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ENHYPEN이 온다

강명석:
ENHYPEN을 알기 위해 그들의 데뷔 과정을 보여준 ‘I-LAND’나 뱀파이어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세계관이 담긴 영상들을 미리 볼 필요까지는 없다. 앨범 ‘BORDER : DAY ONE’의 타이틀 곡 ‘Given-Taken’의 퍼포먼스를 보면 경계 너머 그들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좁게 모여 있던 멤버들이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펼쳐지는 도입부를 시작으로, 일곱 명의 멤버들은 마치 가사를 대본처럼, 퍼포먼스를 통해 연기한다. 곡의 첫 가사인 ‘Wake up in day one’에서 희승이 ‘Day one’을 뜻하는 손가락 한 개를 펼치고, 가사가 ‘그 빛은 날 불태웠지’로 연결될 때 제이가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비틀거린다. 제이크가 ‘저 하늘을 우린 기다려왔을 때’를 부를 때 뛰어가며 하늘을 가리키는 동안, 파트를 맡지 않은 멤버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만들어준다. 멤버들의 파트는 그들이 주인공으로서 연기하는 순간이고, 나머지 멤버들은 배경을 만든다. 멤버들의 몸으로 이야기와 미장센을 모두 표현하는 무용극 ‘가는 선 너머의 날 부르는 너’에서 여섯 명의 멤버들은 몸으로 경계선과 같은 배경을 만들며 남은 멤버를 지나간다. 이어 ‘널 부르는 나’가 나오는 순간, 배경이던 멤버들은 연기자 역할을 하던 멤버에게 모여 손을 대 그를 일으켜 세운다. 연기자와 배경으로 나뉜 퍼포머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뒤에 오는 것은 연기, 배경, 무용의 경계를 무너뜨린 연출에 카타르시스를 더하는 멤버 전원의 군무다.

후렴구의 하이라이트에서, 멤버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마치 야수가 어슬렁거리듯 느리게 걷는 동작을 보여준다. 다시 같은 멜로디가 반복될 때, 뮤지컬 배우들이 흥겹게 춤을 출 때 할 법한 디스코적인 동작을 느리게 춘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K-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동작들이다. 하나의 후렴구에 여러 장르의 조각들이 섞여 있지만, 이 동작들은 무겁고 느린 분위기 속에서 속도 차로 호흡을 바꾸는 음악의 흐름에 맞춰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영화 ‘트와일라잇’보다는 오히려 40여 년 전 늑대인간을 다룬 영화 ‘라자리노’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리프를 중심으로 트랩 비트가 받쳐주는 사운드는 깊은 밤의 들판 같은 어둡고 넓은 공간감을 주며, ENHYPEN의 퍼포먼스는 오히려 후렴구에서 느리고 처연하게 ‘운명의 화살비’를 만난 ‘하얀 송곳니’를 가진 존재의 등장을 보여준다. 장르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확연히 다른 요소들이 더해져 시대적인 배경은 알 수 없으나 그 정서만은 명확한 무엇을 보여준다. 그것이 뱀파이어의 삶을 K-팝의 무대 위에서 고전 비극의 분위기를 가진 무용으로 옮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방탄소년단은 ‘Black Swan’에서 K-팝의 일반적인 러닝타임 안에서 힙합 비트를 바탕으로 현대무용적인 요소를 표현했다. K-팝이 장르라기보다 각각 다른 형식과 이야기를 가진 개별적인 작품들을 담는 하나의 그릇이 됐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4세대’에 속하는 ENHYPEN은 경계가 무의미해진 무대 위에서 송곳니를 가진 존재의 비극적인 시작을 알린다. ENHYPEN을 전혀 모르더라도, 퍼포먼스를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들이 늑대처럼 다가온다.

