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HYPEN의 첫 앨범 ‘BORDER : DAY ONE’과 새 앨범 ‘BORDER : CARNIVAL’에 담긴 곡들의 뮤직비디오는 배경을 푸른빛 또는 붉은빛으로 물들이곤 한다. 데뷔 앨범 타이틀 곡 ‘Given-Taken’에서 ENHYPEN의 멤버들은 푸르스름한 공간에 있었다. 커플링 곡인 ‘Let Me In(20 CUBE)’에서는 붉은빛이 감도는 숲속에 있던 그들이, 또 다른 세상에서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의 공간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새 앨범 타이틀 곡 ‘Drunk-Dazed’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붉은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ENHYPEN 멤버들이 들어서는 파티장의 조명도, 선우가 분수에 붓는 액체 역시 붉은색이다. 이때 분수 뒤에는 파란색 커튼이 있고, 뮤직비디오는 붉은 액체 속에 있는 선우와 액체가 비처럼 뿌려지는 공간에서 춤추는 성훈을 보여준다. ‘Given-Taken’의 뮤직비디오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정원이 붉은 코피를 흘리는 장면으로 시작했고, ‘Drunk-Dazed’의 뮤직비디오는 후반부로 갈수록 붉은빛이 가득하다. 이는 ‘BORDER : DAY ONE’의 첫 곡, ‘Intro : Walk the Line’의 뮤직비디오에서 푸른빛의 물속과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이미지가 연결된 것을 연상시킨다. 푸른빛으로 시작된 멤버들의 이야기는 경계 너머 붉은빛의 세계로 넘어간다. 

 

‘Given-Taken’에서 ‘내 하얀 송곳니’라는 가사는 ‘Drunk-Dazed’에서 ‘달콤한 이 향기도 붉은빛 송곳니도’로 바뀐다. 송곳니의 색깔이 바뀌는 사이, 뮤직비디오 속 ENHYPEN의 정체성 또한 변한다. ‘Drunk-Dazed’의 첫 장면에서 교복을 입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희승과 제이크 그리고 정원의 모습은 여느 학생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파티장에 들어선 후 제이크는 라이터 없이 손으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정원과 니키는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능력을 발휘한다. ‘Drunk-Dazed’의 뮤직비디오는 교복을 입은 학생, 좀비나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판타지적 존재 또는 그들이 ‘BORDER : DAY ONE’에서부터 차용했던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은 각종 창작물의 설정을 파편적으로 뒤섞는다. 그리고, 교복을 입고 파티장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을 마시면서 도취된 상태에 빠진다. 붉은빛이 뮤직비디오의 이미지를 장악하는 사이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들은 카니발 속에서 춤추며 다른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Drunk-Dazed’에서 색깔의 대비는 곧 정체성의 변화가 되고, 그 변화는 현실을 판타지의 세계로 옮겨 놓는다.

이것은 통과의례다. 현실적인 관점으로 보면 졸업식에 참여한 학생이 그 순간만큼은 재학생도, 졸업생도 아닌 것과도 같다.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10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정해진 질서에서 일탈하고 불온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간이다.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완전한 상태는 곧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하나의 의식이다. ‘Drunk-Dazed’는 그것을 카니발로 정의한다. 유혹과 쾌락이 있고, 동시에 불길한 기운이 있는 카니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ENHYPEN이 카니발의 한가운데에서 노래하는 가사는 ‘난 나를 깨워 심장을 태워 내 꿈을 채워’다. 이는 뮤직비디오에서 붉은 조명의 파티장 사이로 그들이 푸른 필터 속에서 왕자 복장을 한 채 성화 위의 여인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들어간 것과 같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졌고, 쾌락적인 카니발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오히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는 꿈을 꾼다.

