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는 지금의 자신을 “물음표”라고 했다. 그는 연일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는 삶에 때로는 쉼표를, 때로는 느낌표를 더하며 매일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삶의 어느 단락에서 변화를 체감하고, 숨 쉴 구석을 만들고, 다시금 나아갈 동력을 얻으면서.
지난 연말 ‘MAMA 어워즈’ 오프닝 퍼포먼스에서 솔로 무대를 선보였어요.
홍은채: 도쿄 돔이라는 공연장이 엄청 크고, 많은 아티스트분들이 지켜보고 계셔서 진짜 잘하고 싶었어요. 처음에 긴장하더라도 금세 무대에 몰입하는 편인데, 그때는 기술적인 부분이 많다 보니 유독 긴장을 많이 했어요. 불도 쓰고, 옷도 찢고, 책상도 넘어가야 하고, 뒤로 떨어지고, 치마는 밟히지 않게 멀리 던져야 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머리로 춤추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순식간에 지나가서 어후,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요.(웃음) 생방송 때 포그가 많이 깔려서 종이가 잘 안 탔거든요. 망했다고 속상해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언니들이 달려오는 거예요. 든든하다고 해야 할지,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오프닝 퍼포먼스의 주제가 ‘I AM SPECIAL’이었죠.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라는 내레이션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무대였어요.
홍은채: 내레이션 그대로 저는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언니들은 다 각자의 서사가 있잖아요. 발레를 15년 하다가 K-팝을 시작하고, 세 번 데뷔하고, 두 번 데뷔하고, 연습생을 하다 미국에 갔는데 다시 돌아오고. 저희 팀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룹인데 저는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다가 오디션을 보고 데뷔하게 된 케이스다 보니, 곡을 받고 가사를 쓸 때마다 제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이 무대를 통해 제가 가진 고민 그 자체를 내레이션으로,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게 감사했고 해방감도 느껴졌어요.
‘Swan Song’의 “수많은 날 수많은 밤 수많은 눈물 때론 나 초조하곤 해”라는 가사처럼 고민이 계속 됐었나 봐요.
홍은채: 르세라핌으로 데뷔하게 됐을 때 “너는 운이 진짜 좋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스스로도 제가 왜 르세라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요. 그래서 말씀하신 그 파트가 딱 제 모습 같더라고요. 저는 저한테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는 왜 이런 기회가 주어졌는지 저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컸거든요.
작년 3월 TVING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에서 은채 씨의 데뷔를 두고 운이 좋다고 말하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사쿠라 씨가 이렇게 말했죠. “우리 다 운 좋아. 운이 없으면 여기 없어. 운도 실력이야.”
홍은채: 예전에는 저 스스로도 마냥 ‘내가 운이 정말 좋구나.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고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달라요. ‘진짜 열심히 하면 언젠가 나에게 기회가 오는구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기회가 왔을 테고, 그 기회를 잡는 것도 결국 실력이지 않을까.’ 활동을 하면서 그때의 저에게 왜 그런 기회가 왔는지 알게 되면서 예전보다 부담은 덜하지만, 그만큼 또 다른 고민들이 생기더라고요.
어떤 고민이 있나요?
홍은채: ‘내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할까? 나는 뭘 잘하고 좋아하는 걸까?’ 같은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해요. 아마 연예인을 하는 동안은 계속 가져가야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가끔은 ‘내가 무얼 위해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다음엔 뭘 하고 싶을까.’ 이런 생각들이 한 번에 훅 밀려오기도 해요. 솔직히 정말 힘들 때도 있고,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당장은 찾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냥 ‘해야지. 나중에 다 나한테 도움될 일들이다.’ 하고 넘겨요.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완벽한 확신도 없어요. 없는데, 일단은 그냥 가는 것 같아요. 가봐야 이게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러다 에너지가 소진되기도 할 텐데, 어떻게 다시 충전하나요?
홍은채: ‘KBS 연예대상’에서 디지털 콘텐츠상, 베스트 커플상을 받은 것처럼 좋은 결과들이 있을 때요. 결과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웃음) 어쩔 수 없이 좋은 결과가 눈앞에 보이면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고 보람도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스케줄을 하면서 상을 받은 거니까 ‘그래도 열심히 잘했구나.’ 싶고 보답받은 것 같아서 뿌듯했어요.
성취감이 동력이 되는 거네요. KBS ‘뮤직뱅크’ MC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됐어요.