너와 나 그리고 사랑의 서사

오민지:
ENHYPEN의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은, 우리, 너와 나(you and i)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Intro : Walk the Line’, ‘Given-Taken’, ‘Outro : Cross the Line’에서 앨범 속 서사의 주인공은 내레이션의 주어처럼 우리, 즉 경계 위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이며, ‘Let Me In (20 CUBE)’, ‘10 Months’, ‘Flicker’에서 ‘나’와 ‘너’를 가사에 등장시키며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Intro : Walk the Line’에서 멤버들은 ‘세상이 그 위에 우리를 새겼기 때문에’ 서 있던 경계선을 이제 ‘우리의 눈부신 새벽을 새기기 위하여’ 걷고, 타이틀 곡 ‘Given-Taken’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연상되는 여러 단어를 통해 ‘to be or not to be’의 존재론적 물음이 이들의 고민과 연결되며 ‘주어짐과 쟁취함 사이 증명의 기로 위 남겨진 나’를 이야기한다. 가사 속 주인공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각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현실에서 신인 그룹인 ENHYPEN의 출발점과 겹친다. 그리고 사랑은 가사 속 주인공은 물론 ENHYPEN이 경계를 넘어 세상에 적응하게 만드는 계기다. 너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가 ‘밀쳐내지 말아줘 받아줘 날 그곳에서 허락해줘’라며 앙탈 부리듯 고백하는 ‘Let Me In (20 CUBE)’과 자신을 성견이 된 10개월 강아지에 비유하는 ‘10 Months’를 거치는 과정은 자신에 대한 고민에 시달리던 소년이 사랑을 통해 세상에 적응하고 점점 밝아지는 과정이자, ENHYPEN이 팬에게 어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호를 보내고 알아봐줄 너’를 기다리는 나를 보여주는 ‘Flicker’는 앞의 두 곡 속 ‘너’와 ‘나’가 운명과도 같은 관계였다는 점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과거 또는 기원을 다룬 것일 수도 있다. ‘Filcker’가 이미 ‘I-LAND’를 통해 미리 공개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제작진의 의도와 별개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BORDER : DAY ONE’은 곡 속의 주인공이 세상으로 나와 사랑을 하고, 과거부터 이어진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다. 앨범 전반에 걸쳐 고민했던 발자국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given or taken’ 중 어느 것인지와 같은 물음은 마침내 선을 넘음(‘Outro : Cross the Line’)으로서 새벽 같은 희망을 기다리며 살아내는 날들로 마무리된다. 이 앨범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OST와도 같은 구성이고, 이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해 이미 몇 개월 동안 팀의 서사를 쌓은 ENHYPEN의 현 상황과 연결된다. 특히 사랑을 테마로 한 세 곡이 소네트의 ‘thee’처럼 특정 성별이나 신분으로 규정하지 않는 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carved’, ‘운명의 화살 비’, ‘it must follow, as the night the day’와 같이 곳곳에 차용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희곡 ‘햄릿’이 ENHYPEN의 서사와 연결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고전은 앨범 속 신비로운 존재의 판타지적인 분위기와 어울릴뿐더러, 지금까지 ENHYPEN이 걸어온 길에 다양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새로운 세계로의 첫걸음, 그 밑에 고민과 두려움이 깔려 있지만, 삶과 죽음이 뒤섞이고 전복된 카니발과 같은 날들을 살아내며 이를 극복해낼 것(taken). ENHYPEN이 앨범 속에서 맞이한 새로운 세계의 첫날, 경계선에서의 고민, 사랑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이 현실에서 겪는 이야기이고, 그들 또래라면 공감할 보편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주어진 것과 쟁취한 것의 경계 속에서 주어진 날들을 살아내야 하는 것. 그리고 ‘Outro : Cross the Line’의 마지막 가사처럼 ‘꿈이 없는 잠에서 깨면 꿈같은 내일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 그렇게 앞으로 이어질 ENHYPEN 이야기의 첫 시즌이 시작됐다.

현실과 맞닿을 ENHYPEN의 ‘판타지’

이예진
: 데뷔 트레일러부터 콘셉트 포토, 인트로 영상까지, ENHYPEN의 데뷔 프로모션 콘텐츠들은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는 ENHYPEN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어두운 배경, 이와 대조되는 멤버들의 화이트 러플 셔츠와 이들 얼굴에 비추는 강렬한 조명. ENHYPEN의 콘셉트 포토 ‘DUSK’는 선명한 대비를 통해 계단에 깔린 레드 카펫 위의 왕좌를 둘러싼 ENHYPEN 멤버들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어지는 사진들 속 멤버들의 주변을 감싸는 촛대와 촛불, 찻잔, 글라스 등 고풍스러운 감성의 오브제들은 클래식한 무드를 표현하며 ENHYPEN이 과거 어느 가상공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듯 ‘DUSK’는 과감한 대비와 쨍한 색감을 통해 비현실적인 느낌을 풍기며 데뷔의 기점에 선 ENHYPEN의 왕좌에 대한 열망을 판타지적으로 묘사한다. ‘왕좌’는 데뷔를 앞둔 ENHYPEN의 현실로 연결되어 이들이 ‘데뷔 이후에 얻고자 하는 것’의 메타포다. 황혼(DUSK)이 지고 새벽(DAWN)이 올 때, ENHYPEN이 현대 청년의 모습으로 전환되어 어렴풋한 미래를 좇기 시작하는 모습이 ‘DUSK’와 완전히 상반된 콘셉트 포토 ‘DAWN’에서 그려진다. 이곳엔 꾸며진 배경도, 사치스러운 소품도, 과한 조명도, 멤버들의 화려한 착장과 정돈된 모습도 없다. 동이 틀 무렵, 한적한 들판 위에 거칠고 헝클어진 일곱 소년의 형상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콘셉트 포토 ‘DUSK’와 ‘DAWN’은 가상과 현실, 두 가지 세계를 표상하며 ENHYPEN이 두 세계의 경계를 지날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데뷔 트레일러 ‘Dusk-Dawn’은 그 세계관이 뱀파이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울창한 숲 한복판에서 뱀파이어를 연상케 하는 의문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움츠린 모습에서 깨어나는 ENHYPEN. 이들이 한곳에 모여 바라보는 황혼이 짙어가는 하늘은, ENHYPEN의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의 ‘Intro : Walk the Line’이 비추는 현실 세계로 전환된다. 인트로 영상에서 계속해서 보여지는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밑으로 해가 진다. 이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서 있는 소년들은 이 경계선을 ‘넘는 것’이 아니라 ‘걸어갈 것’이라고 공표한다. 빛과 어둠, 황혼(DUSK)과 새벽(DAWN)이 상징하는 판타지와 현실을 동시에 안고 가겠다는 ENHYPEN의 야망이다. 뱀파이어라는 고전의 캐릭터가 지닌 영속성을 현실에 반영하려는 것과 같은 소망. 타이틀 곡 ‘Given-Taken’에서 ‘하얀 송곳니’와 ‘붉은 눈빛’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 자신을 증명’하겠다고 외치는 이는 뱀파이어인지, ENHYPEN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두 시공간의 경계선을 걷는 동시에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며 ENHYPEN은 자신만의 성장 서사를 그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판타지를 현실로 연결시킬 ENHYPEN의 ‘판타지’는 이미 시작됐다.
글. 강명석, 오민지, 이예진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빌리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