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30곡이 조금 넘는 트랙들이 발매되었음에도, 프로미스나인이 현재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는 실속 있는 EP들과 3곡씩 알차게 눌러 담은 싱글들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재밌는 것은 프로미스나인을 대표할 만한 단 하나의 확연한 이미지를 집어내기에, 이른바 ‘학원물’ 콘셉트의 영향이 분명했던 데뷔 초부터 정신없는 충돌의 재미를 특출나게 들려줬던 시기와 디스코 팝, R&B 보컬을 양손에 꽉 쥔 지금까지의 모든 특징들이 괄목할 정도로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홉 멤버들의 목소리로 두터운 화성을 섬세하게 쌓아올려 제작한 멜로디 라인과, 종종 광폭해지는 비트의 드럼으로 특유의 총기를 잃지 않는 비트라는 두 개의 기본 요소들이 각 기간별로 찾아온 새로운 스타일에 알맞게 적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미스나인이 자칫 하면 균형을 놓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흔들림 없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던 것은, 주어진 재료들을 적절히 조합하며 가까운 미래를 풍성하게 보장해놓은 수록곡들과 과거에 준비된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체화해준 타이틀 곡들 덕이기도 하다. 

프로미스나인만의 ‘유명한 투리구슬’인 데뷔 곡 ‘유리구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이 트랙은 여자친구의 초창기 활동에서 착안된 ‘파워청순’, 좀 더 넓게는 한일 양국의 이미지들이 뒤섞였던 2010년대 중반 학원물 코드의 영향권에 속해 있다. 때문에 양식적으로도 ‘애니 오프닝’으로 비유되곤 하는, 극적으로 진행되는 밝은 멜로디 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록적인 리듬 패턴과 장엄한 현악기 등의 편성을 따르는 편이다. 트랙의 후렴구에서 특히나 그러한 특징을 살펴 들을 수가 있는데, 일단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전기기타 소리와 탁월하게 리프를 가져가는 베이스 그리고 강박적일 정도로 꼼꼼하게 박자를 반복하는 드럼으로 이뤄진 록적인 구성이 그 경쾌한 ‘파워’를 담당한다. 하지만 ‘유리구두’의 방점은 이런 인스트루멘탈의 힘 위에 한 목소리로 얹히는 멜로디 라인의 ‘청순’에 찍히는데, 장조에서 단조로 능숙히 흘러내려가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상쾌한 이어웜(한 번 들으면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맴돌곤 하는 구간) 같은 ‘빙글빙글 빙그르르 톡톡’이 한 발짝씩 타박타박 다가오기 때문이다. 당대 인기 코드의 전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차후 발전시킬 특징을 담았던 데뷔 곡 이후에도, 프로미스나인은 보컬의 멜로디 라인과 힘 있는 인스트루멘탈 간의 격차를 주어진 양식에 맞춰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간다. 

 

데뷔 때의 이러한 콘셉트와 멜로디적 진행이 ‘To. Heart’와 ‘To. Day’ 연작에서 연장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유리구두’의 특징을 더 정석에 맞춰 청아하게 조절했던 ‘To Heart’가 리프를 탁탁 끊는 전기기타와 이에 엇박으로 박히는 드럼 비트의 리듬감을 현악기 세션으로 감싸주면서 이를 심화시킨 덕일 테다. 하지만 이 두 EP의 수록곡에는 음색의 당도를 찌릿하게 올려놓은 전자음들로 이뤄진 새콤한 멜로디들이 쏟아져 나오는 트랙들이 이미 한가득이었다. ‘22세기 소녀’처럼 전작의 특징과 균형을 맞춰본 트랙도 있었지만, 더욱 톡 쏘는 맛을 택한 ‘환상속의 그대’와 ‘피노키오’ 등에야말로 ‘FUN!’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가 없는 특색이 이미 탑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회가 음반 단위로 예정되었던 ‘To. Day’의 타이틀 곡 ‘두근두근’은 그런 의미에서 한 트랙 안에 두 개의 시기를 겹치며 다음 시기를 준비하는 트랙이기도 했다. 이전의 타이틀 곡들에서는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편이었던 ‘청순한’ 현악기 소리가 발랄한 신스 음에 파묻혀 나타나고, 화성이 가끔씩 기이하게 ‘빙글빙글’거리는 멜로디가 흥겨운 드럼 앤 베이스 비트와 동행하니 말이다.

