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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강명석,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쏘스뮤직

기대와 배반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음악은 기대와 배반의 예술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함이 우리의 기대에 꼭 맞을 때도 있고, 유행 공식을 따르지 않고 듣는 이의 기대를 배반해서 신선함을 안겨줄 때도 있다. K-팝은 이를 좀 더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K-팝의 세상에서 더 큰 자극은 곧 더 큰 임팩트이며, 과잉은 곧 미덕이다.

 

최근 몇 년간은 과잉조차도 K-팝의 문법이 되어 여기에 반전을 주려는 시도들이 눈에 띄었다. 노래의 초반에 일반적인 EDM 팝처럼 거창하게 빌드업을 했다가 후렴에 별안간 베이스와 드럼을 제외한 악기들을 확 빼서 에너지 레벨을 훅 하고 떨어뜨리는 작법이 그것이다. 이런 경향은 최근 해외 K-팝 팬들을 중심으로 ‘안티드롭(Anti-drop: 찰리 푸스의 2017년 작 ‘Attention’의 메이킹 영상에서 따온 표현이다.)’이라고도 불린다. 마냥 고양되지 않는 데서 오는 세련된 인상 때문인지, ‘안티드롭’은 신인급 아티스트보다는 연차가 어느 정도 있는 가수들이 고혹적인 절제미를 뽐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한참 전 2015년엔 f(x)의 ‘4Walls’가 그랬고, 최근엔 청하의 ‘Stay Tonight’이나 우주소녀 블랙의 ‘Easy’가 이런 전개를 선보였다. 실은 최근으로 올수록 이런 곡들이 많아져서 일일이 꼽을 수 없다. 통상적인 기대를 배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법이 유행을 타며 또 하나의 문법이 된 상황.

 

르세라핌의 데뷔 앨범명이자 데뷔 EP 타이틀 곡 ‘FEARLESS’는 아예 곡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안티드롭’ 같다. (아마도 곧 올라갈) 차트 속 댄스팝 중에 혼자서만 에너지가 절제돼 있다. 곡 속에 대비감을 의도한 ‘안티드롭’이 있을지언정 그 코러스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과잉 상태인 풀 블로운 K-팝 차트 속에서, ‘FEARLESS’는 홀로 도도히 의연하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이 ‘안티드롭’을 위한 빌드업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야심으로 뭉친 가사 역시 통념적인 신인 걸 그룹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노래의 텍스트와 사운드 모두, 오만하게까지 비칠지 모를, 높은 긍지를 담았다. 

 

단호하고 심플한 구성이다. 곡의 주 악기와 가사의 분위기를 소개하는 인트로와 첫 벌스에서 들리는 것은 베이스, 드럼 그리고 웃음기 없는 멤버들의 목소리뿐이다. 키 체인지도 한 번 없고, 멜로디는 검은 건반 없는 A 마이너의 다이어토닉 음계만으로 이루어졌다. 곡의 유일하게 고조되는 부분은 프리코러스다. ‘워어어어’ 하는 선창 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보컬 코러스 화성과 드라마틱하게 들어오는 울림통의 드럼 탐탐 소리, 따라오는 김채원과 사쿠라의 타이트하게 던지는 듯한 목소리가 긴장감을 쌓는다. 이어지는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 겁이 난 없지 없지”라는 두 줄은 노래의 정가운데에 위치한 주제문이다. 그리고 이 뒤에 다시 처음처럼 베이스, 드럼, 웃음기 없는 보컬로만 이루어진 코러스가 이어진다. ‘안티드롭’이면서, 동시에 노래 자체가 극도로 절제돼 있어서 완연한 대비감보다는 주제의 반복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코러스의 후반에 살짝 얹히는 와우 기타 소리 정도만이 베리에이션이다. ‘FEARLESS’를 비롯해 EP의 전곡을 작업한 프로듀싱팀 13은 미디키보드뿐 아니라 자력으로 기타, 베이스, 드럼 연주가 가능한 팀이다. 이제는 가상 악기로 못 내는 소리가 없다지만, 직접 연주된 악기가 주는 미묘한 팀버 차이가 이 새로운 K-팝 댄스 곡에 맛을 더한다. 르세라핌엔 김채원과 사쿠라라는 이미 아이즈원으로 데뷔해 큰 성공을 거둔 멤버들이 있기도 하다. 이들은 이미 대중 앞에 선 적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선정보를 뒤집을 반전도 필요했을 것이다. 아이즈원의 음악에는 가볍고 화사하면서 또 속도감 있는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그때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줄이고 줄여 정수만 남긴 미니멀한 곡이라는 점도 기대의 배반이다.

