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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희성, 임수연(‘씨네21’ 기자), 김겨울(작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디즈니 플러스

‘아메리칸 본 차이니즈’ (디즈니플러스)

윤희성: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진(벤 왕)은 평범하게 유별한 소년이다. 그리고 부모의 모국어를 잘 알지 못할 정도로 미국인인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중국인으로 변별되는 외모를 가진 10대에게 세상은 대체로 가혹하다. 이런 소년에게 난데없이 히어로를 붙여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흔한 모험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메리칸 본 차이니즈’는 그 히어로의 자리에 손오공을 등장시키면서 이것이 그저 소심한 소년의 판타지가 아니라 또렷하게 아시아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중요한 챕터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손오공의 의미는 다만 그가 수없이 변주되면서 널리 알려진 캐릭터이다 보니 중요한 것만이 아니다. 진의 부모와 닮은 아시아인들은 강요 속에 성장해 타인의 눈을 끝없이 의식해야 하는 굴레에 익숙하고, 이들에게 무법자로 태어난 손오공의 존재는 동경에 앞서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존재다. 보통의 히어로가 꿈과 희망을 수호한다면, 손오공은 오히려 추상의 가치들을 붕괴시키면서 위대해진다. 심지어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손오공의 아들. “포기를 모르고 날뛰는” 손오공의 세계를 다시 배반해야 존립할 수 있는 유별하게 평범한 히어로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된 둘이 만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등을 밀어주는 존재는 왕년의 시트콤 배우 제이미(키 호이 콴)다. ‘아시아인’이라는 밈으로 등장한 그는 소년들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년들의 삶을 가장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배경으로 존재하던 그가 더 이상 세상이 편안해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받아들이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마련한 ‘에네르기파’의 순간이다. 입속의 거칠한 모래가 되더라도 ‘자신’이 되어서 존재하겠다는 그의 선택은 “여정에 나서는 누군가”가 히어로라는 그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관세음보살부터 각종 동양의 신비로운 소재를 모아서 쌓아올린 단상에서 힘껏 외치는 함성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구원할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아시아인조차 그럴 수 있다고. 당연한 소리라고? 그 당연한 이야기를 보기 위해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우림, 더 원더랜드’
임수연(‘씨네21’ 기자): 데뷔 25주년을 맞이한 밴드 자우림이 팬들과 함께 하는 앨범을 준비한다. 이른바 ‘떼창 오디션’의 지원자는 무려 660명, 최종 117명의 자몽(자우림 팬덤의 이름)이 자우림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신보의 코러스로 참여한다. 그리고 25년 기념 콘서트 준비에 들어간 자우림의 무대 아래 모습을 조명하며 25년 간 그들의 궤적을 되짚는다. ‘자우림, 더 원더랜드’는 25주년 기념 앨범 제작기를 중심으로 밴드로서의 자우림과 김윤아, 이선규, 김진만 개인의 진솔한 고백을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다. ‘매직 카펫 라이드’, ‘ Hey, Hey, Hey’, ‘17171771’, ‘팬이야’, ‘스물다섯, 스물하나’ 등 자우림의 대표곡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들의 음악 세계를 정리하고 팬과 아티스트 사이에서만 가능한 감정을 발견하는 특별한 순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정식 개봉을 앞두고 영화에 삽입된 공연 실황 오디오를 극장 환경에 맞추어 다시 믹싱했다.

‘사는 마음’ - 이다희

김겨울(작가): 누구나 저울질을 하며 살아간다. 이걸 사, 말아? 저울은 ‘산다’와 ‘참는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사야 할 이유와 사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루 걸러 하루씩 추가된다. 그렇게 고심하다 결국 사는 것, 그래서 쉽게 버릴 수 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는 것, 오랜 동안 내 곁을 지키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다희 저자가 이 반복되는 저울질의 과정과 결과를 차분히 써내려갔다. 목록에는 친숙한 품목들이 보인다. 책장, 찻잔, 트렌치코트, 책상, 건조기, 택배 상자, 책과 의자, 신발과 바지 그리고 만년필과 노트. 저자의 책은 아버지 고(故) 이윤기 작가가 남긴 책장에서 시작해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을 조심하게 되는 자동차에서 끝이 난다. 저자는 검소한 여성성이라는 신화에 갇혀 있었던 20대를 상징하는 웨딩드레스를 차곡차곡 접어 폐기하고, 항암 치료 때문에 샀던 가발의 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꺼내어 본다. 자신이 가진 만년필에서 타인의 시샘의 가능성을 반추하는 저자의 태도는 저자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짐작케 한다. 만년필을 쓰기에 적격이라는 ‘스마이슨’이라는 브랜드의 공책을 통해 부의 축적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세태를 돌아보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스마이슨’을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내가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라서일까. 소비로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에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라는 진리를 실감하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모조’ - 메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근본이 없다.’는 말은 한국 사람들이 자주 쓰는 자조 섞인 표현이다. 태어날 때부터 ‘빨리빨리’를 내재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건 어디든 조금씩 엉성하지만 그만큼 창의적이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음악을 한국인만 사랑하지 않게 된 지도 수년. 아니나 다를까, 그 얼기설기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거슬러 올라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유로 끊긴 음악적 맥을 잇는 시도는 21세기 한국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사조 가운데 하나였다.

 

‘모조’는 래퍼 메타.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노래다. 어떤 음악가든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첫 노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노래를 부른 사람 이름을 다시 보라고 권하겠다. 한국 힙합을 아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일명 ‘국힙’ 1세대를 대표하는 그룹 가리온의 멤버 MC메타의 솔로 데뷔작이 바로 ‘모조’다. 더욱 놀라운 건 이 곡의 탄생 뒤에 숨은 이름들이다. 1990년대 말 서울 홍대 앞에 위치한 전설의 클럽 ‘마스터플랜(Masterplan)’에서 함께 음악을 시작했던 한국 테크노 1세대 트랜지스터 헤드(Transistor head)가 프로듀싱을, 역시 동시대 활약한 록 밴드 노이즈가든(Noizegarden)의 멤버이자 지금은 밴드 로다운 30(Lowdown 30)를 이끌고 있는 기타리스트 윤병주가 제작을 맡았다. 옛 전우들이 재미 삼아 뭉친 거 아니냐고? 세월만큼의 무게가 그대로 내려앉은 비트와 래핑, 가사를 집중해 듣고 있다 보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트랙이 곧 발매될 메타.의 첫 솔로 앨범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란 걸 알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한국 대중음악의 지워진 맥을 채우러, 그들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