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여름휴가 영화’라는 장르 아닌 장르가 있다. 바캉스가 1년의 1/6인 프랑스의 감독들은 물론이고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르히만도,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도 여름휴가 영화를 만들었다. ‘기쿠지로의 여름’부터 ‘마루 밑 아리에티’까지 숱한 방학 영화를 보유한 일본도 빠질 수 없다. ‘어파이어’는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만든, 자칭 여름휴가 영화다. 페촐트 감독은 대단한 재담꾼인데, 그에 의하면 전작 ‘운디네’(2020)의 프랑스 배급사가 마침 바캉스 영화의 거장 에릭 로메르의 로장주 필름이었고 ‘운디네’를 홍보하러 파리에 간 감독과 배우 파울라 베어에게 로메르 블루레이 박스 세트를 선물했다고 한다. 홍보하는 동안 통역으로부터 코로나19에 감염된 페촐트는 격리 중에 블루레이를 보기 시작했고 “왜 독일만 여름휴가 영화 없어?”라고 반문하며 ‘불’에 관한 신작의 배경을 휴가철로 바꿔 ‘어파이어’를 썼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실제로 예술 작품의 상당수가 오기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예술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펠릭스(랭스턴 위벨)는 펠릭스 어머니 소유의 발틱 해안 숲속 별장으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대형 산불 뉴스가 들려오지만 풍향이 반대라 큰 걱정거리는 아니다. 레온은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데뷔작의 성공에 어울리는 두 번째 소설 ‘클럽 샌드위치’를 탈고하고 펠릭스는 입학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요량이다. 그런데 자동차가 고장 나 간신히 도착한 숲속의 집에는 이미 머물고 있는 여성 나디아(파울라 베어)의 흔적이 있다. 더러운 접시와 나뒹구는 옷가지를 보며 레온은 눈살을 찌푸린다. 두 친구가 숲속 어질러진 집에서 제3의 인물을 추측하는 장면은 프랑스 바캉스 영화보다는 엽기적 독일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연상시킨다. 미국 여름휴가 영화라면 숲속 집을 두드리는 연쇄 살인마가 등장할 차례지만 여기에는 대신 서서히 육박해 오는 산불이 있다. 나디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레온은 탐탁지 않은 표정 아래 숨어 그녀를 엿보고 욕망한다. 하지만 활기차고 솔직한 나디아는 잔인하리만큼 레온과 상극이다.
페촐트 감독의 근작들이 참혹한 서구 역사와 신화적 원형을 융합한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였다면 ‘어파이어’는 삶에서 사랑과 행복을 찾아내는 능력이 결여된 인간의 가련함을 다룬다. 그리고 이 병증을 앓는 이가 하필 예술가일 경우 겪어야만 하는 좌절을 파고든다. 페촐트가 택한 기법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은근한) 반복이다. 예술가 티를 내느라 일행과 줄곧 거리를 두는 레온은 창가와 마당의 같은 자리에서 매일 비슷한 풍경을 ‘구경’하고 소방 헬기의 소음은 잊을 만하면 돌아온다. 불길이 숲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파이어’의 본론을 쓴맛 나는 코미디로 만드는 것은 레온의 성격이다. 이 젊은 예술가는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낮은 동시에 교만하다. 파도와 햇볕에 몸을 맡기고 끼니를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감을 떠올리는 친구들과 달리 레온에게 집필은 방해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다. 아니, 거의 모든 활동이 레온에게는 ‘일’이다. 시장을 보는 일도, 헤엄치기도, 지붕 수리도 모두 노동이면서 글쓰기보다 하찮기에 성가시다. 당연히 그는 주변의 현상에 둔감하다. 옆 사람이 사랑에 빠져도 중병에 걸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머지 세 명의 여유를 위선이라고 여기는 그의 속내는 종종 공격으로 표현되는데, 작가 정체성이 보루인 레온에게 최대 치명타는 유유자적한 세 사람이 알고 보니 죽도록 진지한 자신보다 훌륭한 스토리텔러이고 문학 연구자라는 반전이다.
