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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송후령,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빌리프랩

새로운 문법

강명석: ‘Given-Taken’, ‘Drunk-Dazed’, ‘Tamed-Dashed’, ‘Blessed-Cursed’. 엔하이픈의 데뷔 후 넉 장의 앨범 타이틀 곡 제목들은 두 개의 수동태로 구성됐다. 반면 새 앨범 ‘DARK BLOOD’의 타이틀 곡은 ‘Bite Me’다. ‘Bite’는 수동태가 아니지만, 이 단어의 주어는 내가 아니다. ‘Bite Me’의 가사에 따르면 ‘나’는 상대방이 “on my neck”에 “네 거 라는 증거”를 남겨주길 바라고 있다. 이는 수동적인 기다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 영상에서 엔하이픈 멤버들은 오토바이와 말을 타고 질주하고, 칼을 들고 결투한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뒤에야, 성훈은 “Bite me”를 말한다.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한 자신이 “모든 힘과 권능”을 나를 물어줄 그 존재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Bite me”는 가장 역동적으로 수동적인 문장이 된다. ‘내게로 다시와 tie me’, ‘너에게 바칠게 너를 지킬 brave heart’ 그리고 ‘just come kiss and bite me’. 당신이 나를 물게 하려면, 내 몸에 가해질 고통까지도 스스로 원해야 한다. ‘Bite Me’의 퍼포먼스에는 멤버들이 자신의 목을 조르거나 댄서와 쌍을 이루는 동작들이 포함돼 있다. 어떤 설명 대신 몸에 고통을 가하거나 상대방의 몸과 접촉하는 방식으로 진실한 감정을 표현한다. ‘Bite Me’의 첫 소절이 시작부터 강하게 치고 나가며 곡의 가장 인상적인 훅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두 개의 수동태 중 하나의 정답을 찾았던 네 곡이 차근차근 곡의 분위기를 쌓아 나가면서 후렴구에서 클라이맥스를 만들었다면, “Bite me”라는 단 하나의 염원만 있는 새 앨범의 타이틀 곡은 시작부터 격정적인 감정을 담은 멜로디로 듣는 사람들을 사로잡으려 한다. 네 번의 수동태와 한 번의 명사(와 괄호속 동사)였던 ‘Future Perfect (Pass the MIC)’를 지나, ‘Bite’라는 단 하나의 동사가 타이틀 곡의 제목으로 쓰일 때, 엔하이픈은 팀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정반대에 가까운 내용물을 담는다. 엔하이픈과 컬래버레이션한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 웹툰 ‘DARK MOON: 달의 제단’처럼 ‘DARK BLOOD’에서도 그들은 뱀파이어다. 하지만 누군가를 무는 대신 물리길 바라는 존재들이고, 그들의 갈망은 정교한 설명이 아닌 직관적인 멜로디와 댄서들과의 안무처럼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표현된다. 

 

엔하이픈의 대표적인 러브 송 ‘Polaroid Love’에서 사랑은 “촌스런 그 감정”이었고, “어차피 뻔한 감정”이었다. 노래 속 엔하이픈은 사랑에 빠진 현재가 좋으면서도 사랑을 “알고도 빠진 함정”이라고 할 만큼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때의 그 간질간질한 마음이 ‘Polaroid Love’의 매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DARK BLOOD’의 ‘Bills’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갑작스레 재촉하는 Bills 위로 sign 눈물로야 배우게 된 right price I don’t wanna let you go 돌이킬 수는 없을까 no time”. 상대방 앞에서는 “우린 아마 이별 중에 가장 좋은 예가 될 것 같아”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내 몫이 된 아픔들”은 “분명 다 지불했다 생각했는데 it’s not paid”였고, 희승은 ‘Bills’의 첫 소절을 마치 목놓아 부르듯 격한 감정을 담는다. 사랑에 냉소적이었던 존재가 사랑이란 “함정”에 빠진 뒤 이별을 겪으며 해소되지 않는 슬픔에 괴로워한다. 이것이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 영상 속 뱀파이어가 “Bite me”를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 이별의 아픔과 그 뒤에 찾아오는 망각을 겪느니 ‘너’에게 물려서라도 그래서 나는 사라지되 너에게 잊혀지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은 자신이 가진 것이 주어진 것인지 이뤄낸 것인지 답을 찾던 존재가 ‘너’를 통해 새로운 감정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너’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다시 과거의 닫힌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절절한 고백. 차갑고 어둡던 뱀파이어의 세계에,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확장

