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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RCA

영화 ‘킬 빌’의 주인공 베아트릭스 키도(코드 네임 블랙 맘바)는 열렬히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무자비한 복수를 실행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을 죽이려 한 조직의 보스이자 전 연인인 배신자 빌을 마주하고 흘린 눈물 속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애증이 담겼을 것이다. 결국 베아트릭스는 빌을 죽임으로써 피로 얼룩진 사랑과 증오의 여정을 매듭짓는다. 

 

이별을 겪은 싱어송라이터 시자(SZA/*주: 미국 현지에서조차 이름의 발음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스자, 시저, 시자 등등. 그중 아티스트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시자’에 가장 가깝다.) 역시 ‘킬 빌’을 꿈꾼다. 약 5년 만의 새 앨범 ‘SOS’에 수록된 ‘Kill Bill’에서 시자는 전 연인과 그의 여자친구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서슴없이 경고하고 이것이 최선의 생각이 아니란 걸 알지만(“I might, I might kill my ex, not the best idea”), 일방적인 사랑의 단절 앞에 고통받는 그로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다만 그에겐 핫토리 한조의 일본도가 아닌 소울풀한 보컬이 있다.

 

이 아름답고 치명적인 21세기 머더 발라드(Murder Ballad/*주: 살인을 소재로 삼은 사랑 노래)는 ‘SOS’에서의 시자의 심경을 대변한다. 그만큼 ‘복수’는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리벤지 섹스를 고백하는 ‘F2F’에서도, 앨범을 마무리하는 ‘Forgiveless’에서도 끊임없이 복수를 논한다. 물론, 이마저 인정과 방황을 거듭하며 이별이 초래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나 다름없다. 연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쓰고(‘Gone Girl’), 이제라도 남은 모습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는(‘Good Days’) 모습에서도 처연함이 느껴질 뿐이다. 

 

시자는 이처럼 쓸쓸하고 혼란스러운 헤어짐 이후의 감정을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은유적으로 생생히 묘사했다.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탁월한 리리시스트(Lyricist)다. 가사가 ‘고립과 복수의 서사’라면, 프로덕션은 ‘일탈과 시도의 기록’이다. 시자가 가혹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슬픔, 환희, 고통, 극복 사이에서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동안 음악은 R&B, 랩, 팝, 일렉트로닉, 팝펑크(pop-funk)를 넘나든다. 무엇보다 팝이 도드라지는 지점은 리스너를 시험에 들게 한다. 시자는 왜 갑자기 팝을 적극 껴안았을까? 오늘날 R&B/소울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어가는 그였기에 적잖은 이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앨범의 중반부 즈음에 이르면 음악은 블랙뮤직 노선에서 이탈한다. 싱어송라이터 피비 브리저스(Phoebe Bridgers)와의 컬래버레이션 ‘Ghost in the Machine’은 디지털 가공된 하프의 감미로운 선율과 신스의 은은한 잔향 그리고 글리치까지 어우러진 얼터너티브 팝이며, 포크팝처럼 시작하는 ‘F2F’는 후렴구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팝펑크다. 이어지는 ‘Nobody Gets Me’는 당장 내슈빌에서 건져올린 듯한 컨트리 팝이며, 어쿠스틱 기타 스트럼 속에 차임 멜로디가 스며드는 ‘Special’은 몇몇 매체에서도 언급했듯이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명곡 ‘Creep’을 연상하게 한다(‘Creep’의 어쿠스틱 버전 같다!). 

이쯤에서 우린 앞선 질문의 대상과 주제를 바꿔야 한다. 시자에서 우리로, ‘왜 팝을 껴안았을까?’가 아니라 ‘왜 R&B/소울만 할 거라고 여겼을까?’로 말이다. 실제로 시자는 매거진 ‘컨시퀀스(Consequence)’의 지난 12월 커버 스토리에서 R&B 아티스트로 규정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R&B 아티스트라는 고정관념에 너무 지쳤고, 그의 음악을 R&B로만 한정하는 것이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한다(“I’m so tired of being pegged as ‘an’ R&B artist. I feel like that’s super disrespectful.”). 오늘날 아티스트의 인종과 장르 사이의 상관관계는 많이 희미해졌다. 또한 특정 장르로 카테고리화할 수 없는 음악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미래에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시자의 앨범에서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던 장르가 뒤섞이고 동화되는 이 구간은 ‘SOS’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가장 상징적인 순간이라 할 만하다. 그저 다양한 장르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넘어 본인을 옥죄던 세간의 고정관념을 노골적이지만, 우아한 방식으로 부숴버렸다. 물론, 시자는 블랙뮤직을 만드는 것을 (여전히) 사랑한다. 단지 블랙뮤직이 꼭 R&B일 필요가 없을 뿐이다(“I love making Black music, period. Black music doesn’t have to just be R&B.”). 

 

로파이(lo-fi)한 사운드와 칩멍크(Chipmunk/*주: 샘플링한 보컬의 피치를 잔뜩 올려서 나오는 소리 때문에 이름 붙여진 작법) 소울이 결합한 비트 위로 복수에 찬 랩을 뱉은 ‘Smoking on my Ex Pack’, 투박하고 몽환적인 프로덕션, 랩과 노래의 경계를 허문 보컬이 조화를 이룬 ‘Used’,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가져온 고 올 더티 배스터드(Ol' Dirty Bastard/Wu-Tang Clan)의 레어 프리스타일을 얹어 완성한 힙합 소울 ‘Forgiveless’ 등등,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장르도 블랙뮤직이다. 그런가 하면, 다섯 번째 싱글 ‘Kill Bill’에선 팝과 R&B, 두 세계가 절묘하게 통합된다. 어슬렁대는 일렉트릭 베이스, 화자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신시사이저, 레이드-백(laid-back)한 그루브가 뒷받침된 이 곡은 사이키델릭 팝과 R&B의 중간 지대를 가로지른다. 특히 신스와 어우러진 미려한 멜로디 라인이 적잖은 감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킨다. 

시자는 데뷔 EP ‘See.SZA.Run’(2012)을 냈을 때부터 트렌드의 광풍에 올라타 반짝 인기를 얻고 사그라지는 여느 신인들과 달라 보였다. 비슷한 시기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창법과 프로덕션의 R&B로 완성한 앨범을 통해 얼터너티브 R&B의 시대를 열어젖힌 세 명의 아티스트,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미구엘(Miguel), 더 위켄드(The Weeknd)처럼 각광받진 못했지만, 그가 구사하던 음악 역시 신선하고 탁월했다. 이듬해 또 한 장의 셀프 제작 EP ‘S’(2013)를 발매하고, 유력 레이블 탑 독 엔터테인먼트(Top Dawg Entertainment)와 계약한 이후 세 번째 EP ‘Z’(2014)와 정규 데뷔작 ‘Ctrl’(2017)을 발표하며 주류 R&B 씬을 선도하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젠 R&B라는 박스에 갇히길 거부하면서 그의 더 넓은 음악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해주려 한다. 이렇듯 과감한 아티스트의 매혹적인 음악 여정을 동시대에 목도하며 즐길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