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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해인, 임수연(‘씨네21’ 기자), 김겨울(작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SBS

‘치얼업’ (SBS)

윤해인: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의 캠퍼스. 대학교 로고가 수놓인 야구 점퍼를 입고 ‘인증 사진’을 찍으며 캠퍼스를 만끽하는 스무 살 도해이(한지현), 매사에 진지하고 때로 근엄하기까지 하지만 어딘가 사연 있어 보이는 선배 박정우(배인혁) 그리고 없는 게 없는 부자 신입생 진선호(김현진). 드라마 ‘치얼업’은 세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뜻 이상적인 캠퍼스의 청춘을 구현하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빛에 그림자가 있듯, ‘치얼업’은 찬란한 화면을 뚫고 미스터리가 스토리의 한 축을 맡으며 긴장감을 부여하고, 주인공들의 푸르름 속에 차가운 현실을 담아 균열을 만든다. 아직 고등학생인 동생과 현실 감각이 없는 엄마를 사실상 부양해야 하는 도해이는 틈날 때마다 무엇이든 다 해주는 심부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신에게 무례한 고등학생을 상대로 웃으며 과외를 한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졸 때마저 ‘돈을 불러오는 명상’ 영상을 틀어놓고 있는 도해이는 사람은 믿지 않지만, 돈은 믿는 사람이다. 낭만은 시간과 돈이 없으면 즐기지 못하는 사치품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스무 살. ‘치얼업’은 그런 도해이가 ‘돈 때문에’ 모종의 계약을 맺고, 사건 사고로 학내 여론이 좋지 않아 폐지 위기에 처한 학교 응원단 ‘테이아’에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무대에 서는 찰나를 위해 시간과 체력을 쏟아야 해서 남는 거라고는 추억뿐인 ‘테이아’ 활동은 계약이 없었다면 도해이가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사치품이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응원단 활동은 도해이에게 조금씩 낭만으로 스며들게 될 것을 예고한다.  

‘거래완료’

임수연(‘씨네21’ 기자): 당근마켓과 중고나라에서 벌어지는 대화가 일종의 스토리를 만드는 시대, 아예 중고 거래를 소재로 한 다섯 개의 이야기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가 나왔다. 두산 베어스를 좋아하는 이모와 삼촌을 속이고 남몰래 LG 트윈스를 응원하는 열세 살 소년은 한정판 점퍼를 구하기 위해 전직 포수 출신과 거래하다 인생을 배운다. 원하는 때 잠이 들고 깨어날 수 있게 해주는 가상의 기계는 재수생과 고 3의 로맨스로 이어진다.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교정직 공무원은 로커가 되기 위해 록 밴드 멤버에게 기타를 구입하다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죽음을 앞둔 사형수나 꿈을 접기 위해 세계 문학 전집을 내놓은 작가 지망생은 중고 거래 덕분에 희망을 얻는다. 각 챕터의 등장인물들이 느슨하게 관계를 맺고 연결되는 ‘거래완료’는 기본적으로 다정함의 힘을 신뢰한다. 짧은 이야기에 거창한 반전을 시도하거나 장식적인 스타일을 더하는 식으로 힘을 주는 대신 각자가 겪는 아픔을 골똘히 응시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책임한 낙관이 아닌,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올 수 있는 이유다. 전석호, 태인호, 조성하, 이원종, 최예빈 등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여자들의 왕’ - 정보라

김겨울(작가): 높은 탑에 공주가 살고 있다. 소설은 용의 눈을 피해 겨우 이 탑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한 기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기사는 공주를 만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하여간 뻘도 건너고 늪도 지났다. 이제 기사가 공주를 구해서 나가기만 하면 될...까? 설마 하니 정보라 작가가 그런 소설을 썼을 리가 없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뭐 하나 그렇게 얌전하지가 않다. 차가운 현실을 마주 보게 하든지, 인물들을 개성 있게 살려내든지, 무섭고 잔인한 일을 벌이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동화 속 인물들에게 현실의 짐을 지워준 뒤 어디 어떻게 되나 보자고 말한다. 뻔한 이야기를 피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다시금 뻔해지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는다. ‘공주, 기사, 용’ 3부작 뿐만 아니라 함께 수록된 다른 작품들도 그러해서, 어떤 것은 역사서 같고 어떤 것은 설화 같다. 부커상 최종 후보였던 ‘저주토끼’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에 정보라 작가에 입문하는 책으로 권할 만하다.


‘껌 (feat. 배현이)’ - 선우정아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선우정아를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선우정아를 다 아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2006년 정규 1집으로 데뷔한 뒤 12년간 그가 한국 대중음악계를 종횡무진하며 보여준 모습에서는 도무지 일관성이란 걸 찾을 수 없다. 2NE1이나 현아, 김세정 같은 K-팝 가수들과 작업을 하다가는 ‘뭐 이렇게 어려운 음악을 쉽게 잘하나?’ 싶은 앨범을 뚝딱 만들었다. ‘도망가자’나 ‘구애’ 같은 노래로 듣는 사람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더니, ‘봄처녀’나 ‘뒹굴뒹굴’을 흥얼흥얼 부르며 금세 어깨와 광대를 씰룩이게 만든다. 선우정아의 팔색조 매력은 레코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기 공연의 반복되는 패턴을 피하고자 공연마다 악기를 바꾸거나, 다양한 장르의 곡을 동시에 무대에 올리며 ‘페스티벌 선우정아’라는 이름을 과감하게 붙여버리는 과감함도 서슴지 않는다. 소리라는 틀 안에만 있으면 무엇이든 음악이 되게 만드는, 그게 바로 선우정아라는 음악가가 가진 최고의 재주다.

 

그런 그의 새 앨범 ‘Studio X {1. Phase}’는 도무지 한 손에 잡히지 않은, 앞으로도 잡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선우정아라는 이름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음악적 실험의 한 장이다. 역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 나가고 있는 신예 힙합 싱어송라이터 배현이와 호흡을 맞춘 ‘껌’이 대표적이다. 갑작스레 맞는 뺨처럼 “네 시선 재수 없어”로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노래는 사방을 흘겨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껌을 “짝짝” 씹어대는 누군가의 시선을 재기발랄하게 청각화한다. 전반적인 곡 흐름에서 보컬 연출까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스럽고 그래서 장난스러운 노래는 우리가 아는 선우정아라는 음악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우정아를 아는가. 아무래도 모르지 싶다. 이것이 첫 번째 실험이라는 점에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