송후령: 엔하이픈은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하얀 송곳니”나 “붉은 눈빛”과 같은 지극히 판타지적인 장치를 빌려오되, 그 이면에서 현실에 기반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 영상에서의 “너로 인해 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라는 내레이션처럼, 엔하이픈의 새 앨범 ‘DARK BLOOD’의 이야기 또한 팬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아이돌의 삶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DARK BLOOD’에서 무는 행위는 일방적인 구원의 행위가 아닌 서로 간의 신뢰에 기반을 둔 관계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타이틀 곡 ‘Bite Me’ 속 “you and me”는 불가분의 관계인 아이돌과 팬의 관계로 치환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잊는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DARK BLOOD’의 스토리텔링은 팬데믹 기간에 데뷔해 좀처럼 팬을 만날 수 없었던 엔하이픈의 상황과 맞물린다. 지난해 첫 번째 월드 투어를 다녀오기 전까지 이 팀에게 팬과의 대면은 오직 상상의 영역에 그쳐야 했다. 앨범의 첫 트랙 ‘Fate’에서 “망각”을 “지독한 저주”이자 “잔인한 형벌”이라 표현하며 “어떻게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자조하는 것은 팬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들의 여정에 대한 회상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비로소 마주한 팬과의 만남은 ‘DARK BLOOD’에서 ‘Fate’의 가사 “이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처럼 엔하이픈이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하는 강력한 계기로 작용한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Karma’에 이르러 엔하이픈은 “전의 전의 전생에서부터”(‘One In A Billion’) 기다린 ‘너’를 향해 “운명을 뭐라고들 부르건 I don’t give a what”이라 선명하게 외친다. 이어 ‘너’를 마주함으로써 “이번 세상”은 “함께 지내왔던 어떤 세상보다 단단”해졌다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시공을 건너서 개연성을 넘어서”, “다음 생에 그다음 생도 / 영원히 함께”하자고 고백한다.

 

엔하이픈은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의 수록 곡 ‘Flicker’에서부터 “서로 닿지 않아도 너와 난 마치 하나인 것만 같”다며, “수없이 많은 밤 건너서”라도 “어긋나 있던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왔다. 엔하이픈(ENHYPEN)이라는 팀명에 하이픈(-)을 새기고, 서바이벌 프로그램 ‘I-LAND’ 시절부터 글로벌 팬덤과 온라인으로 소통해온 것은 모두 ‘너’에게 가닿고자 하는 노력으로 읽힌다. “내가 널 믿는다는 걸 믿을 때. 그리고 네가 너 스스로를 믿을 때. 그땐 꼭 내 목을 물어줘.” ‘Bite Me’와 ‘무는 행위’에 대한 해석을 공유하는 엔하이픈과 컬래버레이션한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 웹툰 ‘DARK MOON: 달의 제단’의 1화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그간 엔하이픈이 남긴 궤적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끊임없이 그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본질적으로 이 팀에 내재되어 있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어코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어져야만 했던 운명과의 재회였다. 비로소 “어긋나 있던 세계”가 만나 “약속의 언어”(‘Flicker’)인 “내 목을 물어 줘(‘Bite Me’)”를 말할 수 있는 시점에 다다랐다. “주어짐과 쟁취함 사이”(‘Given-Taken’) 개인의 운명에 대한 고뇌를 지속하던 엔하이픈이 타인과의 관계를 앨범의 중심에 놓으며 그 세계를 확장하는 순간이다. ‘너’라는 세계를 만나 ‘우리’라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던져진 존재로서의 운명을 족쇄처럼 받아들였던 소년들이 너와 나 사이를 잇기 위한 선을 그었다. 스스로 그은 선이다.

