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몇 년간 뮤지션 전기 영화는 잔잔한 유행 중 하나였다. 굵직한 예만 들어봐도 퀸, 엘튼 존, 엘비스 프레슬리, 휘트니 휴스턴, 에이미 와인하우스 등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컴플리트 언노운(A Complete Unknown)’은 그중 최신작으로 밥 딜런(Bob Dylan)을 다룬다. 이 작품은 일라이자 왈드(Elijah Wald)의 2015년 책 ‘딜런 고즈 일렉트릭!(Dylan Goes Electric!)’을 원작으로 삼는다. 영화는 연도를 보여주는 두 번의 자막으로 시기를 특정한다. 1961년 밥 딜런의 뉴욕 도착부터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의 소동까지다. 밥 딜런은 1960년대 초 사회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포크 뮤지션으로 세상에 등장했지만, 메시지와 음악 등 모든 면에서 과거의 면모를 무너뜨리고 전기기타와 밴드 음악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 시기의 밥 딜런은 현대 대중문화에서 가장 큰 신화로 남아 있으므로, 굳이 특정한 책이 원작이 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신화’라는 표현은 중요성이나 유명함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모음이 아니다. 신화는 불확실한 기억, 엇갈린 진술, 모호함과 상징으로 남아서 현재와 공명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이 시기의 밥 딜런이 수많은 창작물로 이어진 이유다. ‘컴플리트 언노운’은 무명의 아티스트가 천재성을 발휘하며 역경을 거쳐 성공에 이르는 편안한 영화가 될 수 없다.

영화감독 토드 헤인즈(Todd Haynes)는 2007년 작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를 만들기 위해 밥 딜런의 허락을 구할 때 매니저의 조언을 받았다. ‘세대의 목소리(Voice of a Generation)’ 혹은 ‘우리 시대의 천재(Genius of Our Time)’ 같은 표현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그 덕분인지 ‘아임 낫 데어’는 6명의 배우가 7개의 이름으로 밥 딜런이라는 자아의 다양한 면모를 탐구하는 ‘밥 딜런 없는 밥 딜런 영화’가 되었다. 결국 영화의 부제가 되어버린, 토드 헤인즈의 표현을 빌리면 ‘밥 딜런에 대한 영화의 몇 가지 가설(Suppositions on a Film Concerning Dylan)’이다.
토드 헤인즈에게 밥 딜런은 거기 없었고, ‘컴플리트 언노운’의 감독 제임스 맨골드(James Mangold)에게 밥 딜런은 ‘알 수 없는 자’ 혹은 ‘미지의 존재’다. 젊은 밥 딜런은 사람들이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세운 다음, 그것을 심지어 강요하는 모순을 깨고 나아간다. 사람들은 밥 딜런이 부모 세대를 가리켜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비판을 하지 마세요. 당신의 오래된 방법은 빠르게 낡아가고 있어요. 시대가 변하고 있어요.”라고 노래할 때 환호하며, 난생처음 듣는 신곡을 열정적으로 따라 부른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 그는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이 연기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오래된 꿈을 이루는 존재다. 하지만 밥 딜런은 결국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떼어 놓으며, 그들이 원하는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이제 다 끝났다”고 노래한다(‘It’s All Over Now, Baby Blue’). 그 어쿠스틱 기타는 그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반항아, 조니 캐시(Johnny Cash)가 빌려준 것이다. 나머지 다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배신자로 매도한다. 영화가 실제로는 1966년 영국 맨체스터 공연에서 어느 관객이 ‘유다’라고 외친 사건을 1965년 장면으로 끌고 온 것은 예술적 허용의 범위에 속한다(조니 캐시가 1965년 공연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명성의 저주와 그에 대한 무자비한 돌파가, 제임스 맨골드가 택한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신화의 ‘가설’일 것이다.

