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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 쏘스뮤직

2022년 10월 17일, 언제나처럼 수많은 새 앨범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앨범 두 장이 눈에 띄었다. (여자)아이들의 다섯 번째 미니 앨범 ‘I love’와 르세라핌의 두 번째 미니 앨범 ‘ANTIFRAGILE’이었다. 두 팀은 각각 데뷔 4년 차, 데뷔 6개월 차로 연차도, 그룹 색깔도, 음악적 방향도 전혀 다르다. 같은 걸그룹이자 당일 발매작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앨범들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별다른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자꾸만 이 두 장이 묶여 신경 쓰였다. 발매된 앨범을 이러저리 살펴보며 깨달았다. 이들 모두,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먼저 (여자)아이들이다. 타이틀 곡은 ‘Nxde’. 제목 공개 당시부터 설왕설래를 낳았던 곡은 노랫말에서도 거침이 없다. 노랫말에서 뮤직비디오, 멤버들의 헤어스타일까지 팝 문화의 시대적 아이콘 마릴린 먼로를 모티브로 삼은 노래는 이른바 ‘백치미’로 호도되곤 하던 이 여성 스타를 향한세상의 편견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난 원래 나로 태어났다(I’m born nude)”고 외친다. 마지막에 이르러 곡 내내 휘두르던 마이크는 정확히 정면을 향한다. 그리고 말한다. “변태는 너야”. 그동안 아무리 불만이 커도,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도 ‘변태’라는 직접적인 단어만은 피해왔던, ‘너’를 불특정 다수로 상정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돌의 노랫말에 일대 파란이 인다. 다른 무엇도 아닌 변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바로 너다. 이 묵직한 한마디가 떨어짐과 동시에, 제목 철자의 ‘U’ 위에 그려진 ‘X’에 새삼 눈이 쏠린다. 영화에서 갑자기 스크린을 응시하며 연기를 시작하는 배우를 보는 듯한 생경함이다.

르세라핌 역시 표현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충격으로 더 강해지는 성질을 뜻하는 ‘ANTIFRAGILE’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들은 강렬한 인트로 ‘The Hydra’부터 얼마든지 날 부숴보라며 패기 넘치는 도발을 감행한다. 일본어를 활용한 “내 목을 잘라봐(私の首を切ってみて)”라거나 “나를 검은 바다에 던져봐(私を黒い海に投げてみて)” 같은 좀 더 강도 높은 표현도 이어진다. 앨범은 나도 처음 듣는 내 라이벌이나 내가 두고 온 토슈즈, 내가 걸어온 커리어를 무시하지 말라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경고를 이어가다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터뜨린다. “나는 빌어먹을 천사나 여신이 아니야(I’m no f***in’ angel / I’m no f***in’ goddess)”. 경쾌한 록 비트를 담은 수록 곡 ‘No Celestial’에서 비로소 터져 나온 이들의 속내는 후렴구를 통해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비록 방송을 통해서는 ‘Freakin’으로 수정되어 전달될지언정, 원문인 “I’m no f***in’ angel / I’m no f***in’ goddess”에 담긴 뉘앙스와 F-word를 공적인 매체를 통해 전하는 속 시원함은 그대로 남는다. 말 그대로 ‘쾌감’이다. 

이렇듯 경쾌하고 도발적인 이들의 색다른 발화 아래에는 나름의 서사가 자리한다. 우선 두 팀의 팀 서사부터 살펴보자. 그룹의 전담 프로듀서이자 리더인 전소연을 중심으로 데뷔 당시부터 ‘누가 뭐 겁나’를 선언하듯 던지며 등장한 (여자)아이들은 단연 이 분야의 선구자다. 에너지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한껏 화려하게 전시하면서도 특유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이들은 첫 앨범 ‘I am’에서 누구도 씌워주지 않은 왕관을 스스로 쓴 ‘LION’을 거쳐 ‘진짜 사랑은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I love’의 테마까지 닿았다. 자아의 밑바닥을 헤집고 올라와 진짜 나를 찾아 사랑까지 하게 된 이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을까. 한편 그룹명부터 ‘두려움 없이(Fearless)’를 뿌리에 둔 르세라핌은 이들이 여성이자 아이돌로서 두려워하는, 혹은 그들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둘러싼 견고한 벽을 깨 나가야 하는 미래를 운명처럼 타고난 그룹이다. 이 뜨거운 운명 앞에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그곳이 어딘지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이 고운 언어로만 정제될 리 만무하다. 이미 상반기 최고의 히트곡으로 자리한 (여자)아이들의 ‘TOMBOY’ 속 “I’m a f**king tomboy”나 표현 수위로 인한 19금 딱지를 세 곡이나 붙인 정규 앨범 ‘BORN PINK’를 발표한 블랙핑크의 행보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건 일종의 파열음이다. 최근 부쩍 늘어난 전에 없던 여성 아이돌의 거칠어 선명한 언어는 오로지 자극을 위해 사용되는 선정적인 표현이나 조금 ‘세 보이기’ 위해 남발하는 무의미한 F-word와는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K-팝 씬은 물론 그 안에 있는 개인 하나하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꾸준한 의지와 현실과의 끝없는 마찰이 이뤄낸 달라진 지금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수년간 새 시대 K-팝의 시대정신처럼 호명되어 온 단어 가운데 ‘걸 크러시’를 보자. 단어의 표면적 의미에만 기댄 지루한 결과물도 물론 적지 않았지만, 동시에 K-팝 역사상 여성 아이돌, 여성 그룹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한계와 고정관념을 깨고 절대다수를 설득하는 데 이보다 유용한 캐치프레이즈는 없었다. ‘왜 여성 아이돌은 안돼?’라는 근원적 질문의 반복,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표현하는 아이돌의 등장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를 끝낸 전 세계에 자리한 새로운 K-팝 제너레이션. 이들이 모인 곳에 부드럽고 친절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여성 언어’,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한 외설이 설 자리는 없다. 다방면의 두드림이 만들어낸 파열 속, 단어만큼 뚜렷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