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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명지
사진 출처. 빌리프랩

“딱 엔하이픈만 풍길 수 있는 분위기를 내더라고요. 마치 뱀파이어가 몸에 배어 있는 느낌 같았어요.” 지난 5월 1일, 엔하이픈 미니 4집 ‘DARK BLOOD’ 사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공개된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의 연출을 맡은 유광굉 감독은 엔하이픈을 처음 마주한 날을 회상했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1932)’를 좋아하는 유광굉 감독은 엔하이픈과의 작업이 “고전 뱀파이어 영화에서 제가 느꼈던 것을 이번에 넣”을 수 있겠다고 느낀 색다른 기회이자 운명이었음을 넌지시 전한다. 그리고 유광굉 감독은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를 사람들이 아는 뱀파이어 이야기와는 다른 결과물로 만들려 했다. “시작할 때 저는 제 나름대로의 두 가지 목표를 세웠어요. 하나는 엔진이 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또 다른 하나는 엔진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성훈이 뱀파이어의 운명을 거스르려던 도중 본인의 운명을 자각하고, 끝내 여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 속에서 유광굉 감독은 일종의 단편영화처럼 계속해서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길 원했고, 스토리를 “재밌게 끌고 가는” 새로운 형식을 찾고자 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유광굉 감독은 그가 처음 엔하이픈을 마주하고 느낀 감상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했다. “과거 속의 뱀파이어가 지금까지 계속 살아 있다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처럼, ‘현대적 고전미’를 품은 콘셉트 트레일러는 유광굉 감독이 해석한 ‘엔하이픈만의 뱀파이어’이자, 트레일러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 예로 콘셉트 트레일러에 사용된 의상에 대해 빌리프랩 허세련 LP는 “뱀파이어가 만약에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떤 옷을 입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브랜드 ‘프라다’의 2023 S/S 레더 컬렉션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정원의 오토바이 장면에 관해 “말을 탄 사람을 말을 타는 사람이 쫓아가면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세련된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정원이 쫓아가는 걸로 하면”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유광굉 감독의 말 역시 큰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그의 특별한 캐릭터 해석을 보여준다. 이는 트레일러와 몇 가지 키워드를 공유하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엔하이픈 오리지널 스토리 ‘DARK MOON: 달의 제단’과의 차이점이다. ‘DARK MOON: 달의 제단’의 여주인공인 수하는, 자신의 힘을 7명의 뱀파이어 로드(작중 엔하이픈)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을 먼 미래로 보낼 결심을 한다. 콘셉트 트레일러는 바로 이 기본 설정을 과감하게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미래로 가려고 이제 멤버들이 다 결단을 한 상황에서, 성훈만 그걸 반대하면 어떻게 될까?” 유광굉 감독은 성훈이 운명을 거스르고 여주인공과 도망을 가기로 다짐한 상황에서, 그 목표와 대립하는 나머지 멤버들이 그들을 뒤쫓고 성훈을 설득하는 상황이라고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을 설명한다. “그래서 보면 성훈은 필사적인데, 나머지 멤버들은 성훈에 비해서 그렇게 많이 공격하려고 하는 의도는, 다시 한번 보시면 없어요.”라는 유광굉 감독의 말은, 트레일러 내에서 적대적인 관계여야 마땅할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본질적으로는 한 팀이었다는 점을 전달함으로써 반전을 준다. 그리고 이때 내레이션은, 트레일러의 스토리를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흡수력 있게 끌고 가는 주된 장치다. 유광굉 감독은 오프닝 장면에서의 내레이션이 ‘영적인 존재’로서 표현되고, “모든 미래에 대한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모든 힘과 권능은 너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맞으니까.”라는 대사가 특히 중요한 메시지로서 영상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현재에 대한 자각이자 미래에 대한 계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레이션은 앞으로 도래할 일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면서 상황의 이해를 도우고, ‘DARK BLOOD’의 핵심을 전달하는 직접적인 장치로서 역할한다. 

 

