셜 미디어나 동영상 플랫폼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K-팝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돋보일 수 있고 실력과 매력으로 해당 사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면 전 세계에 걸쳐 팬들을 모을 수 있는 기회였다. 멤버를 증원하고 그룹의 정체성을 완전히 재정비한 끝에 이들은 2017년, 피보팅(pivoting)과 재데뷔라는 희박한 가능성에 베팅했다.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데뷔 첫 해에 월드 투어가 가능한 팀으로 성장하며 빠르게 국내는 물론 특히 해외에서 팬덤을 모았다. J-록의 영향이 컸던 데뷔 곡 ‘Chase Me’를 시작으로 멜로디를 보다 강조한 ‘YOU AND I’, 2000년대 이모 록의 K-팝식 재연 같았던 ‘Deja Vu’, 데뷔 초 J-록 스타일을 넘어 아예 거친 기타와 드럼으로 한 곡을 가득 채운 ‘Scream’ 등 드림캐쳐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K-팝을 꾸준히 만들어왔고, 일관된 기조 속에서 음악적으로 진보해왔다. 

10월 11일 발표한 ‘Apocalypse: Follow us’는 드림캐쳐의 ‘아포칼립스’ 시리즈 그 두 번째 음반이다. 시리즈를 열었던 ‘Apocalypse: Save us’의 타이틀 곡 ‘MAISON’이 드림캐쳐 데뷔 1,924일(5년 3개월 6일) 만의 첫 음악 방송 1위 곡이 되며 이번 컴백은 더 많은 기대를 모았다. 올여름엔 세계 최대 록 페스티벌 중 하나인 스페인의 프리마베라 사운드에서 단독 무대를 꾸미고 오기도 했다. 주최 측에서 보낸 전세기를 타고 이동했다는 에피소드는 달라진 드림캐쳐의 위상을 말해준다.

 

계단식 성장과 그에 따른 성공을 음악과 콘텐츠에 재투자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이번 컴백 곡은 역대 드림캐쳐 타이틀 곡 중에 가장 모던한 분위기를 들려준다. 밴드 글렌체크의 김준원이 작·편곡으로 참여한 이번 곡은 드럼 파트가 예의 록 드럼에서 벗어나 전자음악으로 방향을 틀었음이 눈에 띈다. 이 곡을 다크 테크노 장르라 소개하는데, 요즘은 주로 사이버펑크 장르 콘텐츠의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각광받는 사운드다. ‘VISION’ 역시 그런 게임이나 영상과 함께 상상할 때 몹시 잘 어울린다. 

사이버펑크는 본래 세기말에 근미래인 2000년대를 상상하며 등장했던 SF의 서브 장르다. 21세기 들어서는 뉴 밀레니엄의 흥분 속에 자취를 감춘 듯했다가, 2010년대에는 레트로 문화가 재림하면서 특유의 어둡고 사이버틱한 이미지만 차용되어 소비되고는 했다. 그리고 원조 사이버펑크 속의 메시지, 예를 들면 감시 당하고 통제 당하는 ‘빅브라더’ 사회, 과학기술의 발전이 던지는 여러 인간 윤리 문제,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 등이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는 위기감 속에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VISION’의 뮤직비디오 미감은 사이버펑크보다는 마블 같은 슈퍼히어로물에 더 가깝지만, ‘아포칼립스’ 시리즈가 다루는 서사는 환경 파괴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다. 흥미로운 점은, 드림캐쳐가 구현하는 이미지는 서양이 동아시아권 대도시를 대상화해온 ‘이국적’ 애스테틱으로서의 사이버펑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인구 과밀 도시나 삭막한 거리 풍경, 신비하고 아름다운 동양 여자 캐릭터, 누구의 욕망에 복무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는(혹은 뻔하게 알 만한) 난잡한 성 윤리 등의 요소는 사이버펑크의 주된 비판점이기도 하다. ‘VISION’의 드림캐쳐는 오히려 군중을 이끄는 선봉장을 자처한다. ‘MAISON’에서 지구를 구해달라고 외치던 화자는 이어지는 다음 곡 ‘VISION’에서 다른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직접 나선다. 시연의 칼날 같은 외침이나 다미의 묵직한 랩 톤이 적절하게 긴장을 조인다. 그동안 보여준 음악의 유기성 덕에 이번 곡의 비장미 역시 설득력을 더한다.

 

그 밖에 적당히 몽롱한 리버브가 매력적인 ‘Fairytale’은 아이유의 ‘에잇’이나 세븐틴의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처럼 가슴 설레는 K-팝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다. 신스 베이스 리프가 쫀득하게 귀를 잡아끄는 ‘Some Love’, 서정적인 피아노 발라드 ‘이 비가 그칠 때면 (Rainy Day)’ 모두 듣기 좋다.

 

드림캐쳐는 일찍이 틀을 깬 아이돌, 기존의 걸그룹 문법에 얽매이지 않은 아이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승승장구하고 있어도 아직까지 거리감을 느끼는 K-팝 리스너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기존에 알던 K-팝보다는 마블 영화나 콘솔 게임을 경험하는 셈치고 들어본다면 어떨까. 특히 이번 타이틀 곡 ‘VISION’은 로킹한 기타 사운드가 유행하는 요즘이라면 누구든 매력적으로 느낄 법한, 드림캐쳐의 입문 곡으로 적당한 노래다. 이 곡부터 발표 곡들을 역주행해보면서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길을 걸어온 멋진 팀, 드림캐쳐를 만나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