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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 Billboard

라틴음악이 세계를 정복했다. 떠오르는 장르, 주목할 음악이라는 표현은 과거형이다.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가 흑인 인구를 추월하던 1990년대에 리키 마틴, 샤키라, 산타나, 제니퍼 로페즈 등이 빌보드 차트를 차례로 정복하며 미국 음악 시장에 라틴의 물결을 퍼뜨리던 시기 이후 새로운 르네상스가 열렸다.

 

2023년의 첫 달을 장식한 음악계 주요 소식만으로도 현재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미국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음악 축제 코첼라 밸리 뮤직 & 아츠 페스티벌의 2023년 라인업부터 살펴보자. 국내에는 블랙핑크의 헤드라이너 소식이 화제였다. 지난해 제이홉이 롤라팔루자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무대를 펼친 데 이어 올해는 블랙핑크가 K-팝 그룹 최초로 미국 주요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게 됐다.

 

동시에 해외는 배드 버니의 성과를 집중 조명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정규 앨범 ‘Un Verano Sin Ti’로 스포티파이 185억 회 이상 스트리밍 성과를 거두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앨범 주인공의 영예를 안았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주 1위, 한 해 4억 3,500만 달러 이상의 투어 수익 등 어마어마한 기록 잔치가 쏟아졌다. 2022년 지구촌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가수였다. 배드 버니는 당당히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스페인어권 아티스트 최초로 미국 주요 페스티벌 헤드라이너 무대를 밟게 됐다.

유튜브는 어떨까. 2023년 현재 유튜브 인기 뮤직비디오 1위 곡에 오른 곡은 2021년 라틴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프로듀서로 노미네이트된 1998년생 아르헨티나 DJ 비사랍과 슈퍼스타 샤키라가 함께한 ‘Bzrp Music Sessions #53’다. 1월 12일 발매 후 1월 30일까지 스포티파이 1억 8,000만 회 이상, 유튜브에서 2억 3,000만 회 이상 조회 수를 기록하며 빌보드 핫 100 차트 10위까지 올랐다.

 

노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노래는 ‘비사랍 뮤직 세션스’ 시리즈의 53번째 곡이다. 비사랍은 2019년부터 다양한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 싱글을 발표해온 이 프로젝트로 유튜브 조회 수 10억 회를 쌓았다. 라틴 팝의 여왕 샤키라는 젊은 프로듀서의 비트 위에서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운 유명 축구선수 제라르 피케를 호되게 공격하며 배드 버니를 제치고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수 1위에 올랐다. 노래에 언급된 브랜드 - 페라리, 르노, 롤렉스, 카시오 - 들은 느닷없는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패션계의 가장 권위 있는 행사인 파리 패션 위크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루이 비통 남성복 컬렉션이 1월 19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렸는데, 2023 F/W 패션쇼 무대를 장식한 아티스트는 스페인의 로살리아였다.

 

2022년 해외 평단의 일치단결 찬사를 획득한 앨범 ‘MOTOMAMI’로 전대미문의 음악을 선보인 로살리아는 제23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 8개 부문 노미네이트, ‘올해의 앨범’ 포함 3개 부문을 거머쥔 현재 최고의 아티스트다. 199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전통음악 플라멩코 칸타오라 훈련을 받은 음악 영재는 팝의 매력에 푹 빠져 라틴 팝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르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변화무쌍한 창작욕을 과시한 로살리아는 노란색 로라이더 위에 올라타 버질 아블로 사후 루이 비통의 첫 패션 위크에서 독보적인 개성을 더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대재앙에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을 뿐, 라틴음악 폭발의 조짐은 2017년 빌보드 핫 100 차트 16주 연속 1위를 거머쥔 루이스 폰시의 ‘Despacito’ 즈음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카밀라 카베요의 히트 곡 ‘Havana’, 제이 발빈과 비욘세의 합작 ‘Mi Gente’가 등장한 시기다. 

 

이때 히스패닉 혈통의 여성 래퍼 니키 미나즈, 카디 비의 활약이 더해지며 라틴음악은 더욱 탄력받았고, 그중 2010년대 중반 트랩 비트 및 힙합 문화를 뎀보 리듬에 결합한 오수나, 파루코, 배드 버니 등의 신예들과 카롤 지, 베키 지, 나티 나타샤 등 차세대 팝스타들이 급속히 주요 뮤지션으로 거듭나며 성장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배드 버니를 필두로 로살리아, 라우 알레한드로, 파울로 론드라, 니키 니콜, 트루에노 등 신예들의 종횡무진 대활약이다.  