“이 콘셉트 트레일러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저희가 보지 않았던 모습, 예상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끌어내는 것”이었다는 허세련 LP의 말처럼,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통해 엔하이픈만의 뱀파이어를 구현하면서도 기존의 멤버들의 캐릭터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도록 각각의 배경을 고려하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성훈에게는 아름다운 선을 살릴 수 있을 액션을, 태권도를 했던 정원에게는 주먹 싸움 장면을, ‘Bite Me’ 안무에 참여한 니키는 “약간 좀비 같기도 한 춤으로 부활하는 걸로 하면 어떨까”라는 고민을 더해 캐릭터를 완성했다. 이에 대해 허세련 LP는 멤버들이 “본인 입장에서는 더 잘할 수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라며 멤버들 스스로도 본인의 잠재력을 찾고 확신을 다지게 된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이와 더불어 일종의 ‘행위 예술’ 같은 콘셉트 트레일러 속 엔하이픈의 움직임은, 대사가 없이도 모션 하나하나에서 뱀파이어를 연상시킬 수 있는 간접적인 장치다. 이 뱀파이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봐서 지루한 것들은 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송곳니라든지, 피라든지, 흡혈하는 거라든지.”라는 유광굉 감독의 말처럼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새롭게 구성해낸 결과다. “이들이 되게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면 과연 정신연령이 어떨까? 되게 아기 같을 것 같아요, 오히려 할아버지 같지 않고.” 이와 같은 유광굉 감독의 설명은 영상 초반 회의 장면에서 이들이 왜 “진지하게 작전을 짜지 않고 오히려 간단하게 ‘누가 갈 거야.’라며 춤추면서 장난치”는 모습으로 그려졌는지 이해시킨다. 이는 오로지 배우들의 동작만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했던 무성 영화에 대한 동경을 담은 형식적 시도이자, 고전과 현대를 잇는 매듭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콘셉트 트레일러에서 고전 영화와 예전 필름 시대의 영화들이 떠오르길 바랐던 유광굉 감독은, 시대를 아우르는 심벌을 등장시킴으로써 트렌디한 엔하이픈의 콘텐츠 위에 클래식함을 한 스푼 추가한다. 희승이 초반에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 알프레드 히치콕 작 ‘싸이코(1960)’의 트레일러에서 히치콕  감독이 살인 현장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설명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쌓인 파인애플 캔들이 영화 ‘중경삼림(1994)’에서와 같이 “모아놨던 깡통들을 다 먹어버리고 헤어질 결심을 하는 여자의 심리를 표현하”는 듯한 점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빛과 색의 사용은, 또 다른 간접적인 장치로서 다른 표현 기법들과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자극시킨다. 유광굉 감독은 특히 이번 콘셉트 트레일러가, 뱀파이어와 연관된 ‘붉은 기’, ‘어둠’, ‘빛’이라는 3요소가 섞여서 보다 폭넓은 표현을 할 수 있었음을 전한다. “성훈이 공격했을 때 정원이 느끼는 감정이 너무 충격적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정원이 자세히 보면 놀라는 표정도 약간 있어요. 설마 이렇게까지 나를 칼로 벨 줄은 몰랐던 거죠. 그래서 그 충격적인 모습을 레드 컬러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유광굉 감독의 말처럼 색깔의 강조는 감정의 극치를 표현함과 동시에 색깔의 완전한 배제는 그 반대를 표현한다. 특정 흑백 장면들이 “감정이 다 빠지고, 아무 감정도 안 느끼고, ‘나는 오로지 내 목적만 갖고 행동할 거야.’라고 했을 때”의 순간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대비감은 이번 트레일러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스토리 전개 방식이자 연출자가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는 힌트이다. 대표적으로 성훈이 여주인공을 위로하는 장면에 대해 “얼굴 한쪽은 빛이고 한쪽은 어둠이에요.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이제 곧 헤어지고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되는 어둠도 있는 것”이라는 유광굉 감독의 설명은, 사랑과 운명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극적인 상황을 보다 세련된 형식으로 조명한다. 이때 16mm 필름카메라의 활용은 이 모든 것이 결국 ‘엔하이픈의 뱀파이어’라는 큰 주제를 전달한다는 점에 개연성을 더하는 도구다. 현대적인 아이콘인 엔하이픈을 “그냥 깔끔하게 디지털로 찍는 것보다 오히려 영화 초기에 있었던 조그마한 센서의 작은 필름으로 촬영을 하면 과연 이들은 어떻게 나올까?” 하며 던진 질문은, “모던하면서도 고전적인 느낌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대답으로 귀결되어 엔하이픈만의 느낌을 탄생시켰다. 

 

“로봇 소리를 넣었어요.” 멤버들이 한순간에 정원의 몸으로 들어가 합체되는 장면은, 유광굉 감독만의 색다른 관점에 의해 로봇 합체 순간으로 치환되었다. 별다른 가사 없이 클래식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경음악이 쓰인 이유도 결국 ‘엔하이픈의 콘셉트 트레일러’라는 점에서 그 존재 가치가 부각된다. 니키가 ‘‘DARK BLOOD’ Concept Trailer reaction’에서 직접 언급했듯, 트레일러 속 쓰인 모든 배경음악과 사운드 효과는, 완성도 있는 시네마틱한 단편물을 향한 욕심과 더불어 시청자에게 “리듬을 느끼면서” 듣는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직접 창작되었다. “엔진분들한테 좋은 사운드를 들려드려야” 한다는 목적 의식으로, 사운드 디자인에 참여한 ‘블루캡’에 대해 “이 프로젝트가 들어올 때 바로 연락을 해서 스케줄을 비워달라”고 했다 밝힌 유광굉 감독의 말은 특히 이번 트레일러에서 음악에 들인 공에 대해 각인시킨다. “계단을 올라가는 때의 소리 하나도 그냥 뚜벅뚜벅 올라가는 게 아니고 진짜 수십 개의 레이어를 쌓”고, 멤버들의 커넥트 장면 사운드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점이 그 예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분위기를 증폭시키고, 현실과 운명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멤버들의 긴박한 상황을 그려내기도 하며, 유지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끝을 암시한다. 

유광굉 감독은 다양한 결말의 해석 가능성을 막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은 힌트로만 여정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마지막에 성훈이 “Bite Me”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물렸을까 안 물렸을까는 필름을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어요. 힌트를 드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물릴 때 물리는 소리가 나요.” 나머지 멤버들에 대해서는 “커넥트돼 있어서 ‘이 6명의 캐릭터가 다 죽어야지 이들이 죽는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에 한 명이 살아 있어서 “이들이 다 죽지는 않아요.”라는 비하인드를 남겼다. 남아 있는 이야기의 여백을 채우는 것은 팬들이다. 엔진은 직접 트레일러를 해석하며 내포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본인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으며, 스토리를 또 무수히 많은 갈래로 완성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반응들은 콘셉트 트레일러 공개 직후 “엔하이픈만의 독보적인 콘셉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반응으로 수렴된다. 스토리부터 액션, 색감, 음악에 이르는 모든 요소들이 더해져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엔하이픈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유광굉 감독이 “저는 무엇보다 팬들이 이야기를 완성시켜주시니까 그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완성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리고 “추후에 등장하는 다음 앨범에서의 이야기를 또 기대해달라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는 허세련 LP의 말처럼, 이번 콘셉트 트레일러는 ‘BLOOD’ 시리즈의 1편으로서 “이어질 챕터를 위한 실마리를 충분히 남겨 놓았”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또다시 충격을 줄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