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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리은, 강명석,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의 진심


김리은: 프로미스나인의 미니 5집 ‘from our Memento Box’는 제목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찰나들에 대한 이야기다. 앨범의 첫 곡 ‘Up And’는 조개껍데기를 던지는 가벼운 놀이의 순간을 ‘운명'으로 표현하고, ‘Cheese’는 찰나의 순간들을 모두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담는다. 타이틀 곡 ‘Stay This Way’는 “조그만 해변, 너하고 나”, “우린 뜨겁고 눈부셔”와 같은 가사로 여름을 묘사하면서, 그 바닷가에서 함께하는 소중한 누군가에게 곁에 머물러달라고 노래한다. 여름의 찬란함은 언젠가는 흩어질 순간들일지라도, 그 순간들이 준 애틋함은 오래도록 남는다.

 

‘Up And’는 도입부부터 경쾌한 라틴 리듬을 들려주고, ‘Stay This Way’는 경쾌한 댄스 팝의 사운드로 여름밤의 청량함을 전달한다. 멤버들의 목소리 또한 ‘Up And’에서 라틴 리듬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Stay This Way’는 노지선이 리듬따라 마치 굴러가듯 “또 몰래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려놓을 땐 흰 모래알이 느껴져”를 부르는 것처럼 신나고 경쾌하게 여름의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Up And’는 “하늘 가로질러 운명은 정해졌어”, “이번 우리 여름날을 너에게 걸어” 같은 가사들로 여름의 기억에 운명이라는 무게를 더하고, 코러스 파트에서 기교를 덜어내고 가사를 담담하게 전달하는 멤버들의 보컬은 역동적인 리듬 속에서도 서정성을 남긴다. ‘Stay This Way’에서도 멤버들의 보컬은 후렴구인 “Stay this way”를 정직하게 끊어서 전달하고, 어구를 반복하는 사이에 들어가는 “더 흠뻑 빠져” 같은 가사를 점점 더 음정을 높여 가며 있는 힘껏 부른다. 그 결과, 여름의 활기에 어울리는 팝이 주는 기운과 더불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이라는 가사가 대변하는 절실한, 찬란한 슬픔이라도 해도 좋을 복합적인 감정이 남는다. 

 

프로미스나인은 데뷔 곡 ‘To Heart’에서 교복을 입고 수줍은 소녀의 순정을 노래했다. 그로부터 4년 뒤, 프로미스나인은 앨범 발표 전 공개된 콘셉트 필름 ‘[from our Memento Box] ‘Dream. Ver.’’에서 직장에서 벗어나 해변에서 활짝 웃는 성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사이 그들은 ‘두근두근(DKDK)’에서 학교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일상성을 보여줬고, ‘LOVE BOMB’과 ‘FUN!’에서 팝 트렌드를 반영하며 충동적인 사랑이나 순간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미스나인은 펑키한 기타와 베이스를 중심으로 한 ‘Feel Good (SECRET CODE)’과 ‘WE GO’처럼 팝적인 요소를 타이틀 곡에 반영하고, 팀의 막내인 백지헌이 성인이 된 후 발표한 ‘DM’에서는 상대방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건넬 만큼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줬다. 데뷔 당시 중학생이던 백지헌이 성인이 된 것처럼, 프로미스나인이 앨범 속에서 보여준 자연스러운 성장은 곡과 보컬에 점점 더 팝적인 또는 성인 취향의 요소를 반영하는 것과 함께한다. 그러나 ‘Stay This Way’라는 제목 그대로, 무언가는 변하지 않는다. ‘from our Memento Box’는 그렇게 프로미스나인에게 일어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을 함께 보여주는 집약체다. 요컨대, ‘from our Memento Box’에서 프로미스나인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팝 보컬과 아이돌 보컬의 교차점에 있다.

