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글. 윤희성, 김겨울(작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MBC)

윤희성: 팬데믹의 사주경계 시절이 마무리되자, 타인의 여행을 들여다보는 것은 전만큼 즐겁지 않은 일이 되었다.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하는 플렉스한 관광도, 경쟁적으로 가성비를 따져보는 알뜰살뜰한 유람도 각자의 방향으로 자극을 키울수록 보는 사람의 피로함 역시 따라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2022년 겨울 첫 시즌을 출범한 이후 벌써 세 번째 여행의 닻을 올린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극사실주의 여행’이라는 단순한 콘셉트를 반복하면서도 흥행과 화제성을 내내 유지하고 있다. 이 방송의 카메라는 종종 풍경을 놓치니 장소가 인기 비결일 수는 없다. VCR을 지켜보는 진행자 장도연이 고정 코너처럼 번번이 내용을 보충해줘야 하는 형편이니 정보가 무기라 할 수도 없겠다. 그러니 방송의 원천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주어, 기안84의 것일 수밖에 없다.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로 불리는 기안84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고집스럽도록 자신의 방법과 취향을 고수하면서 엉뚱함과 무례함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예능의 캐릭터를 키워올 수 있었다. 그러니 보통의 여행자들처럼 멋지고 유명한 것을 경험하는 대신, 그는 어디에서나 자신의 좁은 세계를 겹쳐보며 작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며칠이 걸려 도달할 수 있는 먼 곳에서 기안84가 원하는 것은 대개 수영하기, 춤추기, 친구 사귀기 같은 것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낯선 것을 새롭게 고민하지 않는 덕분에 기안84는 마음의 경계를 쉽사리 넘나든다. 마다가스카르의 청년에게 초장 바른 생선회를 권하는 동시에 낯선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먹고 감탄한다. 정수되지 않은 강물을 떠먹거나 허술한 숙소에서 잠이 들 때, 그의 태도에는 계산이나 과시가 없다. 어디에서나 이상하고 그래서 어디에서나 한결같을 수 있는 존재,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이한 사람. 시청자들이 보는 것은 결국 기안84가 바라보는 넓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발견하는 기안84라는 독특한 인물에 대한 유사한 인상이 주는 유대감일지도 모른다. 여행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은 시절이라는 것은 애초에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와는 무관한 전제였다. 기안84의 초심이 유지되는 한, 이 여행은 당분간 고유의 방식으로 특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동물을 위한 정의’ - 마사 너스바움

김겨울(작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비거니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유는 크게 건강 관리, 기후위기 대응, 동물권 옹호로 나뉘는 듯하다. 그중 뒤의 두 가지 이유로 비건을 지향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체로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해도 동물권에 대해서는 조금 유보적인 반응이 돌아올 때가 많다. “하지만 (기후위기 문제를 제외한다면) 동물을 먹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런 입장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그 오랜 세월 잡식동물로 살아온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기형적인 공장식 축산업에 대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유류의 90% 이상이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터전과 목숨을 빼앗긴 동물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동물권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쾌고감수 능력을 가진 존재에게 이런 식으로 고통을 주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등대처럼 믿고 있는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저명한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이 동물권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책을 썼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동물 역시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그 나름의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동물을 위한 정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토대가 될 만하다.

Take That - ‘This Life’ 

랜디 서 (대중음악 해설가): 영국의 보이밴드 테이크 댓이 오랜만에 스튜디오 앨범으로 돌아왔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쭉 이어오고 있는 3인 체제다. 아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은퇴한 제이슨 오렌지를 제외하면 1989년에 데뷔한 5명 중 4명이 모두 건재하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의 테이크 댓은 장년의 나이에도 외부 프로듀서와 가장 트렌디한 팝을 만들 수도 또 자신들의 힘으로 팝 록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반 하나를 만들 수도 있는 그룹이다. 1990년대 유럽 전역에서 누린 인기를 바탕으로 그 어느 장르에 도전해도 환영받는 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This Life’는 오랜만에 게리 발로우를 비롯해 멤버들이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다. 음반은 긍정적인 팝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테이크 댓처럼 아직까지 건재한 1990년대 스타 그룹은 잘 없다. 미국과는 또 다른 영국 팝 씬의 분위기 때문인 듯하다. 미국은 산업이 그룹에서 한 명을 뽑아내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어내는 데에 진심인 편이다. 영국은 팬들부터 팀에 의리를 지키는 노력을 좋게 평가하는 편이고 말이다. 테이크 댓이 들고 온 선선하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좋다. 팝에는 언제나 이런 곡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