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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민지
사진 출처. 크림슨 하트

“오랫동안 모험은 소년들만의 것이었어요. 소년들은 집을 떠나 고난을 겪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거나 보물을 얻고 집으로 돌아와 왕위를 물려받죠. 그러나 소녀들은 허락된 공간 안에서만 머물거나 아예 집을 떠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의 소녀들은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모험이든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오리지널스토리텔링팀 관계자의 말처럼, 르세라핌의 오리지널 스토리 ‘크림슨 하트’는 지금의 여성들이 써내려가는 새로운 이야기다. 스토리사업마케팅팀의 관계자도 ‘크림슨 하트’의 프로모션 역시 “주저 없이 모험을 떠나면서 성장하는 여성들의 주체성을 평면이 아닌 실체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크림슨 하트’의 소녀들은 안전하지만 획일화되고 억압된 울타리인 ‘레퓨지아’에서 벗어나 미지의 땅인 ‘언노운’으로 모험을 떠난다. 가장 뜨거운 불의 색이 푸른색이듯 내 마음속 가장 푸른 불꽃(욕망)을 좇아 모험을 시작하고(‘Blue Flame’), 욕망이 커질수록 탁해지는 ‘크림슨 하트’라는 목걸이를 따라 점차 욕망이 생겨나는 것을 인정하고,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Impurities’).

그 과정에서 ‘크림슨 하트’의 소녀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면 으레 그러하듯, 불편해하고, 충돌하고, 의지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 종족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조안(김채원)이 지금 처한 현실이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은 자책감 속에서도 더 잘하고 싶어 하고, 자신감 넘치고 리더십 넘치는 세나(사쿠라)가 위험 속에서도 다른 친구들에 앞장서고, 호기심도 많고 밝은 다비(카즈하)는 자신들이 가야 할 곳과 있는 곳이 어딘지 판단할 수 있다. 고양이와 인간의 경계에 있는 루이사(홍은채)는 모두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고 모두를 무장해제시키고, 기술을 쓸 수 없고 마법만이 허락된 전기인간부족에서 자란 유리나(허윤진)는 바깥을 궁금해하는 개방적인 사고와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다. 

 

르세라핌이 각자 비슷한 성격이나 공통점을 가진 캐릭터로 캐스팅되었다는 '크림슨 하트' 소녀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운명처럼 함께해야만 할 때 생기는 불협화음을 겪는다. 모험의 시작에서 이들은 서로에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크림슨 하트’ 목걸이의 존재나 자신의 능력을 숨길 때도 있고, 상대나 상대의 말을 믿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심지어 새로운 친구의 존재마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이들이 각자의 모험의 이유를 가지고, 하나의 같은 목표점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주인공들이 싸우고, 이기고, 정복하지 않고도 새로운 세계를 편견 없이 마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다양한 종족과 친구가 되는 것은 “판타지에서 대부분 그렇듯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인종, 다른 신체적 특성 혹은 조금 더 복잡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듯, 편견 없이 세계를 마주하며 더 강해지는 방식의 서사를 상징한다고 오리지널스토리텔링팀의 관계자는 설명한다. ‘혼자 하면 방황이지만 함께하면 모험이 된다.’는 말처럼, 소녀들의 모험은 성격도 배경도 다른 이들이 서로 간의 그리고 각자 마음속의 균열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오리지널스토리텔링팀의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이 모험하는 세계는 “상상력의 범위를 극한으로 넓힐 수 있는 판타지”다. 현실의 우리는 회사나 학교를 다니고, 입시나 취업을 준비하며, 가끔의 일탈과 일상 속 비일상을 꿈꾸지만, ‘크림슨 하트’의 판타지에선 자유롭게 뛰놀 수 있고, 한 번도 밟지 못했던 땅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낯선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동시에 ‘크림슨 하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스토리사업마케팅팀의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레퓨지아’와 ‘언노운’, ‘푸른 반딧불이의 섬’은 각각 “통제된 도시 안에서 자신들을 통제하는 경계를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소녀들의 고민과 다음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 과정, 이들이 다양한 존재를 마주하며 이뤄낸 마지막 성장을 상징”하기에 ‘크림슨 하트’를 상징하는 주요 배경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자신이 지켜오던 경계를 넘어가는 경험을 통해 전부라고 생각했던 작은 세상을 확장시키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듯, 성장의 시기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동시에 이 모험은 오직 소녀들끼리 떠나는 만큼 가장 멀리, 가장 높이 가는 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극한으로 높여야 했다. 오리지널스토리텔링팀 관계자는 르세라핌과 ‘크림슨 하트’가 여성들이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을 여성 서사의 핵심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늘 여성은 집에 있는 존재, 약하거나 보호받아야 될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로 나아가거나 높이 가거나 하는 식의 상하좌우의 이동성을 찾기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여자들도 다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고, 얼마든지 원하면 갈 수 있잖아요. 르세라핌도, ‘크림슨 하트’도 가장 멀리, 가장 높이 가는 식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극한으로 높이는 것이 중요했어요”. 예컨대 ‘크림슨 하트’에 대해 다룬 ‘Blue Flame’의 프로모션 비디오에서 ‘레퓨지아’에 살던 세나(사쿠라)는 양 떼를 지켜보는 모니터와 함께 등장하고, 다비(카즈하)는 인간의 눈처럼 보이는 공간의 커다란 유리막 안에 갇혀 있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당하고,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동물인 양처럼 획일화된 사회에 길들여진 채다. 그러나 조안(김채원)이 자신이 살던 ‘레퓨지아’를 떠나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언노운’에 살던 유리나(허윤진)와 루이사(홍은채)까지 합류해 언덕에 서서 다섯 명의 멤버들이 모여 저 멀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크림슨 하트’의 서사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이 아직 어둡더라도, 높은 곳에서 더 높은 곳을 욕망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그래서 ‘크림슨 하트’의 모험은 너무 높이 올라가 추락하더라도, 멀리 가다가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는 여성들의 서사다.

