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은 내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이겨내도록 도와줬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영국에서 인턴십을 마친 뒤 고향인 독일로 돌아온 아니카(Annika)는 팬데믹 이후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내 세계가 방 하나만큼의 크기로 줄어들어버렸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식료품을 살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고위험군에 속한 가족들과도 최대한 거리를 둬야 했다. “상념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일에만 몰두하려고 애썼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던 아니카는 방탄소년단이 전한 메시지, ‘LOVE YOURSELF’를 떠올리며 고민과 걱정들을 외면하는 대신 내면을 마주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콘텐츠 감상, 팬 아트 등 취미를 공유했고 아미 기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가사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아미로서 방탄소년단을 콘텐츠를 즐기는 일에 대해 “마치 나와 같이 기뻐하고 때론 슬퍼해주는 따뜻한 포옹과 같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새로운 누군가를 위해 공간을 마련한다고 너의 공간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의 세계가 더 커졌을 뿐.”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팬인 모아 아테나(Athena)의 말처럼, 누군가의 팬인 이에게 아티스트와 팬, 팬과 팬을 이어주는 활동은 팬데믹 시기에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이나 물리적 단절을 해소시켜주는 창을 넘어 세계를 확장시키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아테나는 해외 모아들이 볼 수 있도록 아티스트의 모든 활동을 팬 계정에 아카이빙하고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팬 활동은 그에게 전 세계의 소중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K-팝을 즐겼던 단짝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1년 동안 K-팝을 듣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Introduction Film’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 아테나는 당시를 “꼭 그 친구가 ‘이제 다시 행복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현재 온라인 기부 캠페인을 벌이거나 커뮤니케이션 소프트웨어 디스코드(DISCORD)로 리스닝 파티를 개최하는 등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다른 팬들과 함께 추억을 쌓고 있다. 여자친구의 안대 안무 영상을 계기로 팬이 된 버디 에스라(Esra)는 작년부터 버디들이 공동 작업을 통해 여자친구의 곡을 커버하는 ‘뮤지션 버디 컬래버레이션(Musician Buddy Collaboration)’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버디들은 악기 연주, 노래 등 각자의 장기를 살리고, 이를 취합해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최근 버디 5주년을 기념하며 발표한 자작곡 ‘Safe Haven’은 유튜브 조회수 4만 회을 넘기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에스라는 이에 대해 “14명의 버디들이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줘 고맙다는 메시지들을 받았다. 온라인으로 화면 뒤에서 많은 버디들이 노력해 이뤄낸 놀라운 성취였다.”라고 설명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내어 영상을 만드는 일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유튜브 채널 ‘안구정화TV’를 운영하는 앙구(Angoo)는 “태어나 처음 해보는 나만의 팬 활동을 기록하고 전 세계 팬들과 공유”하기 위해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방탄소년단의 콘서트 ‘LOVE YOURSELF IN SEOUL’ 티케팅 후기 영상을 시작으로 ‘Boy With Luv 오르골 만들기’, ‘콘서트 브이로그’ 등을 꾸준히 게재해온 그는 지금 전 세계 132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크리에이터다.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만들다 보니 전 세계 아미들과 친구가 됐고, 여러 구독자들에게 ‘덕분에 한국을 더 잘 알게 됐다’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팬 활동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씩 더 알아가는 기분이 든다. 나중에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지금의 팬 활동이 미래의 나를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경험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 이후 콘서트장에는 갈 수 없게 됐지만, 앙구는 1년 뒤 있을 콘서트 준비물을 미리 싸 두거나 자신의 방에 ‘방탄소년단 덕질존’을 만드는 등의 콘텐츠를 통해 지금 할 수 있는,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방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이어간다.
팬데믹 이후 그 역할이 커지고 있는 온라인 기반의 팬 문화가 오프라인의 팬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존하지 못하는 ‘가상’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팬데믹 시기의 팬 문화를 이루는 이들에게 당장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오프라인 세계를 비슷하게 재현하기보다 온라인의 ‘만날 수 있는 세계’를 어떻게 구축하느냐로 이어졌다. 팬들이 발 딛고 선 방의 크기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는 무한에 가까울 만큼 늘어난다. ‘아미 매거진(ARMY Magazine)’은 방탄소년단의 음악, 활동, 성과 등을 다룬 웹진을 분기별로 발행하고 주간 블로그를 통해 6개 언어(영어,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관련 소식을 공유하는 비영리단체다. 많게는 110명 내외의 아미들이 운영부터 자료 조사, 디자인, 번역, 홍보까지 발행에 필요한 각자의 재능을 기부한다. 가족 중 한 명을 떠나 보내며 힘든 시간을 보낸 리(Lee)는 ‘아미 매거진’ 운영진으로 참여하며 국적이나 언어의 장벽 너머로 “우리가 여전히 연결돼 있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사인은 코로나19가 아니었지만, 방역 수칙과 록다운 지침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할 경험이었다.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큰 위로가 돼줬다.” 그에게 아미는 “이 무거운 나날들 속에서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도 같다.