홍은채: 아직도 인터뷰를 하면서 질문을 한 다음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게 어색하고 어려워요.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웃음) 질문도 많이 해보고 여러 답변을 받아보는 과정에서 많이 늘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앞에 나서서 대표로 말하는 걸 좋아했는데 연습생을 시작하고는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MC를 하면서 원래 좋아했던 걸 다시 찾은 느낌이에요.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자리이기도 하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고 있어요.
‘은채의 스타일기’에 출연한 류진 씨가 은채 씨를 보며 “스케줄이 많고 힘들 텐데도 늘 웃는 모습이 많이 보여서 참 멋진 친구”라고 느꼈다고 하시더라고요.
홍은채: 평소에는 숫기도 없고 조용하고 웃음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은데요. 예전에는 진짜 활발했는데, 연습생 때부터 친구도 조금만 두게 되고 연습 외 시간에는 에너지를 아끼려고 하면서 바뀐 성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거든요. 뭔가 신기해요. 어떻게 보이려고 제가 아등바등 노력하는 건 아닌데 기분 좋은 에너지가 있다고 많이들 말씀해주시니까 그게 원래 제 모습인 건가 싶기도 하고, 일할 때는 당연하게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일을 하면서 상황에 맞는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 아닐까요? 사쿠라 씨도 위버스 라이브에서 요즘 은채 씨가 “현실적으로 좀 바뀐 느낌”이라고 말씀하시던데요.
홍은채: 일을 너무 잘하는데 성격이 별로인 사람이랑 너무너무 착하고 열심히 하는데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을 고를 것 같아요. MBTI로 말하면 인간관계로서는 ‘F’인데, 일적으로는 완전 ‘T’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원래는 회피형이었거든요. 힘든 건 진짜 하기 싫어하고 미루는 성격이었는데 요새는 그냥 받아들이고 힘든 것도 먼저 하려고 해요. 그게 편하더라고요.
‘2024 시즌 그리팅 메이킹 비디오’에서 홍은채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물음표”라고 답했어요.
홍은채: 저에 대한 고민은 365일 내내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저를 모르잖아요. 남들이 “너는 어떤 사람 같고, 너는 어떻고.” 이렇게 얘기해주지만, 저는 저를 볼 수 없으니까요. 나는 어떤 성격이고, 어떤 걸 할 때 제일 좋고, 행복한 건지 늘 궁금해요.
작년 8월 서울 콘서트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모든 모습을 사랑한다는 게 어렵다.”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요?
홍은채: 저는 저한테 되게 엄격한 편이거든요. 욕심도 많고 자기만족을 잘 못하는 성격이어서 돌이켜보면 진짜 잘했다 싶은 무대도 없고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아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고요. 그래서 나는 그냥 욕심이 많고, 스스로 만족을 잘 못하고, 나한테 관대하지 않은 사람인 걸 받아들이려고 해요.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인가 보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지.’(웃음)
진짜 잘했다 싶은 무대가 정말 하나도 없어요?
홍은채: 어떤 무대든 아쉬운 점이 없진 않죠. 진짜 만족할 만한 무대도 조금씩은 아쉬운 부분이 항상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웃음)
‘Perfect Night’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때도 있지만, 모든 결과들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데도 어떻게 계속해서 더 노력할 수 있나요?
홍은채: ‘Perfect Night’이 이렇게까지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콘서트를 하는 와중에 연습도 진짜 열심히 하고, 영어 노래다 보니 녹음도 신경 써서 했고, 앨범 하나를 만드는 것처럼 똑같이 해서 얻은 결과라 보람도 컸어요. 사실 그런 좋은 결과들이 올 때마다 그 순간은 너무 좋은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이어서 새로운 걸 준비하다 보면 그게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올 때도 있어요. 매번 이렇게 증명해야 한다는 게요.
그런 부담은 어떻게 감당해요?
홍은채: 아이돌이라는 일이 모든 걸 같이 하는 멤버들이 아니면 그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잘. 누군가에게는 제 고민이 자랑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혼자 고민하다가 잊혀지는 경우도 많아요. 가끔 멤버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시간을 가질 때 훌훌 털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음악으로 저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하니까 괜찮아요.
정말 쉬운 게 하나 없네요.