‘크림슨 하트’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평행 세계 속 아이돌 르세라핌은 이들이 겪을 시련을 이미 경험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소녀들이 마주할 세상은, 르세라핌에게 그러했듯 “나를 바꾸려 하”고 “내 결점을 드러내려고(The world brings out my flaws)”(‘The World Is My Oyster’)할 것이다. 그러나 ‘The World is My Oyster’가 처음 유래된 셰익스피어의 희곡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서 피스톨은 “흠, 그렇다면 세상은 내가 칼로 열기만 하면 되는 굴과 같지(Why, then, the world’s mine oyster, Which I with sword will open).”라고 말한다. 굴(세상)은 단단한 껍질 속에 있어 열기 힘들 것 같지만 칼이 있다면 누구든 간단히 열 수 있듯, 당신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원하든 전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굴 속에 때때로 진주가 있듯, 세상에 숨겨진 보석은 자기 자신 그 자체다. ‘ANTIFRAGILE’의 콘셉트 포토인 ‘IRIDESCENT OPAL’에서 김채원은 거친 절단과 연마를 거친 후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사쿠라는 분홍색 불꽃이 안에 있는 독특하고 단단한 핑크 다이아몬드, 허윤진은 아름답지만 극도로 취약해 역설적으로 가치가 있는 에메랄드, 카즈하는 낭만적인 바다의 색이자 그 바다가 나를 삼키려 할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사파이어, 은채는 끝없이 타오르는 열망을 가진 루비다. 높은 열과 압력을 견뎌야 원석이 될 수 있고, 또다시 절단과 연마를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있다. 다큐멘터리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땀범벅이 되고, 울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던 멤버들이 마침내 르세라핌이 된 것처럼, ‘크림슨 하트’의 소녀들 역시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할 때, ‘모험의 과정에서 자신을 가두지 않고 세상 속에서 새로운 나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할 때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쟁취해 낸 이들만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을 가질 거라고(The world is my oyster)”(‘The World is My Oyster’).

 

일반적으로 모험 만화에서 주인공은 상실의 경험을 통해 각성한다. 자신 혹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소중한 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르세라핌은 그 무엇도 희생하지 않고 해피엔딩의 결말을 스스로 닫는 여성의 화상이다. ‘The Great Mermaid’에서 르세라핌은 자신이 구해준 왕자를 사랑하게 된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희생하는 대신 두 다리를 얻게 되지만,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동화 ‘인어공주’를 가져온다. 하지만 “하날 위해선 하날 포기하라고” 외치는 세상에 “아무것도 희생하고 싶지 않다(I don't wanna sacrifice)”며 ‘원하는 건 다 가’지라고, ‘포기만 안 하면 결국엔 진실(Truth)’(‘The Great Mermaid’)이 될 거라고 외치며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뺏기지 않는다. 인어공주에게 목소리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고 말을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사랑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중한 것을 뺏기고, 자신을 잃은 채로 행복을 꿈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대단한 인어공주(The Great Mermaid)’는 “세상을 내 바다로 덮쳐”버려 온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포도밭을 발견한 여우가 아무리 애를 써봐도 포도를 먹을 수 없자 “저 포도는 어차피 신포도일 거야.”라며 포기한 동화 ‘여우와 신포도’를 가져온 ‘Sour Grapes’도 마찬가지다. ‘Sour Grapes’에서 사랑을 ‘신포도’라고 말하는 이유도, 내가 아무리 두 발 아래가 아찔해도 참고 사다리를 올라 “한 걸음씩 거릴 좁혀도 너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르세라핌은 자신의 추락을 감수한 채 사랑을 얻고자 하지도, ‘신포도’ 따위는 먹지도 않는다. 희생하거나 희생당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선택만을 하는 이들에게 해피엔딩은 절망의 끝에 간신히 도달한 결론이 아닌 스스로 닫은 결말이다.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면, 르세라핌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말을 닫게 될 것인가.

르세라핌은 그리고 이들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크림슨 하트’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결정하고 한계를 벗어나갈 수 있는 여성들”이 직접 써내려간 서사라고 스토리사업마케팅팀 관계자는 말한다. 현실의 르세라핌으로의 경험은 ‘크림슨 하트’의 판타지 작법을 통해 재해석되고 이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주어진 미션을 두려움 없이 수행해 나간다. 그래서 ‘크림슨 하트’는 평행 세계의 르세라핌이 그러하듯 너무 다른 서로를 만나 더 높고 먼 곳을 함께 갈망하고, 추락에도 날아오르는 소녀들의 모험담이다. 지금까지 허락되지 않았어도, 이제는 당연해진 소녀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