 

‘Drunk-Dazed’ 뮤직비디오에는 늑대인간의 그림자를 가진 존재들이 등장한다. 뮤직비디오의 전개에 따르면, 그들은 현재 ENHYPEN의 멤버들과 함께 오디션 프로그램 ‘I-LAND’에 출연했던 케이와 의주일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I-LAND’ 출연 당시 ENHYPEN 멤버들과 데뷔를 놓고 경쟁했다. 평범한 학생 또는 연습생이던 ENHYPEN은 그 과정을 거쳐 뮤직비디오 속 그들처럼 특별한 존재가 됐고, 당시의 경쟁자들은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BORDER : DAY ONE’과 ‘BORDER : CARNIVAL’은 ENHYPEN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판타지의 세계로 풀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ENHYPEN이 ‘I-LAND’를 통해 연습생에서 데뷔가 확정된 아티스트가 되는 과정은 그들의 뮤직비디오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과 겹치고, 뮤직비디오에서 평범한 학생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변하는 과정은 연습생이 화려한 데뷔를 약속받은 아티스트로 변신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들이 모두 쾌락에 빠진 카니발에서 꿈을 키우는 것은 아이돌의 삶에 대한 은유도 아닌 직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K-팝 콘텐츠는 아티스트를 통해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아티스트가 팬들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나 가상의 세계관을 통해 팬이 보다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K-팝 산업의 근본적인 시작점이다. ENHYPEN의 앨범 ‘BORDER’ 시리즈 또한 K-팝 아티스트로서 그들의 현실을 여러 메타포로 표현한 판타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ENHYPEN 멤버들은 ‘I-LAND’에서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처럼 그들의 일상과 경쟁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BORDER’ 시리즈는 그 뒤에 그들이 현실에서 겪었던, 또는 겪고 있는 현실의 통과의례를 판타지를 통해 공개한다. ‘Given-Taken’에서 ‘주어짐과 쟁취함 사이 증명의 기로 위 남겨진 나’라는 가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유명한 대사인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빌려 그들의 데뷔가 주어진 것인지 혹은 쟁취한 것인지 물었다. ‘Let Me In(20 CUBE)’은 동명의 뱀파이어 영화를 떠오르게 하지만, '날 그곳에 허락해줘’라는 가사는 마치 뱀파이어처럼 누군가에게 초대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는 신인 그룹의 상황도 연상시킨다. 그리고 ‘BORDER : CARNIVAL’에서 초대장을 받은 ENHYPEN 멤버들은 ‘별안간(Mixed Up)’에서 SNS 시대에 대중의 시선에 노출된 아이돌의 복잡한 심경을 노래하고, ‘Not For Sale’에서는 ‘이대로 망해버릴 세상’처럼 비관적인 표현을 통해 상업적인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힘을 주는 존재인 ‘너’, 즉 팬으로 해석될 수 있는 누군가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요컨대 'BORDER : DAY ONE’과 ‘BORDER : CARNIVAL’은 ‘I-LAND’를 탈출한 ENHYPEN이 겪는 일들을 계속 전하는 것과 같다. ‘트루먼 쇼’가 끝났어도, 트루먼의 인생은 계속 되는 것처럼. 

 

SNS 시대에 K-팝의 아이돌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에 서 있고는 한다. 영화 속 배역과 달리 그들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유튜브 속의 화면에서, 브이라이브 속에서, SNS의 사진 속에서 팬들의 사랑을 원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현실 같은 판타지인지는 뚜렷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 경계에 있는 무엇일 것이다. 다만 ‘Drunk-Dazed’에서 ENHYPEN은 좀비 또는 뱀파이어처럼 죽음에 가까운 존재를 연상시키듯 직선적인 동작을 취하는 동시에 전력으로 무대 위를 뛰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로 도는 것처럼, ENHYPEN은 ‘Drunk-Dazed’의 퍼포먼스를 위해 후렴구에서 격렬하게 점프하는 순간의 높이까지 똑같이 맞춘다. 그리고 ‘난 나를 깨워 심장을 태워 내 꿈을 채워’라고 노래한다. 또한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 앞뒤로는 팬들과 끊임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만난다. 판타지를 주는 아이돌이 오히려 판타지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보여준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판타지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아이돌의 꿈은 노력을 통해 증명된다. 판타지를 만드는 K-팝 산업의 한가운데에서 아티스트의 현실을 전달하는 의식. 그러나 아이돌이 그 의식을 만들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판타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모호한 K-팝의 한가운데에서, 항상 진정성에 대한 증명을 요구받던 K-팝이 아티스트의 진심 그 자체를 판타지로 만들어버렸다. K-팝의 ‘얼터너티브 판타지’다.


글. 김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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