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의 새 앨범 ‘EASY’는 고통과 스웨그의 이중주다. 동명의 타이틀 곡에서 “쉽지 않음 쉽게 easy”하겠다는 자신감은 “다친대도 길을 걸어”가는 인내와 각오에서 나오고, “하날 보면 열까지 간파해서 돌파”한다는 ‘Smart’의 자부심은 앞선 곡 ‘Swan Song’의 “수많은 날 수많은 밤 수많은 눈물”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상처와 대비된다. 첫 곡 ‘Good Bones’에서 “結局私たちはみんな死ぬわけだし 人生の半分は苦しみだろう (결국 우린 다 죽을 거고 인생의 절반은 고통일 거야) / 겨우 남은 절반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는 앨범 전체의 태도이기도 하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랠 부르면 yeah Blah, blah, blah 또 뭐라 하겠지 Shut up, watch me kill this”. ‘Swan Song’에서 르세라핌이 그들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공격적인 가사를 부르는 르세라핌의 목소리는 곡에서 가장 차분하고, 편곡은 다른 소리를 모두 없앤 채 메인 리프인 구슬픈 기타 소리만 남긴다. 그들은 “역사가 될 이 노래”를 부르기까지 백조처럼 “해도 해도 힘든 swim” 하듯 살아가고, “수많은 날 수많은 밤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 ‘Swan Song’을 비롯한 ‘EASY’의 수록 곡들은 무대 아래에서 그들이 겪는 슬픔을 숨기지 않는다. “받아도 더 받아도 더 사랑이 고파 겁나지”라는 두려움을 안은 채 “Shut up” 하라고 외치는 사람의 마음에는 스웨그를 하고픈 자신감과 매일 밤 혼자 있는 방에서 쪼그려 앉는 마음이 있다. ‘EASY’를 시작하는 “다친대도 길을 걸어 kiss me 쉽지 않음 내가 쉽게 easy”는 이 복잡한 정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반복적인 비트 위에 “easy”를 길게 늘여 발음하는 부분은 올드 스쿨 힙합 스타일의 곡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앞의 부분들은 “kiss me”가 전달하는 느낌처럼 속삭이듯 이어지고, 편곡은 트랩 비트 위에 차분한 멜로디를 살짝 얹어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스웨그를 하려는 자신감과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애수의 교차. ‘EASY’의 “조명 꺼진 뒤의 난 wander in the night / Don’t know what is right”에서 허윤진은 노래를 랩의 플로우에 가깝게 또는 랩이 플로우를 노래로 소화한다. “조명 꺼진 뒤”의 자신이 가진 슬픔과 혼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노래하지만, 자기 연민 대신 속도감 있는 힙합 비트에 맞춰 그 모든 걸 쉬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스웨그로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강한 비트와 애잔한 멜로디가, 올드 스쿨 스타일의 랩과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가 경계 없이 뒤섞인다. ‘EASY’-‘Swan Song’-‘Smart’는 ‘FEARLESS’-‘ANTIFRAGILE’-‘UNFORGIVEN’ 이후 르세라핌이 보여주는 새로운 스타일이자 지금 K-팝 걸그룹이 힙합을 어떻게 그들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이기도 하다. 반복적인 비트를 곡의 중심에 놓고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더 강하거나, 화려하거나, 더 높은 소리들을 배치하는 대신 비트를 구성하는 사운드의 일부를 오히려 없애거나 완급을 조절한다. ‘EASY’의 퍼포먼스는 힙합 댄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작들을 재배열한다. 각각의 동작이 아주 복잡하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각각 다른 속도를 가진 동작들을 멤버들이 계속 똑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한 퍼포먼스 안에서 2배속 빨리 재생하기와 0.5배속 느리게 재생하기가 한 무대에서 동시에 구현되는 것 같은 순간들을 남긴다. 르세라핌은 새 앨범에서 그들이 가진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 복잡함을 트레일러 영상부터 곡과 퍼포먼스까지 지난 석 장의 앨범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 일관성이 모여 르세라핌의 새로운 스타일이 된다. ‘FEARLESS’-‘ANTIFRAGILE’-‘UNFORGIVEN’을 발표하던 팀이 ‘EASY’라는 단어만 제시할 때의 단순하지만 의외였던 방향 전환이 앨범 전체에 그대로 이어진다. 쉽게 들리고 재밌게 볼 수 있지만, 이 느낌을 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EASY’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Good Bones’와 ‘We got so much’는 ‘EASY’-‘Swan Song’-‘Smart’와 상반된 스타일을 담았다. ‘Good Bones’가 강렬한 록 사운드를 기반으로 “Despite it all, My ambition and aspirations are unstoppable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내 욕심과 야망)”을 공격적으로 표현한다면, ‘We got so much’는 후렴구인 “We got so much love”에서 이 앨범에서 드물게 고음을 사용하는 등 기존 K-팝에 보다 가까운 구성을 선보인다. ‘EASY’-‘Swan Song’-‘Smart’가 그들의 내면과 세상의 부딪힘에서 나오는 그들의 복잡한 태도를 ‘EASY’하게 느낄 수 있도록 풀었다면 ‘We got so much’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 받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다. “발견해 줘 날 나도 모르는 날”이란 ‘We got so much’의 가사처럼 그들은 앨범 전체에 걸쳐 고통과 스웨그 속에 있는 복잡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자신들을 새롭게 규정한다. ‘Good Bones’의 “내 욕심과 야망”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We got so much’의 “인싸건 아싸이건 그 모든 모습이 나야”라는 자기 성찰에 이르는 과정. 그래서 ‘EASY’는 앨범 제목처럼 단순한 것 같지만, 답하려면 복잡한 고민을 해야 하는 질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것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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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세라핌이 하면 다 쉬워 보이지?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