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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사진 출처. 하이브 레이블즈 유튜브

“세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추악해

結局私たちはみんな死ぬわけだし 人生の半分は苦しみだろう (결국 우린 다 죽을 거고 인생의 절반은 고통일 거야) 

겨우 남은 절반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그리고 미야와키 사쿠라가 말한다. 

 

“私はこの事実に少し早く気付いた (난, 이 진실을 조금 일찍 알았지)”

르세라핌의 사쿠라는 인생의 절반을 아이돌로 살았다. 지금 열일곱 살인 르세라핌의 막내 홍은채보다 네 살 더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는 사실은, 그가 르세라핌의 새 앨범 ‘EASY’의 시작을 알리는 트레일러 ‘Good Bones’에서 말한 진실을 조금, 아니 지나치게 일찍 알았다는 의미다. 인생의 절반은 고통이고, 겨우 남은 절반은 하기 나름이다. 무언가 부단히 하지 않으면 고통만 기억에 남게 될 생. 사쿠라는 쓰레기처럼 버려진 꽃 더미 속에 파묻힌 채 트레일러에 첫 등장한다. 눈을 감고 있던 그를 건드리며 깨운 카즈하의 등에는 한쪽만 달린 날개가 있다. 꽃은 버려지고 날개는 부러졌다. 그러나 깨어 있는 동안에는 고통에 잠길 틈이 없다. 트레일러 속에서 사쿠라를 비롯한 멤버들은 끊임없이 걷는다. 그리고 사쿠라가 가는 길 앞에 벽이 막아서자, 그는 눈에서 빛을 쏘아 벽을, 벽 뒤의 벽을, 벽과 벽 뒤의 벽과 그 뒤의 수많은 벽들을 모두 무너뜨린다. 홍은채가 걷던 거리에 있던 간판, ‘낙원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 트레일러는 한국의 서울 낙원상가 일대에서 촬영됐다. 아무도 없는 서울의 밤거리가 슈퍼히어로의 활동 무대로 바뀐다. 그것이 아이돌 또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있는 모든 연예인들의 삶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매장에 화려하게 전시됐던 꽃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른다. 무대 위에서 슈퍼히어로처럼 활약하는 아이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사쿠라는 초능력을 발휘한 뒤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EASY’. 엄청난 일을 쉬워 보이게 하는 것. 사쿠라가 생의 절반 동안 해온 일.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코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생의 나머지 절반. 고통. 

 

앨범 ‘UNFORGIVEN’의 트레일러 ‘Burn the Bridge’에서 사쿠라는 원형으로 만들어진 하얀색 배경의 공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때 내레이션은 “그 문 뒤에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있으니까.”다. ‘Good Bones’에서 사쿠라가 뚫은 벽은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문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Burn the Bridge’에서 사쿠라의 눈물이 또 다른 자신과의 사이를 막고 있는 막을 통과했다면, ‘Good Bones’에서는 파괴적인 빛이 수많은 겹의 벽을 부숴 버린다. 현실에서 “가고자 했던 길”을 막는 것은 그만큼 크고 단단하다. 하지만 르세라핌은 또는 많은 걸그룹들은 기어이 그 벽을 넘어서곤 한다. 사쿠라의 빛이 벽을 뚫고 바다를 건넌 것처럼. 빛의 끝에는 김채원이 덩크슛을 한 것 같은 모습으로 농구 골대에 매달려 있다. 대륙을 건너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놀라운 순간을, 마치 아주 쉽게 해낸 것처럼 여유롭게 해내는 일. 르세라핌의 ‘Perfect Night’은 영어 곡으로 한국 음원 서비스 중 점유율이 가장 높은 멜론의 월간 차트 1위를 기록했다. K-팝 전체에서 방탄소년단과 함께 유이한 기록이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해내기까지의 과정은 갑자기 코피가 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Good Bones’에서 허윤진이 “You think it’s okay to degrade someone  just because they’re true to themselves?(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면 아무말이나 들어도 되는 거야?)”라는 말은 그의 직업이 가진 고통의 일부를 드러낸다. 솔직하다는 이유로 또는 김채원의 말처럼 “나만 운이 좋은 것 같아서” 르세라핌을 비롯한 많은 여성 아이돌들이 수많은 말들을 듣는다. 악의를 품은 자가 퍼뜨린 루머가 돌아다니고, 때론 모든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폄하 당한다. 그래서 ‘EASY’. 무언가를 성취한 여성이 직접 말할 때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여유이자 스웨그. 하지만 타인이 그 여성에게 말할 때는 그의 모든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말. “쉬워 보이네.”, “쉽게 얻었네.”. ‘Good Bones’는 ‘EASY’가 르세라핌과 같은 여성 아이돌에게 적용될 때 갖는 두 가지 의미를 교차시킨다. 버려진 꽃 무더기에서 일어나고, 코피를 흘리고, 벽을 무너뜨려도 쉬워 보이게 일하는 것. 동시에 그들의 일이 정말 쉬운 것처럼 평가 당하는 것. 