 

놀랍게도 이 성공은 시작에 불과하다. 라틴음악은 2018년 기준 6억 4,000명 이상의 라틴아메리카 인구와 전 세계 4억 5,000만 명 이상의 스페인어 화자들을 내수 소비층으로 두고 있다. 이들이 생산하는 스트리밍 횟수와 유튜브 영상 조회 수는 웬만한 팝스타들도 장담할 수 없는 규모다. 기본이 몇천만 회, 히트 곡은 억 단위를 가볍게 넘어간다.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흔히 한국에서 착각하는 것처럼 쾌락만 좇는 댄스 음악이 아니다. 이베리아반도와 카리브해, 아프리카 대륙을 오가는 합작과 셀 수 없이 다양한 하위 장르 발전을 통해 독특한 리듬 제공을 넘어 멜로디와 메시지 모두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 20세기 도미니카공화국의 노동 계급으로부터 발전한 바차타(Bachata), 2010년대 아르헨티나 하층민들로부터 유행한 RKT, 쿰비아 비에라(Cumbia Villera) 등의 장르가 2023년을 장식할 준비를 마쳤다. 로파이 팝과 고전적인 레트로까지 섭렵한 현재 라틴음악은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는 광대한 음악 영토를 자랑한다.

라틴음악은 K-팝과 동지 의식을 갖고 있다. 두 장르 모두 스트리밍 음악 감상과 유튜브, 소셜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급속도로 인지도를 넓혔다. 음악적 요소보다 아티스트의 국적, 다채로운 창작 형식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라는 데서도 공통점이 있다. 방탄소년단, 배드 버니와 같은 슈퍼스타들이 등장했으며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급속히 청취층을 넓힌 점 역시 닮았다. 차이라면 소비 형태다. K-팝이 전 세계 팬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라틴음악은 미국의 히스패닉과 라틴 문화권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는 2010년대 초반부터 K-팝 열풍이 불었던 지역이다.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K-팝 그룹들은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페루 등 주요 국가를 방문하여 수만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펼친 경험이 있다.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슈퍼스타들의 음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된 남미 팬들은 커버 댄스, 챌린지 등 다수의 팬 콘텐츠 제작과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K-팝 글로벌화의 초석을 다졌다. 

반면 한국은 아직 라틴음악이 낯설다. 물론 라틴의 요소를 적용한 K-팝 그룹과 노래는 꾸준히 존재했다. 글로벌 히트 장르로 거듭난 레게톤과 뭄바톤 응용부터 스페인어 표현을 활용하는 등 라틴 시장을 겨냥한 결과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라틴음악의 최근 흐름과 주요 아티스트, 새 시도를 진지하게 관찰하는 이는 드물다. 언어의 장벽이 견고하고, 익숙하지 않은 정서가 발목을 잡는 탓이다. 직설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노랫말과 특유의 리듬은 한국에 익숙한 영미권 팝의 전통과 거리가 멀다. 

 

고무적인 점은 일차원적 수입을 넘어 현지 시장에 직접 진출하고 문화적으로 교류하려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청하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구아이나(Guaynaa)가 피처링한 ‘Demente’에서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렀고, 걸그룹 모모랜드는 지난해 유튜브 구독자 1,200만 명을 돌파한 인기 가수 나티 나타샤와 함께한 ‘Yummy Yummy Love’를 공개하며 멕시코 활동을 펼쳤다. 완성도 측면에서도 진일보했다. 2022년을 장식한 르세라핌의 ‘Antifragile’은 “An ti ti ti ti” 챈트와 매혹적인 휘슬 샘플, 라틴 힙합의 건조한 비트 구성과 아프로팝의 리듬을 성공적으로 융합하며 거침없는 자신감을 투영한 성공작이었다.

 

글로벌 시장 속 라틴음악의 성과는 K-팝에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서구권 팝 음악 공식을 단순히 따르는 단계를 넘어,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제3의 대중음악을 제공하며 대안 문화 역할을 동시 수행하고 있기에 더욱 선의의 경쟁자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K-팝이 정교한 스토리텔링과 강렬한 퍼포먼스, 다각도의 기획으로 즐거움을 안긴다면 라틴음악은 경계 지을 수 없는 자유로운 에너지로 빛난다. 같지만 다른 두 음악 파트너는 바로 지금, 로살리아가 ‘SAOKO’에서 외쳤듯 무한히 “변신(Yo me transformo)”하는 노래로 대중음악의 독특한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전 세계가 라틴에 관심을 두고 또 라틴이 K-팝을 사랑하는 만큼 K-팝도 라틴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