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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이예진C, 김복숭(작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쇼박스

‘시민덕희’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영화는 경기도 화성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성자 씨가 보이스 피싱으로 3,200만 원을 빼앗긴 2016년 실화를 긴박하게 재현하며 시작한다. 한달음에 도착한 은행, 덕희(라미란)는 대출 수수료 명목으로 여덟 차례 송금을 요구한 통화 상대  대리 사칭임을 확인하자 졸도한다. 고액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에 속아 중국 칭다오 보이스 피싱 조직원이 되어버린 대리 재민(공명) 탈출을 계획하고, 경찰의 늑장 대응에 속이 타들어 가던 덕희는 자력 구제를 결단한다. 지체할 수 없는 덕희와 재민의 내부 고발이 닿아 피해자와 사기꾼은, 아니 피해자들은 공조한다. 곧장 낯선 땅으로 날아가 발로 뛰는 덕희 옆에서 세탁 공장 동료 봉림(염혜란)은 중국어 통역을, 숙자(장윤주)는 증거용 사진 촬영을(특이 사항: 아이돌 홈 마스터 이력) 분담하고, 여기에 칭다오 현지 택시 기사인 봉림의 동생 애림(안은진)까지 가세해 사건의 본거지를 찾아 누빈다. “사기당한 게 내 탓이냐?” 맞닥뜨린 보이스 피싱 총책(이무생)을 향해 외치는 덕희는 라미란 배우의 전작 ‘걸캅스’에서 그가 분한 ‘일망타진’ 형사 출신 미영과 닮았다. 잃은 것보다 웃도는 액수로 요령껏 합의하고 대규모 피해자를 양산한 범죄를 없던 셈 치는 짓은 못하겠는 덕희와 경력 단절 끝에 민원실 주무관으로 일하나 48시간 후 발생할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해 비공식 수사에 착수하고야 마는 미영은 호방하게 가해자의 덜미를 잡는 DNA를 공유한다. 투박하지만 맞는 말만 하면서, 피투성이가 돼도 정의를 지킨다. ‘시민’의 얼굴을 한 이 배우는 이타심으로 분개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그래서 스크린 속 라미란은 자주 범인(凡人)이며 자주 ‘위인’이 된다.

‘혤’s club’ (혜리)

이예진C: “언니는 편안한 사람이야.” (여자)아이들 미연은 혜리의 가장 큰 장점으로 편안함을 꼽았다. 음악, 예능,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하며 어느덧 데뷔 13년 차가 된 혜리는 유튜브 채널 ‘혜리’의 ‘혤’s club’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토크쇼로 확장한다. 걸그룹 걸스데이의 멤버로 활동한 경력은 미연과 블랙핑크의 지수처럼 걸그룹 멤버들과 대화할 때 빛나고, 13년 동안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쌓인 경험과 인맥은 미연의 말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끌어낸다. 지수가 콘텐츠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묻자 스스로 “유낳괴(유튜브가 낳은 괴물)”이기 때문이라고 호탕하게 웃고, 샤이니의 키에게 칵테일 ‘블러디 메리(Bloody Mary)’를 만들어주다 오히려 그에게 만드는 법을 물어보고, 결국 키가 칵테일을 직접 만들게 하는 스스럼없는 태도는 토크의 긴장감을 낮춘다. 술을 마시는 토크쇼이면서도 스스로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고 밝히는 혜리의 태도가 곧 ‘혤’s club’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터놓고 별다른 주제 없이 편하게 대화한다. 키는 별다른 홍보에 대한 목적 없이 출연했다며 서로 돕고 살자는 말로 시작해 샤이니 데뷔 시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들을 편하게 말한다. 인스타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통해 갖는 Q&A나 TMI 토크는 ‘2024년 계획’처럼 누구나 할 법한 생각들을 소재로 게스트가 어떤 말이든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고, 혜리는 게스트의 말에 긴 말보다는 적절한 리액션으로 게스트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술을 마시며 진행하는 토크쇼들이 많아진 요즘, 홍보를 해야 할 일이 없어도 그리고 아이돌로 어느 정도의 연차가 된 이들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갈 공간이 하나 생겼다. 

