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 어워드는 언제나 음악계의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해왔다. 이번 제63회 시상식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베스트 멜로딕 랩 퍼포먼스(Best Melodic Rap Performance)’ 부문은 좋은 예다. 2017년까지는 ‘베스트 랩/성 컬래버레이션(Best Rap/Sung Collaboration)’, 2018년부터 2020년까지는 ‘베스트 랩/성 퍼포먼스(Best Rap/Sung Performance)’로 이름 지어졌던 부문이다. 1990년대부터 래퍼와 싱어의 합작 싱글이 흔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랩과 노래를 병행하거나 두 보컬 형식의 경계를 허문, 이른바 싱잉 랩을 구사하는 아티스트가 대거 등장했다. 적어도 힙합계에선 이제 랩과 노래를 칼같이 구분하는 게 무색할 정도다. ‘멜로딕 랩 퍼포먼스’라는 부문 명은 이 같은 흐름이 반영된 결과다.

그리고 지난 3월 14일, 이 부문의 최초 수상자가 나왔다. 앤더슨 팩(Anderson .Paak)이다. 그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래퍼이며, 프로듀서이자 멀티 연주자다. 장르적으로도 알앤비와 힙합 전체를 아우른다. 성적인 무드 충만한 언변과 로맨틱한 속삭임을 동시에 구사하는 알앤비 달변가이자 힙합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리스펙트를 역설하고, 사회 정치적으로 부당한 문제를 거침없이 꼬집는 힙합 리리시스트다. 이번에 수상한 “Lockdown”은 후자의 면모가 드러난 곡이다. 2020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BLM(Black Lives Matter)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들의 야만적인 인종차별과 폭력 행위를 비판한다.

한때 직장을 잃고 노숙자 신세가 되기도 했던 팩은 아티스트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에 데뷔작 ‘Venice’를 발표했다. 비록,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앨범은 팩의 범상치 않은 재능과 음악 세계를 소수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단지 음악 팬에게만 와닿았던 것이 아니다. 일부 산업 관계자와 아티스트 역시 그를 눈여겨보는 계기가 됐다.

업계로부터의 반응은 빨랐다. 팩은 2015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닥터 드레(Dr. Dre)의 새 앨범 ‘Compton’에 참여하게 된다. 닥터 드레가 ‘2001’ 이후, 16년 만에 내놓은 이 앨범에서 앤더슨 팩은 무려 4곡에 피처링했다. 다른 유명한 게스트를 압도하는 지분도 놀라웠지만, 독보적인 음색을 바탕으로 한 보컬 퍼포먼스야말로 대단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의 커리어가 메인스트림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의 행보가 얼마나 눈부셨는지는 그동안 내놓은 앨범과 싱글의 완성도가 대변해준다. 최근엔 브루노 마스(Bruno Mars)와 실크 소닉(Silk Sonic)이란 듀오를 결성하고 우리의 귀를 녹이는 중이다.

한편, 3월 12일 공개된 앤더슨 팩의 ‘에스콰이어(Esquire)’ 인터뷰에는 눈길을 잡아끄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K-팝 그룹에 흠뻑 빠진 큰아들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만약 BTS와의 컬래버레이션 기회가 있다면 응하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안 그래도 연결 좀 해보려고 노력 중이야. 혹시 방법을 알면 좀 말해줘.”
물론, 농담 섞인 발언이었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TRIVIA

노워리스
앤더슨 팩은 위에서 언급한 실크 소닉 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병행해왔다. 힙합 프로듀서 날리지(Knxwledge)와의 듀오 노워리스(NxWorries)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유력 인디 레이블인 스톤스 스로우 레코드(Stones Throw Records)와 계약하고 2015년 EP ‘Link Up & Suede’와 2016년 정규 앨범 ‘Yes Lawd!’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