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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음악평론가)
사진 출처켄드릭 라마 SNS/인스타그램

정말 오랜만에 경이로운 배틀 랩의 광기로 힙합계를 물들인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그는 시대의 힙합 아이콘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다. 이견의 여지없이 출중한 랩 실력, 문학과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탁월한 작사력, 걸작을 만들어낼 줄 아는 선구안과 기획력, 문화를 존중하는 스탠스, 날카로운 시대정신, 디스전을 마다하지 않는 호전성까지. 매체와 대중이 그에게 빠져들 요소는 다양하다. 

2011년 ‘Section.80’란 앨범을 통해 라마의 음악을 처음 접한 이래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과거의 힙합이 남긴 유산과 문화를 대하는 태도였다. 동시대의 다른 랩 스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선배들이 다진 기반과 쌓아올린 업적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언제나 존경을 표했고 직접 음악으로 표현했다. ‘Good Kid, M.A.A.D City(2012)’의 ‘M.A.A.D City’란 곡에서 OG MC 에잇(MC Eiht)을 초빙하고 말미에 지펑크(G-Funk) 프로덕션에 대한 오마주를 연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드레이크(Drake)와의 디스전을 확실한 우세로 이끈 명곡 ‘Not Like Us’에서 강조한 부분은 문화적 정체성이었다. 오늘날의 힙합 씬은 인종과 장르 사이의 강력했던 연결 고리가 어느 정도 느슨해졌으며, 문화로서의 담론이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 상황에서 라마는 힙합 문화와 그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정통성이란 화두를 다시 내세운 다음 놀라운 랩과 음악으로 많은 이를 설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라마가 과거에 함몰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가 쏟아내는 음악은 단순한 추억이나 트렌드 어느 쪽에도 기대지 않은 채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깜짝 발매된 새 앨범 ‘GNX’ 역시 켄드릭 라마의 세계가 지닌 특징을 온전히 담은 작품이다. 그의 확고한 힙합 철학과 개인적 서사가 융합되어 강렬하고 창의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웨스트 코스트 힙합 사운드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음악적 실험을 더했다. 프로듀서 사운웨이브(Sounwave)와 잭 안토노프(Jack Antonoff)와의 협업은 앨범의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트랩, 래칫, 하이피(Hyphy), 지펑크, 얼터너티브 힙합 그리고 마리아치 등 여러 음악 요소를 결합하여 지역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구현했다.

‘GNX’는 대중음악 역사에 기록될 디스전 이후 힙합 씬의 권력 재편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만큼 켄드릭 라마의 예술적, 철학적 깊이 또한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반영웅적 왕으로 규정하며 시종일관 타인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성찰을 넘나든다. 그리고 힙합이란 문화적 맥락 안에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반추한다.

예를 들어 ‘dodger Blue’에서는 LA의 고등학교와 커뮤니티를 언급하며 지역적 뿌리를 드러내고 월리 더 센세이(Wallie the Sensei)나 로디 리치(Roddy Ricch)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의 연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펑크 스타일의 베이스 라인과 현대적 편곡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프로덕션도 인상적이다. 앨범을 여는 ‘Wacced Out Murals’를 포함하여 세 곡에 마리아치 싱어 데이라 바레라(Deyra Barrera)의 보컬을 삽입한 지점도 흥미롭다. 데이라 바레라는 미 프로야구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고인이 된 다저스의 전설적인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Fernando Valenzuela)를 추모하는 공연을 했다. 슬픔과 강렬함 속에서 펼쳐진 그녀의 퍼포먼스에 수많은 이가 감격했고, 이는 켄드릭 라마와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애수 어린 동시에 마력 있는 목소리가 ‘GNX’에 영적인 기운을 더했다. 

한편 앨범에서 유독 반가운 곡은 ‘heart pt. 6’다. 샘플링 때문이다. 1990년대 R&B를 대표하는 그룹 중 하나인 SWV의 1996년 싱글 ‘Use Your Heart’를 샘플링했다. 원곡에 충만한 감성적인 무드와 호화로운 멜로디를 고스란히 살리는 방향으로 완성되어 SWV의 음악을 기억한다면 감흥이 남다를 것이다. ‘heart pt. 6’는 곡이 지닌 의미도 남다르다. 라마가 이전부터 진행해온 ‘The Heart’ 시리즈는 그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곡마다 녹음 당시 그가 놓인 상태를 시적으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드레이크와의 디스전에서 시리즈를 도난(?)당했다. 드레이크가 ‘THE HEART PART 6’란 제목으로 디스 곡을 발표하면서 라마가 이어온 시리즈의 명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라마는 ‘heart pt. 6’로 자신의 시리즈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기존과 달리 제목에서 ‘The’라는 단어를 빼고 모두 소문자로 표기한 것 역시 드레이크 버전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첫 곡 ‘wacced out murals’부터 강렬하고 상징적이다. 그는 자신의 벽화가 훼손된 사건을 통해 개인적 분노를 공공적 메시지로 확장한다. 또한 현실의 적들과 내면의 괴물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영웅적 여정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의 랩은 마치 고대의 서사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Before I take a truce, I'll take 'em to Hell with me(휴전하기 전에, 놈들을 지옥으로 데려갈 거야)”와 같은 가사는 지독한 복수심과 강력한 영향력이 뒤섞여 있다. 라마의 내면에 잠재된 복합적 감정이 드러난 순간이다. 앨범은 이렇듯 켄드릭 라마의 작가적 가사가 돋보이는 곡으로 그득하다.

잊지 마시라. 그는 래퍼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앨범의 중심부에 위치한 ‘Reincarnated’를 보자. 라마는 첫 번째 벌스(Verse)와 두 번째 벌스를 전생으로 설정하고 마지막 버스에서 본인이자 루시퍼로 분해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투쟁 그리고 미래의 힙합에 대한 비전을 깊이 있게 다룬다. 그가 벌스를 빌어 환생한 과거의 아티스트가 누구인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내용으로 유추할 순 있다. 1940년대 획기적인 연주와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여 명성을 얻은 블루스/R&B 기타리스트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와 재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가 그들이다. 치밀하게 설계한 이야기 구조, 철학적이며 감탄을 부르는 주제의식, 고 투팍(2Pac)에 대한 경의가 느껴지는 감동적인 랩 퍼포먼스까지 -참고로 이 곡의 프로덕션은 투팍의 명곡 ‘Made Ni**az’를 샘플링했다-, 오늘날 어떤 경지에 이른 켄드릭 라마의 음악적 기술과 예술적 정체성을 체감할 수 있는 곡이다. 

라마는 지난 2022년 발매한 다섯 번째 정규작 ‘Mr. Morale & the Big Steppers’를 끝으로 약 18년간 몸담았던 레이블 TDE와 결별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이자 영상감독인 데이브 프리(Dave Free)와 독립 크리에이티브 회사인 피지랭(pgLang)을 공동 설립했다. TDE와 애프터매스(Aftermath Entertainment)의 지원으로부터 떠나와 첫 앨범을 준비하면서 부담과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다시 한번 역작을 만들어냈다. ‘GNX’에서 라마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재의 상업성과 도덕적 침체를 비판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획시대적인 래퍼의 탁월한 결과물을 동시대에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겁고 짜릿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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