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not the end’. 블랙핑크 리사의 유튜브 채널 리리필름(Liliflim)의 첫 코레오그래피 영상 ‘LILI’s FILM #1’의 배경에 있었던 네온사인의 문구다. 비록 연출된 곳이지만, 리사는 한정된 공간인 연습실에서 팔 동작과 골반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만으로 임팩트를 남기는 춤을 보여줬다. ‘LILI’s FILM #2’의 배경은 야외 옥상으로 바뀌었고, ‘LILI’s FILM #3’에서는 리사가 팔과 다리를 넓은 보폭으로 사용하는 재지한 춤을 보여주고도 남을 만큼 넓은 스튜디오가 배경이 됐다. 넓어지는 공간만큼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폭도 다양해졌다. 가장 최근인 2021년 2월 업로드된 ‘LILI’s FILM [The Movie]’는 스토리텔링 속에서 여러 개의 세트장을 오가는 필름 형식을 취한다. 이 영상에서 리사는 헐렁한 정장을 입은 채 비보잉 댄스를 선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몸에 달라붙는 레더 의상으로 팔다리의 사용을 강조하는 춤도 추면서 상반되는 캐릭터를 한눈에 보여준다. ‘This is not the end’라는 첫 선언 그대로, ‘리리필름’은 아티스트이자 퍼포머로서의 리사가 조금씩 보폭을 넓혀온 기록이다.
춤은 순간의 예술이다. ‘리리필름’은 이 순간의 예술을 어떻게 기록하고 작품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LILI’s FILM #3’의 배경에는 약간의 푸른색 조명을 제외하면 어떤 미장센도 없다. 리사는 이 영상에서 몸에 달라붙는 의상과 레더 부츠를 착용했다. 안무는 ‘리리필름’의 다른 안무들에 비해 느린 속도로 박자를 끊으면서 몸의 선을 최대한 부드럽게 이어가고, 뒷모습이나 다리의 선 그 자체를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신체를 강조하는 안무의 의도에 맞춰 의상과 배경도 최소화됐다. 반면 ‘LILI’s FILM #4’에서의 리사는 두건을 쓰고 허리와 골반을 가리는 천이 달린 헐렁한 바지를 착용한다. 신체의 선을 강조했던 ‘LILI’s FILM #3’의 의상과 달리, ‘LILI’s FILM #4’에서 리사의 복장은 하체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그의 몸을 온전히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영상의 첫 장면에서 리사는 중장비 위에 앉아 강하게 몸을 튕긴다. 카메라는 리사와 안무가 체셔 하(Cheshir Ha)를 별도로 비추며 이들이 영상의 주인공임을 암시하고, 이외의 댄서들은 이들을 양쪽에서 서포트한다. 특히 리사는 체셔 하와 함께 커플링 댄스를 선보일 때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짓고, 발차기를 강하게 하거나 팔 근육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에너지를 강조하는 동작들을 보여준다. 이처럼 ‘리리필름’은 연출의 의도에 따라 의상과 미장센을 달리하고, 그에 맞춰 리사의 춤이 보여주는 무드도 달라진다. 그 안에서 리사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사회적인 고정관념, 사회가 규정한 젠더 역할에서 벗어나 리사가 각각의 영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퍼포먼스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 또는 방향으로서의 맥락을 갖는다.