홍은채: 말 그대로 저희는 하이브에서 나온 팀이고, 좋은 환경에서, 좋은 스태프분들과 일하고 있으니까 진짜 잘돼야 할 것 같아서 때로는 그게 버겁기도 해요. 사람들은 완성된 것만 보니까 결과가 안 좋으면 죄책감이 들 것 같고, 따라가기 벅찰 때도 있고요. 그래서 이번 ‘EASY’에 담긴 메시지가 확신도 들고 제일 애정이 많이 가요.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라서요. 저희 팀이 열심히 한 거에 비해 결과가 안 따라줄 때도 많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땐 슬프기도 하고, 좌절도 하는데, 요즘은 ‘나중에 진짜 잘되면 더 멋있겠다. 처음부터 잘되면 재미없으니까!’ 이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 같아요.(웃음)
그런 쿨함이 ‘EASY’라는 곡이 가진 애티튜드 아닐까 싶어요.
홍은채: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되게 여유롭고, 진짜로 노는 느낌을 내는 게 어려웠어요. 보컬적으로 특히 고민이 많았는데, 음역대가 높지도 않고 지르는 것도 아니고 처음으로 약간 랩하듯이 불러봤거든요. 이번에 얼음 공주처럼 차갑게 불러달라는 디렉션을 많이 받았어요.(웃음) 평소 제 성격이랑은 많이 다른 느낌이라 녹음하면서도 너무 어색한 거예요. 최대한 무심하게 부르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바뀐 춤과 보컬 스타일이 잘 보일 수 있다면 좋겠어요.
퍼포먼스 스타일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홍은채: 동작들이 몰아치는 퍼포먼스는 그 흐름대로 힘들면 힘든 티를 내도 되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저희끼리 합을 맞추면 된다거나 힘을 줘야 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있는 춤이 아니라서요. 연습생 때 힙합 수업을 제일 많이 들었어서 장르 자체에 접근하는 건 괜찮았는데,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힘을 조금은 풀어줘야 한다는 게, 막상 부딪혀 보니까 진짜 어려웠어요. 연습생 때부터 제 춤에 대해 항상 들어왔던 말이 깔끔하다는 건데, 이게 장점이지만 때론 단점이 되기도 하거든요.
‘은행장’으로서 여러 댄스 챌린지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때는 깔끔한 스타일이 장점이 되는 것 같아요. ‘더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에서 선보인 ‘Smoke (Prod. Dynamicduo, Padi)’는 특히 인상적이었고요.
홍은채: ‘Smoke (Prod. Dynamicduo, Padi)’를 선택한 순간부터 되게 두려웠어요. 챌린지를 하면서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진짜 잘 춰야 멋있는 춤인데, 시간이 안나서 하루 전에 연습을 하고 갔던 지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에 비해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웃음) 안무는 챌린지를 위해 따거나 ‘은채의 스타일기’ 게스트분들이 나오시면 일부러 찾아보기도 하지만, 각 음악 방송마다 다른 재미가 있으니까 평소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다 보면 포인트 안무 정도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더라고요.
지난 1월 1일 위버스에 남긴 글에서 “새로운 시작이 설레는 것도 좋지만 저는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겠다고 쓴 게 기억나요.
홍은채: 아이돌이라는 게 보여지는 직업이잖아요. 올해 저를 새롭게 알게 되는 분들도 많을 테니까 ‘잘해야겠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책임감이 생길 때도 있지만, 저는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스스로 ‘책임감, 가져!’ 이렇게 주입해요.(웃음)
‘We got so much’의 가사가 떠오르네요. “당연하게 받지 않을래”.
홍은채: 예전에는 진짜 한 명이라도 저한테 관심 없어 보이면 속상해하곤 했는데,(웃음) 활동하면서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멤버들도, 팬분들도 어떻게 보면 남이잖아요. 그럼에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이 사랑을 돌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있어요. 모두에게 사랑받아야한다는 부담은 조금 내려놓게 된 것 같고요.
작년 홀리데이 기념 위버스 라이브에서 2024년 소망에 대해 묻자 “상상할 수 없어. 나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다 받아들이고 그렇게 즐길래.”라고 말씀하신 게 생각나요.
홍은채: 내가 하게 될 운명이면 뭐든 할 테고 못할 운명이면 못하는 것도 있겠다 싶어서,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왜냐면 저는 작고 사소한 것들에는 다 운명이 있다고 믿거든요. 예를 들어 초콜릿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카페에 갔는데 그게 다 팔렸다고 하면 ‘아, 나는 오늘 이걸 먹을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해요.(웃음) 그런데 또 큰 일들은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데뷔하고, 뽑히고, 간절히 바란 것들이 이루어지고, 이런 건 진짜 다 노력이라고 믿어요.
노력으로 이룬 모든 것들이 운명이었다고 하면 좀 억울할 것 같아요.
홍은채: 그래서 저는 안 믿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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