 

‘Good Bones’에서 홍은채는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사쿠라 또한 ‘FEARLESS’의 트레일러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어딘가로 떨어졌다. ‘The World Is My Oyster’가 사쿠라의 하락 또는 추락을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그렸다면, 홍은채는 철제 계단에 몸이 부딪히고 접히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Good Bones’, 튼튼한 뼈가 필요한 이유. 현실에서는 잠시만 발을 헛디뎌도 뼛속까지 고통이 스며드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Burn the Bridge’에서 불타던 카즈하의 날개는 ‘Good Bones’에서 하나만 남았다. 그는 더 이상 ‘Burn the Bridge’의 깔끔하고 화려한 실내에 있지 않다. 누군가 쉬워 보인다고 말하는 그들이 걷는 진짜 길이다. ‘Good Bones’는 밤을 배경으로 낮은 채도의 영상을 통해 멤버들이 무대 위와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줬던 화려한 빛을 빼앗는다. 김채원은 쓰레기라도 담긴 것 같은 비닐 봉투를 들고 다니고, 허윤진은 거리에 떨어져 있던 음료를 집어 마신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도 정면으로 걸어오는 허윤진의 걸음이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다. 꽃 더미에서 일어난 사쿠라는 핑크색 인조 퍼 코트를 입은 채 화려하게 턴한다. 패딩과 인조 퍼 또는 날개의 깃털과 꽃처럼 보는 각기 다른 질감을 가진 소재들의 배치가 화면에 마치 입체와 같은 생생함을 불어넣는 것처럼,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현실은 그들의 빛과 색을 빼앗고, 때론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힘차게 걸어 나오며 자신에게 시선을 쏠리게 만든다. 르세라핌의 데뷔를 알리는 ‘LE SSERAFIM 2022 “FEARLESS SHOW”’에서 런웨이는 많은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곳에 멤버들이 올라가는 무대였다. ‘ANTIFRAGILE’의 트레일러 ‘The Hydra’의 런웨이는 그들이 차량에 타서 도착한 야외의 어느 곳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Good Bones’에는 인공적인 무대도, 그들을 태우고 빠르게 달릴 무언가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현실의 거리를 런웨이로 만든다. 

 

다큐멘터리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확인할 수 있듯 데뷔 전부터 많은 일들을 겪었던 팀은 앨범을 낼 때마다 관심과 노이즈가 가득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섰다. 르세라핌뿐만 아니라 많은 걸그룹들이 원치 않지만 겪게 되는 일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수많은 것들을 이루었다. 바다 건너 덩크슛을 하는 것만큼 믿기 어려운 것들을. 그리고 ‘Good Bones’에 이르러 그들은 드디어 “My ambition and aspirations are unstoppable(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내 욕심과 야망)”이라고 선언한다. ‘FEARLESS’, ‘ANTIFRAGILE’, ‘UNFORGIVEN’이 그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 단어에 ‘-LESS’, ‘ANTI-’, ‘UN-’을 붙여 의미를 벗어나거나 뒤집으려는 시도였다면, ‘EASY’는 단어에 어떤 것도 더하지 않는다. 대신 “멈출 수 없는”, “욕심과 야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려움 없는, 깨지지 않는, 용서받지 않겠다는 방어가 드디어 공격으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