-
©️ M&M International
그럼에도 미숙한 예술가의 성격 결함에 관한 희극이 ‘어파이어’의 본령은 아니다. 레온의 상태는 작가 일반의 근본 딜레마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고 써야 한다.”를 입에 달고 사는 레온은 집필을 핑계로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는 막상 혼자가 되면 벽에 공이나 던진다. 그는 이를테면 저주받은 구경꾼이다. 그는 진짜 삶을 사는 타인을 구경하는 관찰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 쓰는 자신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네모난 프레임을 씌우지 않으면 세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영화감독처럼, 작가는 사건 밖에 있을 때만 온전히 사태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부류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이 강고한 방어기제에 균열을 내고 레온에게 좋은 소설을 쓰는 능력을 찾아줄 수 있을까? 표면적 계기는 드디어 엄습한 산불이다. 젊은 주인공들은 이상하리만큼 결정적 순간까지 산불에 무심한데 보통의 재난 영화 패턴과 판이한 이 태도는 아마 이들이 환경 위기의 원인 제공 세대가 아니기에 재앙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페촐트 감독은 ‘어파이어’의 화재가 무슨 상징이 아니라 터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산불로 고통받은 유럽의 리얼리티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상징과 현실이 수렴하는 시간 아닐까? 불이야! 하늘에서 내리는 잿가루와 함께 ‘어파이어’의 영화적 톤과 인물, 시간의 속도는 일거에 뒤집힌다. 놀랍게도 이 여름휴가 영화는 청춘의 갑작스럽고 처참한 죽음을 포함한다. 페촐트에게 21세기의 바캉스 영화는 1980~90년대의 선례들과 같을 수 없다. ‘어파이어’는 종말이 가시화된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 예전처럼 사랑하고 상처받고 성장할 수 있는 여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냉철하게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예술가 영화로서 ‘어파이어’는 생각보다 복잡한 우화다. 산불은 레온을 충격해 성장시켰을까? 영화는 문제의 여름휴가가 끝난 후 레온이 편집자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본 모든 일이 사건 이후 레온이 그해 여름을 기억하며 쓴 훌륭한 소설일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으로 붉은 드레스가 아닌, 옷을 입은 나디아와 레온을 재회시켜 사랑의 희망까지 던진다. 그런데 영화를 복기해보면 화재 직후 지인의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레온은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유해를 떠올림으로써 충격을 회피하고 나디아를 실망시켰다. 그러니 레온을 각성시킨 사건은 죽음을 동반한 화재가 아니라 개인적 사랑의 최종적 실패일 수도 있다. 계기가 무엇이든 ‘어파이어’는 이중의 해석을 제안한다. 레온은 상실을 치르고 소설가로서 마침내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희소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차례의 사건이 예술과 예술가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가설을 쉽게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혹시 레온은 자신의 수치스런 모습을 포함한 비극조차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허구화해 ‘클럽 샌드위치’와 유사한 태도의 소설을 쓰고, 그 과정을 다시 소설로 쓰기를 반복하는 무한 루프에 빠진 건 아닐까? 나는 ‘어파이어’를 두 차례 보았고 처음에는 전자가, 두 번째는 후자가 페촐트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받아들였다. ‘어파이어’는 은밀하게 신랄하다.
-
©️ ㈜바른손이앤에이
불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예술가 영화가 9월 극장가에 한 편 더 있으니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이다. 때는 박정희 독재 정권의 시나리오 사전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목조르고 있던 1970년대. 배우 송강호가 연기하는 김열 감독은 데뷔작 ‘불같은 사랑’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후속작들의 평가가 신통치 않아 첫 영화가 그가 조감독 시절 멘토로 모신 신상호 감독으로부터 훔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받고 있다. 신상호 감독은 화재 장면 촬영 중 번진 불을 피하지 않고 계속 카메라를 돌리다 사망했다.
김열은 이중의 두려움에 짓눌린다. 하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 나머지 하나는 타인의 평판이라는 괴물이다. 얼마 전 찍은 신작 ‘거미집’의 결말을 재촬영하면 걸작이 된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김열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흩어진 배우와 스태프들을 다시 소집해 이틀간의 재촬영을 시작한다. 재촬영의 핵심은 두 가지. 서사적으로는 순종하고 희생하는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 욕망의 주체로 변신시키고, 형식적으로는 화재를 포함한 야심만만한 플랑 세캉스(plan-sequence)의 구현이다.
제작자와 스태프, 배우들은 감독의 무리수에 반대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나름의 방식으로 전력투구한다. 감독의 비전을 완벽히 공유하지 못한 상태로 하나씩 완성되는 장면은 의도치 않은 우연과 영화 바깥 현실로부터 침투하는 정념으로 우당탕탕 불균질하다. 애초에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과의 싸움이지만 싸움이 곧 통제를 의미하진 않는다. 특히 집단 예술인 영화가 현장의 우연과 시행착오를 흡수하고 이용하지 못한다면 실패다.
‘거미집’은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소동극이지만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나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프랑스에서도’처럼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곡예적 촬영과 단속 없는 흐름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거미집’의 핵심은 이질적인 주체들이 적대적 환경에서 모여 악보와도 조금 다른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래도 괜찮아.”라고 어깨를 두드리는 영화 공동체를 향한 응원이다. 극중 흑백 영화 ‘거미집’의 인물들은 욕망의 그물에 걸려 먹이가 되지만, 바깥 액자를 이루는 영화 ‘거미집’의 인물들은 각자 다른 것을 얻어 현장을 떠난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플랑 세캉스 장면은 김열 감독의 야심에 비해 형식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정작 대단하지 않다. 조마조마하게 해당 시퀀스를 지켜보고 나서야 우리는 깨닫는다. 김열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재촬영분의 내용이 아니라, 다시 찍는 행위가 불가능할 때 모든 부정적 조건을 거슬러 예술적 의지를 관철시키는 시도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한국 영화사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거미집’에 인용된 김기영, 이만희 감독의 자취를 알아볼 테지만, 무엇보다 ‘거미집’에는 다양한 장르와 플랫폼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다음 호흡을 고르며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는 김지운 감독의 반영이 있다. 일찍이 김지운 감독은 보여주고 싶은 세련된 이미지를 영화 요소에 심어두고 그것을 향해 이야기를 몰고 가는 작가처럼 보였다. ‘장화, 홍련’의 순간적 분노, ‘달콤한 인생’의 엷은 연심, ‘밀정’의 술자리 독대처럼 한 번의 스침이나 사소한 어긋남이 운명을 결정짓는 비장한 스토리도 그의 취향이었다. 하지만 ‘거미집’의 인상은 다르다. 연기 앙상블에서 발현되는 에너지에 영화의 전경(前景)을 내어주며 김지운과 김열의 자아가 그저 전체의 일부(one of them)가 되도록 줌아웃한다. 의미심장하게 원죄와 구원을 상징하는 듯했던 불 또한 결국은 지나가는 이벤트일 뿐이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