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김준수에게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 뮤지컬 배우로서 쌓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내린 하나의 결론처럼 보인다. 그동안 이 배우는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나 ‘엘리자벳’에서 죽음을 형상화한 토드,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데스노트’의 L과 같은, 인간 중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갖춘 천재나 인간이 아닌 인물,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이러한 작품들 안에는 힘을 가진 이의 환희와 함께, 철저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고독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극의 초반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하고 사랑받는 기쁨을 누리는 ‘평범’한 아더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이기는 하나 아더는 다정한 아버지와 친형제 같은 동네 형들, 친구들과 함께 전쟁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김준수의 다른 필모그래피 주인공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간성을 그리워하며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서사를 갖고 있는 반면, ‘엑스칼리버’의 아더는 이렇듯 일상성을 가진 평범함에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함으로 진행되는 서사를 보여준다. 아더가 처음부터 엑스칼리버를 뽑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드루이드교의 마법사 멀린에 의해 엑스칼리버를 뽑고 왕이 될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가 엑스칼리버를 들어올리겠다고 마음먹기 위해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먼저 필요했다. 그 진실은 자신의 출생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자신을 키워준 사랑하는 아버지는 친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결국 운명과 핏줄이 왕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대해 어떤 의지를 갖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격이 정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운명과 핏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주어진 현실로 가져다 놓고 아더를 괴롭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은 직후 등장한 기네비어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다. “운명을 믿느냐?”는 아더의 질문에 기네비어는 “운명이란 없으며 인간의 의지를 믿는다.”고 답한다. 그들의 만남이 운명인지, 의지인지에 묻는 대화에서도 기네비어는 운명과 의지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엑스칼리버를 뽑기로 마음먹고 실제로 뽑은 것 자체에 큰 의지와 노력이 들어 있으며, 자신과의 만남도 운명인 동시에 의지라고 답한다. 엑스칼리버를 뽑았다거나 그가 폭군이었던 우더 펜드라곤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라고. 검을 쥔 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것을 휘두르는 이의 힘과 권위가 펼쳐지는 양상은 상당히 달라지며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고유의 개성에서 비롯할 것이다. 이는 극에서 아더라는 캐릭터가 오로지 연기하는 배우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과 같아서, 인물의 매력이 배우 본인의 매력에 달려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아더가 평범한 시절을 보낼 때의 그는 그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관객이 보기에 상당히 낯선 모습이다. 하지만 장면 안에서 아더로 보여지는 김준수는 그것을 낯설어 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 것처럼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며, 앙상블 중의 하나로 보일 만큼 완전히 잘 어울린다. 성장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이 어린아이 같은 인물이 이미 중견 배우가 된 김준수에게 아직도 잘 맞는 옷이라는 점은 놀랍기까지 하다. 어색할 수 있는 연기도 부드럽게, 마치 그 나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인 것처럼 소화하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인 아더가 진정한 왕이 되기까지는 지리멸렬한 성장의 과정이 있다. 기네비어와의 사랑, 아버지의 죽음, 원탁 기사단의 불신과 반발, 모르가나의 기망,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같은 사건 속에서 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뮤지컬 배우였던 것처럼 무대와 캐릭터에 녹아들고 문법을 완전히 숙지한 흔들림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렇게 단계를 진행하며 많은 아픔과 이별을 거치면서도 처음 기네비어와 손을 잡았던 그 비전과 믿음을 바탕으로 거듭난 아더는 결국 자격을 갖춘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된다. 극의 최종 국면에서 김준수가 아더로서 ‘왕이 된다는 것’을 토해내듯 흐느끼며 부르고 있으면, 엑스칼리버를 쥐는 영광 이전에 놓였던 고통과 책임감이 선명하게 드리운다. 충분히 울부짖고 자신의 과오나 동료의 배신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야 동화같이 아름다웠던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에 안녕을 고하고, 드디어 아더는 자신의 선택과 의지를 긍정하며 엑스칼리버를 들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운명과 의지의 경계를 지운다. 그저 사랑받으며 자라고 있던 평범한 어린아이가, 한 무리를 이끄는 왕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채워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준수에게 뮤지컬이 노래를 시작했을 때부터 간절하게 원하고 추구했던 무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2022년 지금, 뮤지컬과 배우 김준수는 더 이상 서로를 분리하고 대체할 수 없을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거대한 팬덤을 이끌고 그야말로 뮤지컬 장르로 쳐들어온 이 낯선 인물은 계속 이방인과 정복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다져왔다. 끝내 이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었기에 한 명의 배우로서 김준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도 같다. 여태 수많은 대중가수 출신 뮤지컬 배우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많은 아이돌이 뮤지컬 배우로 등장할 테지만, 김준수와 같은 배우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떤 운명처럼 엑스칼리버를 쥐게 되었으나,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고, 같은 마을에서 머물고 싶은 그 마음을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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