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글. 임수연(‘씨네21’ 기자), 윤해인,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라이언스게이트 필름스

‘존 윅 4’ 

임수연(‘씨네21’ 기자): ‘존 윅’을 단순히 ‘자기가 기르는 강아지를 건드린 대가로 수백 명을 죽이는 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던 관객도, 이 시리즈가 보여준 뚝심이 일궈낸 예술적 성취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존 윅 4’는 숭고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전편의 엔딩에서 최고회의와 맞설 것을 예고했던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영화 초반부터 최고회의의 장로를 처단한다. 새로운 수장이 된 그라몽 후작(빌 스카르스고르드)은 존 윅을 숙청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암살자들을 불러 모으고, 존 윅의 오랜 친구 케인(견자단)의 약점을 간파해 그 역시 동료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든다.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 일본의 도쿄 국립 신 미술관, 독일 베를린 성심 성당, 프랑스 파리의 트로카데로 광장 등 다양한 로케이션에서 공간적 특성을 살려 디자인한 액션 시퀀스는 역대 시리즈를 통틀어도 가장 수준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최고회의의 장로가 있는 사막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견자단이 전성기에 찍었던 쿵푸 영화와 오우삼의 ‘첩혈쌍웅’이 보여준 비장한 총격을 경유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으로 장엄하게 마무리되는 ‘존 윅 4’는 고전과 액션 장르에 바치는 장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넥스트 인 패션 시즌2’ (넷플릭스)

윤해인: ‘넥스트 인 패션’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상금과 특전을 걸고 우승자를 가리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넷플릭스의 리얼리티 쇼다. 2020년 첫 시즌에서 이제는 널리 알려진 우승자 민주 킴을 탄생시켰고, 2023년 3월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즌에서는 왕족 스타일부터 멧 갈라를 위한 의상, 생화를 활용하는 과제, 빈티지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인종과 나이, 체형의 모델을 고려한 의상을 제작하는 미션이 에피소드마다 주어졌다. 참가자들은 주제에 부합하면서도 본인만의 색깔이 있고, 새로우면서 완성도 높은 의상을 짧은 시간 내에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참가자들의 다양한 배경과 정체성이 옷의 형태와 색감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넥스트 인 패션’은 일단 그저 보는 것만으로 시각적 만족감을 선사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특성상 발생하는 탈락의 압박은 자연스레 참가자들 사이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넥스트 인 패션’은 그 과정을 보다 선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참가자들은 경쟁 관계에 있지만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며, 각자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응원한다. 협업을 하는 미션에서도 서로의 개성이 드러나지만 일관성 있는 결과물을 위해 대화하고 조율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함께 담긴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그냥 자신을 그대로 보여줘요. 온전한 당신을 확실하게요.” 스페셜 심사위원을 맡은 스타일리스트 제이슨 볼든의 말처럼, 심사위원들 역시 서바이벌의 자극을 위한 냉혹함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종 업계 종사자의 위치에서 디자이너가 겪는 문제에 공감하고, 참가자들의 개성을 존중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이 옷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현하거나, 초반에는 해낼 수 없던 미션을 완수하며 자신감을 찾아가고, 이미 재능 있는 사람들이 도전을 통해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하는 성장의 기쁨이 녹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경쟁과 협업을 통해 발전을 이루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찾아가는 과정. ‘넥스트 인 패션’은 선의의 경쟁이란 무엇인지 제시하는, 좋은 서바이벌의 예시다.

‘해 / 할건지말건지’ - 장기하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일단 내 목소리부터 쭉 녹음하고 더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만 요것저것 추가해서 만들”었다는 말마따나, 말맛 하나만 말짱히 남고 말면 멀끔하게 미니멀해진 장기하의 음악은 “디딜 땅을 잃은 채 둥둥 뜬”다. 얼굴들과 달아두었던 시간적 레퍼런스와 사운드의 공간성이라는 무게 추를 풀어놓고 작년에 허공으로 근사하게 떠오른 그가, 모든 중력을 거슬러 떠다니다 공연을 위해 닻을 내렸다. ‘봉제인간’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는 동료들이 이 정박을 노련하게 도와준다. 특히나 2010년대 동안엔 얼굴들의 밀도 높은 합에서, 2020년대부터는 지윤해와의 정교한 협연에서 리듬감을 뽐낸 드러머 전일준이 더욱 박력 있게 두들기는 솜씨로 양편을 이어준다. 조금 멀게는 ‘ㅋ’나 ‘그건 니 생각이고’ 등에서 시도되어 ‘공중부양’으로 극대화된 간소한 편성과 구어체의 박자 감각 간 조합이, 그렇게 장기하의 트랙 중에서도 전례 없이 두툼하고 날카로운 질감과 빽빽하고 극적인 연주로 대체된다. 입말에서부터 소리들을 쌓아올린 구성과 목소리를 따라 흐르는 진행은 유사하지만, 전작이 베이스 없는 여백에 주로 전자적이거나 샘플링된 소리들을 자그맣게 조각내 유유히 흘려보냈다면, ‘해 / 할건지말건지’의 물살은 숨 돌릴 새 없이 흘러가는 실물 악기 소리들의 강도와 방향을 순간마다 전환하며 세차게 몰아친다. 그냥 하라며 대뜸 호언하면서도 “뭐라도 하라면 하긴 하겠지만 할 건지 말 건지 나도 몰라”라며 장담은 못해 이쪽저쪽을 오락가락 충돌하는 노랫말과 닮은 유속이 격하게 흘러가면서, 두 트랙은 “과거도 미래도 바라보지 않는 (혹은 양쪽을 똑같이 바라보는) 지금 (‘GAEKKUM / GOOD’)”만으로 차오른다.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러면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이 말들을 언제나 뜻보다는 소리로 흘려보내온 능숙한 장기가 더욱 능청맞아진 장기하의 이 지금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오래된 미래”마저 부럽지가 않아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