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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VMC (Vismajor Company)

오늘날 한국 힙합 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여성 래퍼의 증가다. 불과 수년 전까지도 무조건반사처럼 윤미래가 유일무이한 여성 래퍼처럼 거론되던 걸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윤미래의 데뷔가 1990년대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과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크다. 분명히 당장 떠오르는 래퍼들은 많아졌는데, 잘하는 래퍼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여기서 ‘잘한다.’ 안에는 몇 가지 요건이 포함된다. 비단 플로우로 대표되는 랩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작사 실력까지 겸비해야 한다. ‘잘하는’을 ‘인정받는’으로 바꾸면 기준은 더욱 엄격해진다. 커리어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수작 이상으로 회자하는 앨범 단위의 결과물을 보유해야 한다. 물론 잘하고 인정받는 래퍼의 조건을 문서화해놓은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동안 흘러온 힙합 역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정립된 요건이라고 해두자.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여성 래퍼 중 잘하는 걸 넘어 인정받는 래퍼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이를 소개한다.

 

신스(SINCE). 그는 랩을 탁월하게 뱉을 줄 알고, 가사를 쓰는 데 추후 리리시스트(Lyricist)란 칭호를 기대해봐도 좋을 만한 재능을 지녔다. 과장이 아니다. 만약 그의 존재를 몰랐거나 이번 ‘쇼미더머니 10’을 통해 처음 접했다면, 7월에 나온 정규 데뷔 앨범 “SINCE 16’’부터 들어보시라. 한국 힙합 베테랑 딥플로우(Deepflow)가 이끄는 VMC의 앨범 큐레이션 프로젝트(‘보일링 포인트’)를 거쳐서 완성된 앨범이다.

여느 래퍼들이 니키 미나즈(Nicki Minaj), 카디 비(Cardi B), 메건 디 스탤리언(Megan Thee Stallion) 등의 스타일을 베끼거나 진부한 자기과시, 혹은 엉성한 섹슈얼 콘셉트에 집착할 때 신스는 탄탄하게 자기서사를 쌓는 데 집중했다. 앨범엔 그가 음악을 처음 시작한 2016년부터 커리어를 이어오며 든 생각이나 겪은 일이 고스란히 담겼다. 원래 대학교에서 행정학과를 전공하고 공무원 준비를 했지만, 도저히 끊지 못한 힙합은 그를 인생의 정반대 지점으로 데려다 놨다. 평범하며 안정이 보장된 삶이 아닌 앞날이 온통 불투명한 삶이었다. 딸만큼은 고생하지 않길 바랐던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래퍼가 되길 포기하면 후회가 밀려올 것만 같았다. 결국 신스는 꿈을 위해 집을 나온다.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위로 가겠다고.

 

이상의 과거가 담긴 ‘Interlude’란 곡만 들어봐도 그의 장기는 자명하다. 랩과 노래의 경계를 능숙하게 넘나든다. 한국에서도 귀에 밟힐 만큼 흔한 싱잉랩이지만, 오토튠을 거친 뻔한 변조나 일종의 정형화된 플로우 따윈 없다. 올해의 베스트 랩 송 중 하나인 ‘봄비’에서 이 같은 장점은 더욱 도드라진다. 꿈을 좇아 입성한 낯선 도시에서의 적적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래퍼로서의 성공을 향한 욕망이 가랑비처럼 떨어지는 싱잉랩을 타고 뒤섞이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가 하면 앨범의 다른 곡들과 ‘쇼미더머니 10’ 경연곡이었던 ‘UP해 (Feat. 박재범, 우원재) (Prod. 코드 쿤스트)’ 등에서는 예의 날카롭게 치고 나가는 타이트한 래핑을 들을 수 있다. 보통 랩 스킬이 좋기로 정평 난 래퍼들은 한마디 안에 집어넣을 단어의 수와 라임의 위치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탁월한 그루브를 형성해낸다. 신스 역시 이 부분에서의 기본기가 탄탄하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그의 랩 실력은 여성 래퍼 중 최상위군에 속한다. 서사를 구축하는 능력까지 따진다면, 경쟁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혹자는 왜 굳이 젠더를 나누어 평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예술 분야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루어진 (주로 여성에게) 차별적인 젠더 구분을 타파해 가는 건 오늘날 세계적 흐름이다. 그럼에도 힙합에서 ‘여성 래퍼(Female MC)’란 호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힙합이 그 어떤 장르보다 마초적 세계관을 토대로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종종 성적 대상화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척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 래퍼’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 힙합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자 현재진행형인 주요 서브 장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여성 래퍼들은 자부심을 담아 ‘여성 래퍼’란 정체성을 내세우고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노력 중이다. 여기엔 남성 래퍼들보다 여전히 조명이 덜 비치는 현실도 한몫한다.

 

여성 래퍼들에 대한 조명이 부족한 건 한국 힙합 씬도 비슷하다. 다만, 그동안 여성 래퍼들의 실력과 앨범 커리어가 한참 부족했다는 점에서 국외의 상황과는 온도차가 있다. 과거 ‘언프리티 랩스타’나 ‘쇼미더머니’를 통해 유명해진 여성 래퍼 대부분이 이렇다 할 만한 음악 커리어를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스의 존재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에게서는 걸작을 만들고 랩으로 일가를 이루어보려는 욕심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의 착한 욕심이 금방 사그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