 

‘Blue Flame’은 ‘FEARLESS’와 같은 디스코 악기 편성으로 보다 밝고 달콤한 무드를 구사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4번 트랙 ‘The Great Mermaid’는 거칠고 두꺼운 신스가 시원한 멜로디를 반짝이는 시퀸 소재 재킷처럼 감싸는, 온도감과 질감이 특히 매력적인 곡이다. 참여진에 여성 작사팀 당케(danke)의 이름이 눈에 띄는 R&B 트랙 ‘Sour Grapes’는 이솝 우화를 모티브로 했지만 전달하는 공감각이 꽤나 찐득하다. 스타카토 플럭으로 조심조심 진행되는 가벼운 텍스처가 ‘Build A B*tch’ 같은 곡처럼 틱톡에서 사랑받을 것 같은 예감이다.

 

음악은 기대와 배반의 예술이다. 르세라핌은 어떤 기대 속에 등장했고, 어떻게 배반하는가. 이 신인 걸 그룹이 되도록 많은 기대를 배반해주었으면 한다.

내 목소리의 힘


강명석: 르세라핌의 데뷔 앨범 ‘FEARLESS’의 첫 곡 ‘The World Is My Oyster’ 가사 첫 세 문장의 주어는 르세라핌 멤버들이 실제 사용하는 언어들로 발음한 ‘The world / 世界 / 세상’이다. 반면 후반부에는 ‘나는 / I / 私は’가 주어이자 한 문장이다. 주어가 ‘세상’에서 ‘나’로 변하게 만드는 주문은 “I’m fearless”다. “나를 평가”하고 “나를 바꾸려”하는 세상에 ‘나는’을 주어로 말할 수 있는 힘. 두 번째 곡 ‘FEARLESS’가 ‘나’가 주어인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제일 높은 곳에 난 닿길 원해”. 세상이 나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든, 이미 “겁이 난 없지”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세상에 원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세상은 ‘나’의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을 “흉짐”이라 공격할 수도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FEARLESS’의 첫 번째 후렴구는 ‘you’가 주어인 “What you lookin’ at”으로 시작해 “I’m fearless”로 끝난다. 타인이 규정한 나에 대한 시선을 “I’m fearless”로 이겨내는 과정 그 자체가 ’FEARLESS’의 하이라이트다.

 