이렇게 지난 시기에 언뜻 보였던 장면들이 단절적인 활동 기간을 따라서 컴백할 때마다 더욱 강화되어, 팀의 과거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보게 하는 프로미스나인의 매력은 초기 EP에 담아두었던 맑은 색채를 네온빛 원색으로 키운 2018~19년도의 싱글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FUN!’이 담긴 싱글 전체의 제목인 ‘FUN FACTORY’는 ‘LOVE BOMB’과 함께 핑그르르하거나 짜릿하게 폭발하는 이 시기만의 사운드를 잘 비유해준다. ‘FUN!’에서 알아챌 새도 없이 불현듯 삽입되는 한마디짜리 트랩 구간이나 ‘LOVE BOMB’의 폭탄 타이머 같이 촘촘한 하이햇 소리들이 약간의 변주를 수행했지만, 프로미스나인 표 재미공장의 주요한 생산 공정은 여전히 힘 있는 전자음들을 바탕으로, 짧고 굵은 이어웜과 길고 선연한 후렴 구간 양쪽에서 강조된 멜로디를 끈끈하게 부착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 두 트랙 각각의 코러스 구간은 ‘유리구두’의 두 멜로디적 특징들을 반으로 쪼개 각자 사운드에 맞춰 발전시킨 셈이다. ‘FUN!’의 ‘사르르르’가 ‘빙그르르’에, 또 화성과 음색으로 풍부한 ‘LOVE BOMB’의 단조 멜로디가 ‘유리구두’에서도 유사했던 그것과 얽힐 때 프로미스나인의 역사는 어느 순간 탄탄한 학원물 성향 신예에서 중독적인 고당도 댄스 팝으로 능히 전환된다. 

 

하지만 3곡으로 채워진 이 싱글들에는 그루비한 리듬 패턴을 내세운 ‘DANCING QUEEN’이나 차분하게 반짝이는 신스 음이 돋보이는 ‘물들어’ 그리고 높다랗게 청명한 보컬을 선보이는 ‘FLY HIGH’ 또한 수록되어 있었다. 이는 어쩌면 활동하면서 안정적인 행보를 구축하기 시작한 EP인 ‘My Little Society’부터, 2021년의 인상적인 신스틸러가 된 싱글 ‘9 Way Ticket’을 지나 이번의 뛰어난 신보 ‘Midnight Guest’에서 차차 강화될 성질들의 예고들이었다. 과거에 벗어두고 떠나온 교복과 학원물 콘셉트에서부터 즐거움의 극치를 추구한 시기까지 향하는 동안에는 인스트루멘탈과 멜로디 간의 연계에 변화를 주었다면, 이번 과도기에는 특히 보컬에서 멤버들 각자의 음색에 개성을 더하고 수려한 멜로디와 화성을 부착하는 방식이 빛을 발한다. 느낌표까지 붙였던 ‘재미(FUN)!’에 그러한 ‘비밀 코드(SECRET CODE)를 기입하니, 프로미스나인의 ‘좋은 기분(Feel Good)’이 찾아온다. 

