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브란스: 단절’ (애플TV+, 티빙)
윤해인: “직장 생활의 기억과 개인적 삶의 기억을 분리하는데 동의합니다.”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의 첫 번째 시즌, 등장인물 헬리는 밝은 표정으로 이 문장을 낭독한다. 작중 가상의 시술을 의미하는 ‘세브란스(Severance, 단절)’는 헬리의 말처럼 출근 이후의 자아와 일상의 자아를 서로 ‘단절’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극의 중심 인물인 마크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에 단 8시간이라도 슬픔을 잊기 위해 이 시술을 받고 ‘루먼 인더스트리’라는 기업에 입사한다. 나름 평화롭던 마크의 일상은 동료가 퇴사하며 급작스레 팀장을 맡은 MDR(Macro Data Refinement, 매크로데이터 정제)*팀에 새로 들어온 직원 헬리와 만나며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직장과 사생활의 분리. 내 옆집 이웃이 직장 상사일지라도 알아챌 수 없다. 언뜻 보면 현대 사회인들이 중시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Work and Life Balance)’의 이상향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무실 속 자아 ‘이니’들의 단절된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그들은 업무를 마치고 오후 5시가 넘으면 퇴근할 수 있지만 그때부터의 기억은 회사 바깥 ‘아우티’의 몫이다. 따라서 이니에게는 휴식의 기억도 가질 수 없는, 출근과 출근과 출근만이 이어진다. 이니 헬리는 일뿐인 삶을 탈출하고자 자신의 아우티에게 설명하고 사정하다가 협박까지 해보지만, 아우티는 너무나 단호하다. ‘단절’의 개념은 동일한 신체를 공유하는 두 자아를 각기 다른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할 뿐만 아니라,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에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세브란스: 단절’의 상상 속에는 사실 현실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예컨대 각 시즌에서 MDR팀을 이끄는 관리자 코벨과 밀칙은 회사가 준 권한의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각자 부여받은 위치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압박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또는 둘 다거나. ‘루먼 인더스트리’의 직원들이 때로 기업의 회장 키어 이건을 종교적으로 찬양하는 장면이나, ‘단절층’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직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머그컵을 주거나 춤추는 시간 5분을 제공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지만, 그만큼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이자 반영이기도 하다.
시즌 1이 진행되는 동안, MDR팀의 4인방인 마크와 헬리 그리고 어빙과 딜런은 각자의 방식으로 ‘루먼’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사소한 생각의 씨앗은 어느새 자라나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로 탈바꿈된다. 드라마 초반에는 삐그덕거렸던 MDR팀의 네 인물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팀워크를 발휘하고, 동시에 캐릭터의 성격과 우연한 계기가 얽히는 과정은 점차 스토리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쾌감을 불러온다. 직장과 개인적인 삶을 분리한다는 단순한 설정에서 출발한 ‘세브란스: 단절’은 정체성을 둘러싼 철학적 질문이나 사회의 일면을 은유적으로 담은 블랙 코미디까지 포괄해내기에 이른다. 여기다 집요함에 가까운 연출의 섬세함, 세밀하지만 각기 다른 캐릭터의 매력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극대화시킨다. 조금씩 밝혀지는 진실과 새롭게 던져지는 질문들이 지난 1월부터 공개 중인 시즌 2를 통해 드러나는 중이다.
*작중에서는 모니터상의 여러 숫자 중 무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숫자를 삭제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Doechii - ‘Nosebleeds’
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1996년 제3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랩 앨범’ 부문이 신설된 이후 지금까지 이 부문에서 상을 거머쥔 여성은 딱 세 명뿐이다. 1997년 그룹 푸지스(Fugees)의 ‘The Score’로 수상한 로린 힐(Lauryn Hill), 2019년 솔로 여성 래퍼로는 최초 수상이었던 ‘Invasion of Privacy’의 카디비(Cardi B). 그리고 2025년 ‘Alligator Bites Never Heal’의 도이치(Doechii)다.
도이치는 수상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2005년 그래미 어워드 수상 소감을 오마주하며 “도이치가 그래미상 수상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지 모두가 궁금해했지,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겠네.”* 라는 자신감이 가득한 가사를 내뱉는 것을 시작으로, 노래가 흐르는 2분 15초 내내 자신의 능력, 존재감, 커리어, 삶의 궤적이 담긴 가사를 비트 사이사이 꽂아 내린다.
곡의 프로덕션은 그 가사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몰아치는 클랩 사운드 뒤에 바이올린을 이어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그 위에 둔탁한 비트를 얹어 풍성한 사운드를 구축한다. 그 위에 도이치의 강렬한 래핑이 더해져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만약 도이치가 이번 수상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말대로 아무도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두 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토록 완벽한 수상 소감을 들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이 순간을 지켜본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것.
* Everybody wanted to know what Doechii would do if she didn't win I guess we'll never—.
‘악마와 함께 춤을’ -크리스타 K. 토마슨
김복숭(작가): 흔히 볼 수 있는 동기부여 영상들, 좋은 친구가 건네는 격려의 한마디... 때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기준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는 어떤가? 그럴 때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실패를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이 쓴 ‘악마와 함께 춤을’은 철학서이면서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가는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맞서고, 심지어는 통제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감정을 승화시켜야만 한다는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다.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라는 부제는 다소 과장된 표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핵심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정들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탐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활기차고 긍정적인 상태, 곧 양(陽)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만, 이는 감정에 대한 무관심을 포장하는 금욕주의적 혹은 유교적 접근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음(陰)’의 감정들에 대한 일종의 찬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일까?
작가는 철학자들과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흔히 간과하는 ‘나쁜’ 감정들에 대해 탐구하며,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와 같은 주요 부정적 감정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들이 부정적인 감정 역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사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다루기 어려운 감정들조차도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인다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는가.
- ‘핫스팟: 우주인 출몰 주의!’, 일상과 판타지의 마리아주2025.02.21
- ‘최강야구’가 보여준 낭만2025.02.14
- ‘중증외상센터’, 함께 지키는 삶에 대하여20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