‘나’의 목소리는 이 과정을 이끌어내는 핵심이다. ‘FEARLESS’는 “Bam ba ba ba ba bam”처럼 멤버들의 목소리로 행진하는 것 같은 분위기의 훅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고, 멤버들의 목소리가 등장할 때마다 조금씩 편곡이 바뀐다. 베이스와 드럼으로 구성된 미니멀한 리듬으로 시작하는 이 편곡은 멤버의 파트가 바뀔 때마다 드럼의 여러 파트가 하나씩 추가되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변화한다. 후렴구에 잠시 등장하는 일렉트릭 기타를 제외하면 쉽게 들을 수 있을 만큼 앞으로 나서는 사운드도 없다. 대신 최대한 비워진 공간 안에서 멤버들의 목소리가 곡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파트 사이의 목소리가 극단적으로 변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후렴구 바로 앞, “밟아줘 highway / 멋진 결말에 닿게 /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 겁이 난 없지 없지”가 곡에서 가장 힘찬 목소리로 곡을 클라이막스로 안내하지만, 오히려 “What you lookin’ at”에서 냉소적으로 느껴질 만큼 낮고 건조하게 변한다. 여기에는 클라이막스에서 흔히 기대하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대신 클라이막스를 예고한 순간, 예상을 깨고 곡에서 가장 나직한 목소리가, 단 한 명의 목소리로 등장하며 주는 임팩트와 반복적인 리듬으로 “What you lookin’ at”을 귀와 입에서 맴돌게 하는 중독성이 자리 잡는다. 이 순간이야말로 “I’m fearless”가 완성된다. 리듬을 반복하며 그들을 “lookin’ at” 하다 보면 어느새 그들이 “I’m fearless”라고 말하는 순간에 도달한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반복적인 노랫말로 만들어 ‘세상’이 입으로 따라 부르고 클럽에서 몸을 흔들게 될 댄스 곡으로 되돌려준다. ‘FEARLESS’는 ‘I’,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는 형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you’, 대중이 어디서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상업적인 곡을 재구성한다. ‘FEARLESS’의 마지막 후렴구가 등장하기 전, 브리지의 “더는 없어 패배 / 준비된 내 payback / Bring it 당장 내게”의 목소리는 냉소적인 분위기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에는 행진가와도 같은 훅이 코러스로 붙으면서 그들이 마치 승전을 거두기 직전의 순간처럼 한껏 고양된 감정까지 전달한다.

 

앨범으로서 ‘FEARLESS’의 전체 가사는 김채원과 사쿠라를 비롯한 르세라핌 멤버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수록 곡 ‘Blue Flame’의 가사 중 일부는 김채원과 허윤진이 작사하기도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과 평가를 뚫고 원하는 것을 향해 가겠다는 ‘FEARLESS’의 메시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김채원과 사쿠라의 경험을 통해 성립 가능하다. “What you lookin’ at”은 사쿠라가 처음으로 부를 때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뚜렷해진다. 그에 이은 “You should get away”는 긴 머리를 자른 김채원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로 정면을 바라보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때 이 가사를 노래하는 르세라핌이 가진 태도가 보다 분명해진다. 그 점에서 르세라핌은 멤버의 이야기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의 세계로 확장된다. 이미 세상이 알고 있는 걸 그룹 출신 멤버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메시지가 나오고, 메시지가 노래하는 방식을, 노래하는 목소리의 분위기가 앨범과 관련된 콘텐츠 전체의 톤과 연결된다. 

 

이 과정은 제작진의 의도와 별개로 ‘FEARLESS TRAILER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마지막에 영상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구성을 연상시킨다. 이때 영상 속의 김채원은 시작에서의 김채원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김채원은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며 ‘Fearless’를 내면에 장착한 상태다. 현실의 김채원과 사쿠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시 데뷔를 시작했지만 그들은 단지 데뷔하는 신인이 아니고, 그들이 보여줄 것들은 예상과도 다르다. 티저 사진 ‘BLUE CHYPRE’에서 물 속에 있는 멤버들은 앨범 수록 곡 ‘The Great Mermaid’의 테마인 인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곡의 인어들은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처럼 목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는 물론 어떤 것도 잃기 싫다며 “I don’t give a shit!”을 외치는 ‘The Great’ 인어다. 이제 데뷔한 걸 그룹이면서도 단지 데뷔하는 걸 그룹만은 아닌 이 팀은 걸 그룹에게 또는 K-팝에서 익숙해 보이는 요소들을 멤버들을 통해 재구성하여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멜로디 중심에 상큼한 사운드가 얹어진 ‘Sour Grapes’에서마저도 사랑의 ‘눈물나게 시큼한 맛’을 걱정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미묘하게 냉소적인 분위기를 얹는다. 다시 말하면, 영국 작가 메리 셸리의 “Beware; for I am fearless, and therefore powerful.”(조심하세요. 나는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강력합니다.)에서 중요한 것은 ‘Fearless’뿐만이 아니다. ‘Fearless’가 ‘나 / I / 私’의 의지 또는 태도가 돼야 ‘세상 / The world / 世界’에 힘을 가질 수 있다. 두려움 없는 내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순간, 이야기는 다시 쓰여진다. 