 

‘from our Memento Box’의 수록 곡 ‘Blind Letter’에서 진한 음색으로 R&B 특유의 그루브를 품은 인트로를 소화하거나, 하우스 장르를 기반으로 한 ‘Rewind’에서 성숙한 보컬을 보여주는 것은 프로미스나인이 앨범 속 세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성장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반면 이런 변화 속에서도 그들은 뮤직비디오에서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에게 환하게 웃으며 진실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원한다. “날 바라보며 Stay this way”라고. 한여름의 태양은 영원할 수 없고, 소녀들은 결국 자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프로미스나인은 팝에 보다 가까워진 음악과 목소리로 건강하게 성장한 여성들의 활기찬 에너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들은 노래를 통해 여전히 성장하는 아이돌로서의 절실함을 담는다. 언젠가 찰나의 기억들을 기념품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해도 변하지 않을 어떤 진심에 대한 믿음을. 아이돌에게 ‘성장’과 ‘성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춤을 추고 있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강명석: 새 앨범 ‘from our Memento Box’의 타이틀 곡 ‘Stay This Way’에서 프로미스나인의 퍼포먼스는 매우 복잡한 동선과 대형을 보여준다. 곡 시작 후 불과 20초 사이 좌우로 길게 앉아 있던 멤버들은 두 줄로 나눠 사선으로 걷고, 그중 한 줄은 가운데로 뭉쳐 춤을 추다 이내 뒤에 있던 멤버들이 합류해 다시 가로로 긴 줄을 만들어낸다. 멤버들이 곡의 첫 안무인 뺨에 손을 대는 작은 동작마저 ‘칼군무’를 하는 이유다. “Disco (Disco) Let’s go (Let’s go) 다른 모든 건 지워”를 부를 때 나경, 채영, 지헌, 서연은 몸을 살짝 떨거나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동작까지 똑같이 맞춘다. 그래야 곧바로 그들과 합류하는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하는 손동작 위주의 군무에서 일체감을 보여줄 수 있다. 마치 매스게임처럼, ‘Stay This Way’의 안무는 멤버들이 각자의 동작을 정해진 박자에 정확하게 소화해야 하나의 큰 그림이 나온다. 새롬이 “지금 내 기분은 Higher Take me Higher”를 부를 때 멤버들이 양쪽으로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왔다 돌아 들어갈 때처럼, 모든 멤버들이 걸을 때의 박자까지 맞춰야 동작, 동선, 대형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춤을 추고 있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Stay This Way’의 한 구절은 프로미스나인의 퍼포먼스를 통해 완전한 의미를 갖는다. ‘Stay This Way’ 후반부에 멤버들은 지원을 중심으로 모여 “Stay this way”의 “way”를 강하게 발음하는 순간 앉아서 다리를 힘차게 쭉 뻗으며 마치 꽃이 활짝 피는 듯한 그림을 보여준다. 퍼포먼스가 곡에 담긴 음절 하나, 짧은 리듬 변화까지 모두 시각화시키면서 청량한 여름날의 분위기로 시작해 후반에는 고음의 애드리브와 빠르고 힘찬 코러스로 벅찬 감정에 이르는 ‘Stay This Way’의 정서적 분위기를 무대 위에 옮긴다. ‘Stay This Way’는 “우린 뜨겁고 눈부셔”라며 여름날의 행복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무대 위에서 구현하려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연습실에서 안무를 반복해 맞춰야 한다. 이 곡의 가사처럼 누군가에게 “우리 떠날래?”라고 묻는 것은 단지 즐거운 제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던지는 제안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청량한 기운 속에 있는 뜨거운 마음을, 프로미스나인은 퍼포먼스를 통해 그들의 마음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약속은 이루어졌다. 데뷔 곡 ‘To Heart’에서 교복을 입고 크고 직선적인 동작을 맞추던 이 팀은 4년 사이 여행을 떠나는 20대 여성의 콘셉트를 소화하고, ‘from our Memento Box’의 수록 곡 ‘Rewind’처럼 이른바 ‘걸 크러시’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보다 크고, 화려하고, 터프한 동작이 많은 퍼포먼스를 손짓 하나까지 맞출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사이 지난 앨범 ‘Midnight Guest’의 판매량은 전작 대비 3배 가까이 올라 10만 장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 앨범에서 여름날의 행복에 담은 진실한 마음을 팀 단위 연습량이 많지 못하면 소화할 수 없는 퍼포먼스로 구현한다. 그래서 ’from our Memento Box’는 프로미스나인의 첫 번째 정점이자 지금까지 최고의 앨범이다. 이 팀의 역사에서 모든 것이 가장 좋게 모였을 때, 그들은 성장하는 아이돌이 되겠다던 팬덤 플로버와의 약속을 지켰다. 프로미스나인이 데뷔 곡부터 해왔던 것과 목표로 삼았던 것들이 그것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때 가장 어울리는 방법으로 완성했다. 진정한 여름의 앨범이자 노래라는 의미다. 앞날에 무엇이 펼쳐지든,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행복할 수 있으니.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은 마음으로.

