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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 하이업 엔터테인먼트

평범한 곡은 아니라고 봤다. 검은 바탕에 한쪽 눈에 안대를 쓴 펑크족 곰 인형 앨범 커버, 복슬복슬한 곰 인형 머리띠 바라클라바를 착용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티저 이미지가 묘하게 까칠했다. 제목은 온화한 곰 인형 ‘Teddy Bear’고, 노래는 하이틴 무비에 등장할 법한 밝은 신스 리프를 예고했지만, 마냥 포근한 곡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2022년 EP ‘WE NEED LOVE’와 일본 발매 싱글 ‘POPPY’ 이후 발표한 STAYC의 신곡 ‘Teddy Bear’는 반전의 매력이 있는 곡이다.

 

앨범 소개 글은 이 노래를 ‘순수한 내게 아무 말 없이 곁을 지키며 응원하는 내용’이라 설명한다. ‘나만의 자존감 지킴이’, ‘나만의 히어로’라는 듬직한 별칭은 덤이다. 블랙아이드필승과 FLYT는 통통 튀는 펑크(Funk) 베이스 리프와 활력 가득한 신스 리프, 선명한 멜로디 라인과 재치 있는 변주를 통해 2000년대 하이틴 재질의 알록달록 달콤한 곰 젤리 같은 노래를 완성했다. 

 

얼핏 ‘Teddy Bear’는 어린 시절 항상 내 방 침대 위를 지켜준 곰 인형처럼 든든한 존재에 대해 애정을 전하는 곡처럼 들린다. 그런데 곡의 말투를 찬찬히 뜯어볼수록 그 맛은 새콤함을 넘어 쌉싸름해진다. STAYC의 테디베어는 의지하고 위로받는 물건이 아니다. 끝없이 의심하고 불평하는 투덜이들의 목소리를 봉인해두는 기물이자, 멀리서 함부로 삶을 재단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상징이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속으로만 생각해. 쓸데없는 말은!” 세은이 ‘테디 베어’ 레코딩 비하인드 영상에서 밝힌 것처럼 ‘Teddy Bear’는 꽤 날선 곡이다. “남의 말은 짜릿해 앞뒤로들 Make a fool / 내가 볼 땐 아닌데 자기들만 Act so cool”이라 노래하는 아이사의 도입부부터 세상이 바라는 시선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의 고충이 느껴진다. 윤의 “우린 다 이번 생은 처음이잖아”와 세은의 “정답은 없어 / 그런 기대감 내려놔 실망도 크니까”는 자신감 넘치는 청춘의 선언보다 거듭되는 간섭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로 들린다. STAYC는 듣고 싶지 않은 소통을 차단하는 비행기 모드를 켜두고 내면을 향해 깊이 잠수한다. 상대가 나를 향해 취하는 태도에 대해 “모드를 확실히 해 / 걱정이 아니면 참견”이라 일침을 놓고, 결국 ‘잘하는 건 나’라는 주제 의식을 완성짓는다.

 

흥미로운 점은 ‘Teddy Bear’가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 위해 펼치는 위장술이다. 보컬 디렉팅에서부터 기존 STAYC의 노래 구성과는 사뭇 다르다. 허스키한 톤으로 카리스마 있는 음색을 선보이던 재이의 파트를 줄였고, 그가 줄곧 담당하던 랩 파트의 반 이상을 청량한 시은이 담당하고 있다. 줄곧 후렴부를 담당하던 윤이 브리지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대신 아이사, 시은, 수민이 빈자리를 채우며 강한 어조가 아닌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 통통 튀는 보컬을 들려준다. 그 결과로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냉소적인 주제 의식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활기차고 밝은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런 경량화 작업은 ‘POPPY’에서 예고된 작법으로, 시작부터 강렬한 보컬을 연이어 배치하더니 드롭 파트에서 완전히 발음에 힘을 뺀 “Poppy Poppy”를 반복하는 구성이 독특한 중독을 부른다.

노래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주제 의식을 한층 더 명료하게 보여주는 발랄한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차례다. 멤버들은 카툰네트워크의 인기 애니메이션 ‘파워퍼프걸’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가 되어 살 떨리는 티케팅, 숨 막히는 도서관, 한정판 스낵 구매, 비좁은 시내 버스 등 답답한 일상을 짜릿하게 돌파한다. 곰 인형으로 가득한 방에 둘러앉은 이들이 신비로운 마법 의식을 통해 불평불만과 넘겨 짚기, 편견을 일삼는 이들의 영혼을 가두는 듯한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가만히 자리나 지키고 있거나, 눈 마주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날카로운 경고다.

 

이렇게 완성된 음악은 ‘예쁘고 깜찍하게 다듬어진 셧업(Shut-Up)’이다. 흥미롭게도 이 태도는 2020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STAYC의 커리어를 구성하는 핵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직선적인 일렉트로 팝 위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순간의 판단을 신뢰하며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버리는 게 이들의 매력이다. 데뷔 곡 ‘SO BAD’는 숨가쁜 드럼 앤 베이스 비트 위 당돌하게 “철이 없다고 해도 괜찮아 난 그게 좋아”라며 멈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숨김 없이 고백한 노래였다. ‘ASAP’의 주인공은 바쁜 세상에서 빠르게 사랑을 표현해줄 누군가를 신속하게 찾는 노래다. 서로의 선호와 취향을 묻고 합의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까다롭지만 쿨한 나에게 맞는 누군가가 눈앞에 당장 나타나기를 바란다. ‘색안경’도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당돌하고 엉뚱하지만, 사실 불안한 점도 있는 나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다. 섣불리 감정을 투영하고 고정관념을 들이미는 일련의 행동을 정중히 거절한다. ‘RUN2U’는 선을 넘어도, 다쳐도, 잘못돼도 탓하지 않을 테니 내가 결정한 사랑에 토 달지 말라는 무서울 정도의 확신이 있었다. 미니 앨범 ‘YOUNG-LUV.COM’과 싱글 ‘WE NEED LOVE’는 이 사랑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 작품이었다.

최근 K-팝 걸그룹은 강하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자아가 곡을 이끌고, 자유롭고 반항적인 철학으로 무장한 이들이 꺾이지 않는 의지를 우뚝 세운다. 사랑을 노래할 때도 단순한 감정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한 사랑의 여러 면모를 독특한 비유와 주체적인 태도로 옮긴 가사가 사랑받는다. 

 

그중에서도 STAYC의 세계는 독특하다. 명랑한 무대와 천진난만한 가창으로 설계한 젊음(Young)의 공터에 저돌적인 확신과 아무런 기대하지 말라는 무심한 태도의 공존 지대를 조성하여 격렬한 놀이기구로 가득한 환상의 테마파크를 건설했다. 블랙아이드필승의 영리한 작법과 STAYC 멤버들의 매력적인 콘셉트 소화 능력 덕이다. 정신없이 놀다가 뜨끔해지는 순간이 있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