팬 활동으로써 행하는 자신과 세상을 위한 기여는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위한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세븐틴의 팬 캐럿으로서 ‘인도네시안 캐럿' 팬 베이스를 운영 중인 미타(Mita)와 아누르(Ainur)는 최근 홍수, 산사태 등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자연재해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다른 캐럿들과 함께 모금 활동을 벌였다. 세븐틴이 주거 빈곤 아동 지원, 청소년 학습 공간 보장을 위한 세븐틴 드림센터 건립 등 사회공헌 활동을 펼쳤고, 캐럿들이 그들의 선한 영향력에 동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세븐틴은 내가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그들과 함께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나(Ana)는 전 세계 아미들의 소액 기부 단체인 ‘OIAA(One In An Army)’의 일원으로, 재난 구호부터 소수민족의 권리 보장까지 다양한 분야의 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OIAA는 최근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의수가 필요한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 ‘LN4 Hand Project’를 위한 기부액 5만8,310달러(한화로 약 6,600만 원) 모금에 성공했다. 아나는 “아미의 기부액이 어떻게 쓰였는지 적힌 보고서나 협업 단체가 보내온 영상과 사진을 통해 아이들이 장학금을 받았고 가족들의 삶이 재건됐고 난민들이 권리를 보장받게 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존엄하고 사랑받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설명했다. 스스로 불러온 변화를 체감했기에, 더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은 확신이 된다. 물론 그는 기부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조금씩 각자 주변의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또한 알고 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나스(Nas)가 한국어 공부에 이용하고 있는 ‘방탄 아카데미(Bangtan Academy)’는 자연스럽게 모인 팬 활동의 일상이 어떻게 다함께 세상에 이바지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방탄 아카데미는 실시간 채팅방을 통한 일종의 온라인 스터디 그룹으로 위버스에 게재된 ‘Learn! KOREAN with BTS’ 영상을 함께 공부하는 소규모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Go Billy! Korean’, ‘Learn Korean in Korean’, ‘Talk To Me In Korean’ 등의 외부 학습 콘텐츠를 포함한 총 7개의 교육 과정에 850여 명의 회원들이 모인 어학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전문 번역가, 한국어 원어민을 포함해 숙련도 3급 이상을 달성한 회원 40여 명이 모인 ‘선배’ 그룹이 독학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아미들을 돕는다. 모든 팬덤이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기 위해 모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팬덤이라는 정체성에서 시작된 커뮤니티는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마시(Marcie)는 지난해 7월 아미 중에서도 교사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매우 떠들썩한 한 해를 보낸 팬데믹 기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팬 계정을 통해 전 세계의 교사들은 갑작스럽게 온라인 중심으로 변화한 환경에서 서로의 교육법을 공유하고 때론 고충을 위로한다. 그는 “전 세계 교사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시키며 성장하는 모습은 놀라웠다.”라며 “방탄소년단의 예술성과 음악이 없었다면 아미 내부에서의 단단한 연결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미들의 트위터 활동을 시각화해 ‘퍼플 트윗 맵(the purple twt map)’을 제작한 니콜(Nicole)은 “많은 아미들이 ‘세계 곳곳에서 반짝이는 보랏빛처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라고 전했다. 니콜은 “‘BE’ 발매 당시는 코로나19 발생 이후였음에도, 퍼플 트윗 맵이 ‘MAP OF THE SOUL : 7’ 때와 다름없이 밝게 빛났다. 방탄소년단은 산업 전반이 침체된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아미 또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방탄소년단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니콜은 최근 소수자와 아시아계 청년들을 위한 비영리단체에서 방탄소년단 관련 강좌를 포함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그는 “과거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 스스로 거리를 뒀지만, 방탄소년단을 통해 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라며 “더 많은 젊은이들이 방탄소년단처럼 삶을 어루만지고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방 안에 머물러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마음껏 안을 수 없고 선뜻 방 밖으로 나가기도 어렵다. 그러나 팬덤에게 아티스트와 팬 활동은 방 안에서도 광활한 세상을 유영하고 비행할 수 있도록 한다.
지난해 10월 열린 방탄소년단의 온라인 콘서트 ‘MAP OF THE SOUL ON:E’에서 멤버 지민은 스크린으로 등장한 아미들 앞에서 직접 만나지 못해 슬픈 마음을 밝히면서도 “여러분들은 진짜 화면 너머로도 저희한테 희망이나 이런 것들을 다 보내주신 것 같고, 다 전달이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아티스트가 끊임없이 춤추고 노래하며 시대에 위로를 전하듯, 팬들 역시 벽 너머로 아티스트에게, 또 다른 팬에게, 나아가 세상을 향해 소통하면서 현재를 견디고 있다. 그들 각각의 이야기는 팬들의 수만큼 서로 다르지만, 모두의 이야기는 같은 곳으로 흐른다.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진 세계에 대한 희망. 지금 세계의 모든 팬들이 방 안에서 만든 그의,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언젠가 방 문이 활짝 열릴 때를 기다리고 있다.
글. 임현경
디자인. 김잼(instagram @_kim_jam)
비주얼 디렉터. 전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