K-팝의 순수한 기쁨을 찾아서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K-팝 태초에 음악이 있었다. 이런 하나 마나 한 말로 글을 시작하나 할지도 모르지만, 작금의 K-팝을 듣고 보고 즐기다 보면 이 사실을 끊임없이 되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적잖이 든다. 2022년의 K-팝은 누가 뭐래도 멀티유니버스다. 하나의 노래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주를 공유한다. 콘셉트, 이미지, 서사, 세계관 등으로 구성된 소우주는 그러나,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저 각자의 욕망을 따라 만났다 부딪혔다 이내 흩어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K-팝의 고대 원소 격인 음악도 그 안에 당연히 존재한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이들을 굳이 소환해야 할 것만 같은 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 볼품없어진 자신의 자리를 측은하게 응시하는 K-팝 속 음악의 불안한 동공을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시대가 그렇게 변했으니 어쩔 수 없다 위로하기엔 이르다. 아직 K-팝 속 음악의 선전을 바라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곡’을 찾아 다양한 K-팝 가수들의 앨범을 ‘디깅’하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고, 퍼포먼스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리 잘리고 저리 접붙여진 노래들에 슬슬 지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 세를 과시한다. 무엇보다 음악은 아직도, 다채로운 응원봉이 내는 빛들을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대와 장르를 막론한 K-팝 축제나 디제잉 파티에 모인 이들이 목 놓아 같은 후렴구를 외치게 만드는 건 단연코 노래, 즉 3분여의 시간 속 완결된 음악이 가진 힘이다.

 

그룹 프로미스나인 그리고 이들의 다섯 번째 앨범 ‘from our Memento Box’는, 그렇게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낸 K-팝이 주는 가장 순수한 기쁨과 힘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누가 들어도 ‘좋다’는 감탄사를 나오게 만드는 ‘노래’다. 타이틀 곡 ‘Stay This Way’는 2020년 1년 3개월 만에 발표했던 신곡 ‘Feel Good (SECRET CODE)’ 이후 ‘WE GO’, ‘DM’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펑키(Funky)한 리듬을 기반으로 한 활력 넘치는 프로미스나인 표 댄스 팝이다. 가슴을 두근대게 만드는 사람과 즉흥적으로 떠나는 바다 여행, 뜨겁게 이글대는 한여름 태양과 밤하늘을 가득 채운 만월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 안는 낭만적인 파도 소리까지. 1990년대에서 2020년대를 아우르는 가요계 어디에 놓아도 자연스러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의 테마로 경쾌하게 달려 나간다. 그렇게 시원스런 바람은 앨범 곳곳에 분다. 산들대는 보컬 어레인지가 아기 고양이의 하품처럼 사랑스러운 ‘Up And’, 신시사이저, 드럼, 베이스가 차례로 쌓아 올리는 리듬이 정성스러운 ‘Cheese’, 도입부를 담당한 멤버 서연의 매혹적인 내레이션이 분위기를 환기하는 시크한 팝 넘버 ‘Rewind’까지 이들의 목적은 더없이 분명하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조금도 뒤틀리지 않은 진심. 꿈결처럼 퍼져나가는 프리코러스가 매력적인 유일한 다운 템포 넘버 ‘Blind Letter’까지 듣고 나면, 각종 야망에 사로잡혀 복잡하게 얽힌 세상만사가 그저 피곤해질 따름이다. 탁 트인 어딘가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그런 노래들이다. K-팝, 나아가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확실한 즐거움이다. 담백한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