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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Official fromis_9 유튜브

아이돌도 사람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뭐 이런 걸 굳이 입 밖으로 내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입 밖으로 내기 전에는 쉽게 잊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람 탓을 할 수는 없다.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은 해당 직군만이 지닌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아이돌은 노래를 하고 앨범을 낸다는 점에서 어엿한 가수지만, 일반 가수와는 별개 취급을 받았다. 한없이 친숙한 자리에서 대중과 누구보다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이들이지만, 아이돌과 팬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삼도천처럼 절대 넘을 수도 없고 넘어서도 안 되는 큰 강이 늘 유유히 흘렀다. 아이돌을 제작, 기획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들을 요정이나 초월적인 존재로 설정하며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상 하나를 봤다. 고3 학생이 5시간 반 동안 밤샘 공부를 하는 내용이었다. 특별할 건 없었다. 별다른 연출 없이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타인과 리얼타임으로 공유하는 ‘스터디윗미(Study with me)’ 영상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인기 유튜브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맹숭맹숭하기 이를 데 없는 콘텐츠의 인기 비결은, 바로 그 ‘별다른 연출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편안한 집보다 조금 불편한 학교나 독서실에서 집중이 잘되는 것처럼, 나와 같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집중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중요한 시험을 앞둔 이들에게는 익숙한 원동력이자 적지 않은 동기부여였다. 책장을 넘기거나 기지개를 켜는 등 공부 현장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소음도 웬만한 ASMR 못지않게 집중도를 올려주는 요인이었다. 다만 영상의 주인공이 남달랐다. 그는 여성 그룹 프로미스나인의 백지헌이었다.

 

지헌은 프로미스나인의 서브 보컬이자 막내다. 2003년생으로 2017년 9월에 데뷔했으니 14세에 프로로서 첫 발자국을 내디딘 셈이다. 여기에 추가 경력이 몇 줄 더 더해진다. 프로미스나인은 잘 알려진 대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그룹이다. 특히 지헌의 경우 프로그램 출연 이전부터 일찌감치 연예계로 진로를 정하고 광고 모델이나 연기 등 다양한 방면에서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어쩌면 10대 전부가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준비와 고민 그리고 실질적인 아이돌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다. 

이쯤에서 흔히 생각하는 ‘아이돌’을 둘러싼 시공간이 뒤틀린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무릇 아이돌이란 지난한 인간계와는 다른 곳에서 꿈과 희망, 열정과 에너지로 찬란하게 빛나야 하거늘,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건 코앞에 닥친 시험을 준비하는 머리카락만 핑크빛인 평범한 고3의 밤샘 공부 현장이다. 댓글에 보이는 영상에 대한 반응도 아이돌을 향한 대중의 생각과 그 이면에서 상상보다 훨씬 열심히 한 사람 몫을 사는 아이돌이자 학생인 지헌에 대한 감탄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은데 정말 멋지다.”, “나도 고3인데 같이 힘내자.”는 공감의 목소리에서 영상 시작 부분 ‘“성적이 잘 나오거나 공부를 잘하진 않지만 그래도 후회는 남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았다는 응원의 메시지까지. 영상은 단지 프로미스나인이나 지헌의 팬만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서로 다른 특별한 울림을 전했다.

지헌의 ‘스터디윗미’ 영상은 이외에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10대에 대한 기특함 같은 감정을 넘어 ‘지금의 아이돌’에 대한 시각을 조금 바꿔놓는다. 영상을 접한 많은 사람도 가까운 듯 먼 곳에 있는 ‘아이돌’ 지헌이 그저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감탄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필수로 따르는 각종 어려움에 대한 인식을 기본으로, 생의 한가운데를 통과 중인 지헌이라는 사람이 학생이라는 신분과 그에 따르는 의무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칭찬과 격려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지금의 아이돌은 ‘아이돌’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당사자에게나 그로 소비하는 사람에게나 차원을 넘나드는 특수 상황이 아닌, 그저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는 하나의 직업이자 실체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이돌과 고3이라는 두 개의 자아는 얼마든지 동시에 존립이 가능하며, 이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생애 단 한 번뿐인 열여덟에 솔직하게 부딪히는 백지헌이라는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으로 당당히 존재한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다. 물론 단순한 유희나 호기심에서 10대 아이돌이 등교 준비를 하거나 밤샘 공부하는 모습을 찾아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다. 그러나 지헌의 ‘스터디윗미’ 영상을 본, 프로미스나인 공식 유튜브 계정의 구독자 수 79만 명을 훌쩍 넘는 150만 명의 대부분은 아마 생각보다 훨씬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인 마음으로 지헌과 5시간 반을 함께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돌과 사람이라는 개념이 얽히며 만들어낸 것들은 대부분 아이돌 산업의 어두운 이면이나 논란의 온상으로 취급받아왔다. 그 한편에서 아이돌과 사람은 이렇게 교차하기도 한다. 그 교차점이 꼭 정상에서 빛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직업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프로 아이돌로서 또 또래와 함께 통과하는 그 연령대만의 터널 속에서, 지헌은 자신에게 붙은 이름표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 그대로를 힘껏 살아간다. 그런 삶과 사람이 주는 힘이 분명 있다. 그런 아이돌의 삶도 있다. 그런 아이돌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