‘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김복숭(작가): 삶의 어두움 사이를 퍼져 나가는 빛을 짧은 이야기들로 펴낸 앤드루 포터의 신작 ‘사라진 것들’. 항상 그랬듯 작가 앤드루 포터는 어둠 속에서도 삶이 광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유려하게 풀어냈다. 다만 그 광채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 속 삶의 표면을 떠돈다. 작가가 산문과 시 그 경계에서, 깊은 슬픔을 에둘러,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직관적인 소재를 통해 펼쳐 나가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한 단어의 짧은 제목들로 시작하는데, 마치 이야기를 읽으며 느끼게 될 반추의 과정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야기들은 다 다르지만 비슷한 설정과 관점을 공유한다. 청춘에서 중년 사이 나이대의 인물, 현실 감각을 갖고 살아가기 위한 내적 몸부림, 추억에 대한 희망 없는 집착…….

 

이 책에서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적은 페이지 수를 차지하는 ‘담배’라는 제목의 단편은,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메시지를 너무나 잘 포착하고 있다. 비록 이야기는 짧으나, 메시지는 명확하다. 과거를 그리워한다. 왜냐하면 빛낼 수 있었던 그 순간이 그립기 때문이다. 이는 단편의 다른 화자들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내적 고통이며, 비슷하게도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상대 그리고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등 돌려야 했다고 느낀 창조적 삶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작가의 다소 암울한 톤은 오히려 독자들이 이 책의 메시지를 아리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반추해보게 하는 길잡이로 만들어준다. 이 책은 길을 잃은 청춘에게는 앞으로 또 건너가야 할 하나의 큰 늪을 조금 먼 시선에서 바라보게 도와주는 언덕일 수 있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고 느끼는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이해심 많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바쁜 삶의 정점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묶어낸 이 책을, 2024년의 시작에 추천해본다.

NMIXX - ‘DASH’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을 주던 NMIXX의 음악이 드디어 지상에 안착한 느낌이다. 지난 음반부터 점차 이지리스닝을 염두에 둔 변화가 보였다면, 이번 곡 ‘DASH’는 펑크에 가까웠던 올드스쿨 힙합에 기대 듣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펑크 드럼 브레이크 비트와 묵직하게 춤추는 베이스라인이 곡 전체의 중심을 잡고 달린다. 도입부 3초가 이미 완벽하다. “Dash, I wanna dash, I wanna run it” 하는 릴리의 선창 뒤로 멤버 전체의 화성이 들어오고, 음가와 타격감이 동시에 들리는 뉴 잭 스윙 힙합의 대표 악기 오케스트라 힛이 청신경을 번쩍 놀래킨다. 후렴을 보컬 화성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건 레드벨벳이나 NCT 같은 팀에게서 자주 들리던 방식인데, NMIXX의 스타일로 들으니 그들 나름의 매력이 있다. 오케스트라 힛처럼 ‘음이 있는 타악기’ 느낌으로 쓰여 더욱 쫄깃하게 들린다. 역시 노래를 잘하는 팀이다. 

작곡진의 C’SA는 눈여겨볼 만한 신예다. 위키미키의 ‘Who Am I’나 프로미스나인의 ‘Attitude’, 루셈블의 ‘Sensitive’ 등 애시드한 표정의 딥하우스나 펑키 베이스 곡에 참여해왔다. 과거 신시아라는 이름으로 Mnet ‘아이돌학교’ 등에 출연하기도 했던 아이돌 연습생 출신 프로듀서다. 퍼프(Puff)와 스트롱 드래곤(Strong Dragon)의 편곡도 브라스 같은 악기를 앞으로 지나치게 튀어나오지 않게끔 조정한 세련미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