이 가설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1965년 공연이라는 절정에 이르기 위해 그에 앞선 4년의 시간을 묘사하는 도전이 ‘컴플리트 언노운’을 특별하게 만든다. 거의 모든 기록이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에 남아 있는 현대의 아티스트와 달리, 이 시기의 밥 딜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풍족하지 않다. 자연히 눈에 띄는 몇 가지 창작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에서 밥 딜런과 밥 뉴워스(Bob Neuwirth)의 거만한 혹은 록스타를 떠올리게 하는 태도는 1967년 다큐멘터리 ‘돈 룩 백(Dont Look Back)’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시기적으로도 중요하다. 1965년 5월, 밥 딜런은 영국으로 콘서트 투어를 떠난다. 그 직후 7월이 문제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이다. 그 무대에서 불렀던 ‘Like a Rolling Stone’은 그 중간인 6월에 쓰고 녹음했다. 영화 중 영국에서 전기기타를 샀다는 묘사로, 이 투어가 음악적 변화의 단초가 되었다는 암시가 나오는 이유다.
‘돈 룩 백’은 당신이 알고 있는 음악 다큐멘터리, 백스테이지 필름 혹은 브이로그의 원형이다. 이 무렵 녹음 기술의 발전과 장비의 소형화로 촬영자는 대상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차량, 호텔 방, 사무실은 물론 무대 뒤편의 복도를 내달려 자동차에 몸을 던지는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밥 딜런과 기자 간의 대립적인 인터뷰, 소음으로 인한 호텔 직원과의 다툼, 조안 바에즈(Joan Baez)나 도노반(Donovan) 같은 다른 아티스트와의 개인적인 퍼포먼스가 기록으로 남았다. 극도로 가까운 거리는 유명 아티스트의 신비로운 장막을 들추고 대중적 이미지와 개인적 욕망의 충돌을 공개한다. 그는 초창기 포크 사운드에 관심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관습을 거부하는 의도적 무례함을 드러내며, 조안 바에즈의 존재를 무시한다. 덕분에 ‘컴플린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태도 변화를 ‘미지’와 ‘혼란’으로 남겨 두면서도, 그 근거를 ‘돈 룩 백’에서 빌려올 수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참고한 것은 머레이 러너(Murray Lerner)의 1967년 다큐멘터리 ‘페스티벌(Festival)’일 것이다. 이 영화는 1963년부터 1966년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촬영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밥 딜런은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 무대에 섰다. 당시 머레이 러너는 자신이 무엇을 기록하는 중인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는 2007년 밥 딜런과 다른 주요 아티스트의 공연 중심으로 재구성한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더 미러(The Other Side of the Mirror)’를 추가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1965년 무대에 쏟아진 반발과 야유에 대한 증거가 되어 왔다. 동시에 ‘컴플리트 언노운’이 수년에 걸친 페스티벌을 생생히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두 다큐멘터리는 현대의 관객이 가질 법한 의문, 1965년 무대가 그토록 격렬한 반대를 불러온 이유에 대한 답변의 출발점이다. 1965년 3월, 밥 딜런은 이미 ‘Bringing It All Back Home’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절반은 이미 전기 사운드를 담고 있다. ‘Like a Rolling Stone’ 싱글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일주일 전에 발매되었다. 그의 변화는 비밀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상식적인 답변으로 시작하자.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대안적 문화 운동의 일환이었고, 포크 장르가 그 중심에 놓이는 것이 당연하다. 페스티벌 주최 측뿐만 아니라 관객도 이미 밥 딜런의 새로운 사운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밥 딜런이 ‘우리’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밥 딜런의 공연은 단지 음악적 새로움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선언이자 답변이었다. 영화에서 잠깐 언급되는 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The Paul Butterfield Blues Band)도 전기 공연을 했지만, 문제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헷갈리게 하는 현실의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밥 딜런은 영화와 달리 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게 아니었고, 이 또한 갈등의 원인 중 하나였다. 야유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심각한 야유는 밥 딜런이 단 세 곡만 연주하고 무대에서 내려갔기 때문이며, 머레이 러너가 편집으로 이를 왜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을 한 사람이 영화 속에 있다. 피트 시거가 공연을 중단시키려 할 때 콘솔을 지키며 “귀를 열라.”고 외치던 사람, 당시 프로덕션 매니저 조 보이드(Joe Boyd)의 최근 발언을 보자. “많은 역사적 사건은 나중에 돌이켜볼 때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모두가 그 순간에 알고 있었다.” 그가 미래를 알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대신 인기와 이미지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는 아티스트에게 깊이 공감하고 지지하는 동시대의 젊음이 있었다는 선언이다. 1960년대 후반의 대중음악 혁명이 ‘야유’와 ‘환호’를 함께 받으며 시작된 것을 놀랍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영화 속의 관객 중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이 클라이맥스는 야유에 대한 것이 아닌 듯하다.

- 왜 모두 티모시 샬라메만 원하지?2024.04.30
- ‘미키17’, 수많은 미키들을 ‘갈아 넣는’ 자본주의란 엔진2025.03.31
- ‘서브스턴스’, 내밀하고 끈질긴 바디 호러202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