아이들이 질주한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아이들이 질주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복잡하게 고민하기 전, 우선 달리고 보는 걸 택한 아이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 나간다. 웃음과 눈물을 허공 속에 흩뿌리면서, 아이들은 그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린다. 썩 무모해 보이는 이 질주는 그러나 나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사정은 조금씩 달라도, 이들을 쫓는 건 불확실한 미래와 잘 알지도 못하는 불편한 기대가 대립하며 만들어낸 균열이다. 쩍쩍 갈라지며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열을 피해 아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르세라핌도 질주한다. 이들도 젊음이니 당연하겠지 싶다가 한창 달리는 얼굴 쪽으로 카메라 줌을 가까이 당겨본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강력하고 묵직한 테크노 비트 사이로 잠언 같은 문장을 쏟아내는 멤버들의 입술에 눈이 간다. “세상은 불완전해(The world is imperfect)”, “이 세상에 만족할 수 없어(この世界に満足できない)”, “세상은 나를 평가해”. 영원히 깨지 않는 악몽처럼 달라붙는 세상의 소음을 가르며 이들은 계속 읊조린다. “나는 강해지고 싶어(私は強くなりたい)”, “나는 도전하고 싶어(I want to take up the challenge)” 그리고 “세상을 손에 넣고 싶어(世界を手に入れたい)”. 데뷔 앨범 ‘FEARLESS’의 인트로 ‘The World Is My Oyster’는 르세라핌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첫 트랙인 동시에 이 그룹이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여정을 시작했는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곡이다. ‘두려움 없는’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Fearless’로 재조합한 그룹명만큼 명확한 이 인식표는 허윤진의 “세상은 나의 것(The world is my oyster)”이라는 단호한 정의로 끝을 맺는다. 이어지는 타이틀 곡 ‘FEARLESS’는 인트로가 제시한 강렬한 테마를 얼터너티브한 사운드로 받는다. 큰 붓으로 거칠게 그린 듯 전개 내내 굵직한 포물선을 그리는 비트는 캐치한 멜로디나 카메라를 향한 서툰 시선 대신 노래를 듣고 느끼는 이들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달려가는 데 2분 47초를 고스란히 바친다. 한 점에 고정된 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인트로에서 제시한 문장 카드들이 단순한 말뿐만이 아님을 마디마다 새긴다. “내 혈관 속에 날뛰는 new wave / 멋진 결말에 닿게 /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 겁이 난 없지”(‘FEARLESS’)
 
이들이 이토록 공격적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번도 쉽지 않은 데뷔를 두 번 이상 겪은 이가 멤버의 절반이라는 점, 그만큼 기대하는 눈이 많다는 점, 여기에 일명 ‘4세대’로 불리는 K-팝 여성 그룹들이 공유하는 해방과 독립의 서사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이후 이어지는 펑키(Funky)한 베이스라인이 돋보이는 디스코풍의 ‘Blue Flame’, 다크한 무드가 매력적인 신스 팝 ‘The Great Mermaid’, 부드럽고 친숙한 팝 트랙 ‘Sour Grapes’까지 들으며 이들의 달리기가 생각보다는 유연하지 않을까 넌지시 추측해보기도 한다. 보인 패가 많아 쉽지만은 않아 보이는 새로운 길 위에, 분명한 목표를 앞세운 거침없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뒤따라오는 불길한 소음은 여전하지만 남은 에너지도 아직 한참이다. 아이들이 질주한다. 르세라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