비밀스러운 실험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지금까지의 엔하이픈 디스코그래피를 떠올려본다. 엔하이픈은 구체적인 영상 이미지가 떠오르는, 확실한 색깔이 있는 음악을 해왔다. 특히 타이틀 곡을 중심으로 보면 영 어덜트(대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을 가리킨다)를 겨냥한 장르 영화나 드라마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뱀파이어 콘셉트는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Drunk-Dazed’는 탈선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할 법한 OTT 드라마의 드러그 댄스 파티 같은 인상을 풍겼다. ‘Tamed-Dashed’는 뮤직비디오에서도 힌트를 주었듯 순간 속도가 중요한 구기 종목 스포츠 영화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영 어덜트 장르물 같되 ‘활기’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나이 어린 아이돌은 청춘 혹은 소년성에 그 정서의 기원을 둔다. 지금껏 엔하이픈의 음악은 약간은 어둡고 그런지(grunge)하면서도 속도감과 활력을 강조해왔고, 그게 멤버들의 앳된 목소리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지난 앨범 ‘MANIFESTO : DAY 1’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신곡 ‘Bite Me’를 생각하면 지난 활동 곡 ‘Future Perfect (Pass the MIC)’가 이전까지의 엔하이픈과 이번 곡 사이의 중간 다리 같은 역할을 했다. 스포츠 영화 같은 무드가 있기는 한데, 전처럼 내달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위협적이면서도 선언적인 애티튜드가 먼저 들렸다. 여전히 스포츠 영화 같지만 내달리는 구기 종목이 아닌, 링 위에 오르는 격투 종목의 배경음악 같은 인상으로 변했다. 공간 반경을 많이 쓰지 않는 그러나 여전한 에너지의 폭발. 마침 자라나며 좀 더 원숙해진 멤버들의 목소리에도 잘 어울렸다.

 

‘Bite Me’는 간만에 초심의 본격적인 뱀파이어 에스테틱으로 돌아갔다. 달리기보다는 내가 지금 서 있거나 누워 있는 이곳의 감각에 집중하는 듯한 센슈얼한 팝이다. 운명의 상대를 뱀파이어로 여기며 자신을 수동적으로 내놓는 가사가 눈에 띈다. 곡 전체의 무드에서는 올해 초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내놓은 ‘Sugar Rush Ride’의 녹진한 후렴구가 생각나는데, 버스와 후렴에 대비를 주어 후렴을 더욱 강조한 ‘Sugar Rush Ride’와는 달리 ‘Bite Me’는 곡 전체의 분위기를 비교적 일정하게 눌러놓았다. 프로듀서 서킷(Cirkut)은 위켄드의 ‘Starboy’나 샘 스미스의 ‘Unholy’의 프로듀싱을 맡아 잘 알려져 있다. 이들과 같은 어둡고 위험한, 유혹적인 팝을 만들고자 한 의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인트로 ‘Fate’, 타이틀 곡 ‘Bite Me’ 그리고 수록 곡 ‘Sacrifice (Eat Me Up)’와  ‘Chaconne’까지 이런 무드가 쭈욱 유지된다. 더 진득하고 어두워졌다. 일찍이 찾아온 여름에 아예 덥디더운 무드로 승부수를 띄운다.

 

‘Bills’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몽롱하게 연주되는 기타 아래로 힙합 리듬이 붙는다. 전작 중 ‘Not for Sale’과 같은, 자본주의와 연애의 관계를 생각한 노래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Trust Fund Baby’ 등 요즘 하이브 보이그룹들에서 꽤 자주 보이는 주제다. ‘Bills’는 동일한 주제의식의 곡들 중 이 무드를 가장 세련되게 풀어냈다. 작곡가 타이도 응웬(Tido Nguyen)은 K-팝에는 샤이니와 키의 앨범에 참여한 적 있는 핀란드인 뮤지션이다. 이모하면서도 너무 처지지 않는 힙합 비트를 만드는 솜씨가 발군이라 느꼈다. 이번 음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트랙이다. 마지막 곡 ‘Karma’는 지난 앨범의 인기 곡 ‘SHOUT OUT’을 만든 웨이브샤워(Waveshower)와 다시 함께한, 후련한 펑크 힙합 넘버다. ‘SHOUT OUT’이 사이다처럼 청량했다면 ‘Karma’는 맥주처럼 시원하다. 조금 더 어른의 맛이 느껴진다.

 

이제 엔하이픈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습에서는 어린 티보다는 삶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목소리나 퍼포먼스들도 시간이 지나 더욱 영글었다. ‘DARK BLOOD’는 엔하이픈의 영 어덜트 시절 그 막바지의 송가 혹은 보호자 몰래 이미 어느 정도 어른의 삶으로 진입한 이의 비밀스러운 실험처럼 느껴지는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