‘LILI’s FILM #3’와 ‘LILI’s FILM #4’에서 각각 보여주던 상반된 무드는 ‘LILI’s FILM [The Movie]’에서 하나가 된다. 춤추기에 편한 헐렁한 정장을 입고 철조망 앞에서 비보잉 댄스를 연상시키는 강한 동작들을 선보일 때의 리사는 카드 게임에서 승리하는 갬블러고, 타이트한 레더 의상을 착용한 채 손으로 뒷모습을 쓸어 올리거나 옆으로 누워 골반을 튕기는 퍼포먼스들을 소화하는 모습은 비밀을 품은 스파이를 연상시킨다. 이때 리사의 표정은 일관되게 크게 애쓰지 않는 태도를 유지한다. 또한 신체적 특징을 부각시키던 ‘LILI’s FILM #3’에 비해, ‘LILI’s FILM [The Movie]’에서 리사가 골반을 쓸어 올리거나 앉아서 다리를 양쪽으로 넓게 펼치는 동작들은 그가 방독면에 몰래 독을 넣거나 카드를 바꿔치기하는 등의 전략으로 살아남는다는 스토리의 반전을 표현하는 장치에 가깝다. ‘I do what you doin, boy.’ ‘LILI’s FILM [The Movie]’의 배경음악인 데스티니 로저스(Destiny Rogers)의 ‘Tomboy’ 가사가 리사의 퍼포먼스와 겹쳐지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리사의 의도와 별개로, 리사의 퍼포먼스는 남성성 또는 여성성 같은 고정관념을 넘어 ‘리사’ 그 자신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는 춤으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고 연출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리사는, 자신의 무대를 스스로 만드는 주인공이다.
리사는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LILI’s FILM [The Movie]’의 제작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무가인 체셔 하 선생님과 곡 선택 단계부터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러던 중 기존의 댄스 영상과 다르게 아예 이야기가 있는 안무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카드 게임에서 승리하는 갬블러 또는 모두가 쓰는 방독면에 독을 넣어 홀로 연기 속에서 생존하는 여성. 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리사를 바라보는 여성들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최근에서야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선악에 관계없이 힘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체험하고 있다. ‘LILI’s FILM [The Movie]’를 커버한 댄스 팀의 안무들이 대부분 방독면이나 카드 게임, 의상, 리사의 표정 연기까지도 차용한다는 점은 이 영상이 가진 의의를 보여준다. 여성이 스스로의 몸과 이를 둘러싼 연출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의 주체가 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 자아의 기록을 통해 타인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는 행위를 예술이라 정의한다면, ‘리리필름’은 순간의 불꽃인 춤이 기록되고 전달되면서 여성들에게, 더 나아가 사회에 새로운 의미의 불길을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4세에 오디션에 합격해 K-팝 산업에 몸을 담게 된 태국 출신의 여성. 그가 K-팝 정상의 인기 그룹 블랙핑크의 멤버가 되고, 에디 슬리먼이 직접 선정한 셀린의 글로벌 앰배서더로서 활동하고, 구독자 약 816만 명(2021년 9월 8일 기준)의 채널을 운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장 서사다. 그러나 여성 아티스트가 K-팝 산업 속에서 안무가 및 연출가와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자신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코레오그래피 필름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이를 통해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일이다. 예술 그 자체보다는 상업 예술이라는 인식이 있던 K-팝 산업 속에서 아티스트의 의지 자체만으로 완성도 높은 코레오그래피가 만들어졌다. 그 속에서 여성 아티스트가 자신의 몸, 더 나아가 스스로의 춤이 갖는 맥락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표현하는 결과물이 나왔다.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댄서 혹은 인기 대중 가수라는 규정을 넘어 아티스트로서의 리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프리즘이 필요한 이유다.
‘LALISA’. 리사가 처음으로 발표하는 솔로 싱글 제목이다. YG 엔터테인먼트 측은 이번 싱글 ‘LALISA’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름이 가진 힘과 당당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오롯이 자신 그 자체를 보여주며 자신에게 ‘이름이 가진 힘’을 부여해온 것은 리사가 ‘리리필름’을 통해 해왔던 일이다.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아티스트로서 연기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아우라를 갖게 되는 것. 그 사이에는 연습실에서 시작된 1분 12초의 짧은 영상이 스토리텔링을 갖춘 ‘LILI’s FILM [The Movie]’가 되기까지 아티스트로서 리사가 남긴 기록들이 있다. ‘LALISA’의 비주얼 티저 영상에서 리사는 벼락이 치는 캄캄한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존재감만으로도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는, 마치 신화 속 신을 연상시키는 아티스트의 모습이다. 리사의 시간이다. 이전까지 그가 키워온 불꽃들이 피어날.
글. 김리은
사진 출처. YG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