작곡가 이우민(collapsedone)의 주도로 꾸려진 타이틀 곡들인 ‘Feel Good’과 ‘WE GO’, ‘DM’은 2020년대 프로미스나인의 3연타가 되어 영미권 주류 가요와 아이돌 팝에 재차 도래한 디스코 복각 열풍을 가장 스스럼없이 뚫고 가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수록 곡들에서 지금과 그 이후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살짝 과도기적이었던 ‘My Little Society’에는 재즈적인 편성으로 분위기를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것을 통해 유서 깊은 R&B적 구성을 유려하게 풀어낸 ‘Somebody to love’나, 강한 박자감의 비트가 칩튠까지 뿌려진 채 분명히 박히면서도 그 힘을 멜로디 라인으로 풀어버린 보컬과 간결한 하우스풍의 구간이 어색하지 않게 더해진 ‘Weather’가 담겨 있었다. 한편 ‘9 Way Ticket’에는 데뷔 초기 EP들 속 인트로 트랙의 편지들이나 ‘약속회’라고 불렸던 특유의 팬 사인회, 무엇보다 팀명에서도 말장난을 담아 나타났던 ‘프로미스’가 마침내 제목으로 들어가 ‘Promise’가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그간 엿보였던 부드러운 R&B가 전면적으로 활용되면서 이 다음의 모습을 착실히 예비하고 있었다.

 

프로미스나인의 2020년대 발매 곡들 속에서도 특히 R&B적 정취들을 끄집어내보려는 것은 물론 네 번째 EP인 ‘Midnight Guest’가 이들의 커리어 전체를 R&B의 틀로 재확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라진 덕이다. 전례 없이 표현력이 두드러지는 보컬을 중심에 둔 R&B 팝이라는 새 방향성 속에서, 프로미스나인의 기본 공식은 멜로디 라인에서 이어웜적인 요소들은 제거하고, 그 음렬을 청순하기보다는 청초하게 벼르고, 인스트루멘탈의 ‘파워’는 목소리와 격하게 충돌하기보단 여전한 힘을 머금은 채 트랙의 지반으로 들어간다. 목소리들이 단아한 세련미를 담아 오르내리는 ‘Escape Room’은 여전히 강하게 쿵쿵대는 저음과 군데군데 숨겨진 장식음들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던 ‘Weather’와 함께 프로미스나인이 자신들의 ‘파워’를 완전히 낮추지 않고도 현재의 색깔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들려준다. 한편 ‘Hush Hush’는 샘플링된 어쿠스틱 기타 소리를 강조한 디스코와 하우스를 조합해, ‘Love is Around’는 발라드의 서정성을 이용해, ‘0g’은 ‘LOVE RUMPUMPUM’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과거를 지시하는 신스 음 톤을 은근하고 정갈하게 풀어내며, 전체적인 색조가 쨍한 마젠타 색에서 가라앉은 연보랏빛으로 서서히 바뀌어간 EP가 완성된다.

데뷔 당시 각축전을 벌이던 학원물스러운 경향들 속에서도 뛰어난 루키였던 프로미스나인은 어느새 2010년대 후반의 아이돌 팝이 제공할 수 있던 가장 당도 높은 즐거움의 제공자가 되었다가, 2020년대에는 디스코 팝의 물밑 선두이자 출중한 R&B 보컬 그룹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행됐다. 아이돌 그룹들의 경력 속에서 이런 큰 단위의 변화에는 종종 어떠한 ‘변신’의 특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무언가 전혀 달라졌다는, 과거는 전부 잊어버리라는 암시를 넣곤 한다. 물론, 이렇게 급박한 변신을 과하게 강조하면 자칫 분리하려는 과거 자체가 더욱 거세게 돌아오거나, 챙겨둬야 할 중요한 부분들까지 뒤편에 두고 가버릴 수가 있다. 하지만 프로미스나인은 오히려 크나큰 변화에 대한 언급 없이 단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다음으로 진행하기를 감행했고, 그렇다고 그들의 중요한 기초들을 덜어놓지도 않은 채 어색함 없이 새로운 이미지로 찾아왔다. 고생했던 학창 시절을 졸업한 아홉 동료들이 록다운 시기에 온라인 영상 통화로 안부를 나눌 때까지도, 꼿꼿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잔뼈 굵은 적응력과 자연스러운 전환 능력이, 프로미스나인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지켜온 바로 그 약속들이다. 

글.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사진 출처.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