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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음악평론가)
사진 출처RCA Records Official Website

3월 7일 발표된 제이홉(j-hope)의 신곡 'Sweet Dreams'는 따사로운 햇빛처럼 다가와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보컬로 시작한다. R&B 싱어송라이터 미겔(Miguel)의 목소리다. 처음 제목과 피처링 명단을 봤을 때 이보다 절묘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무중력의 꿈속을 유영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 제이홉도 그래서 그를 초빙한 것 아니었을까? 미겔의 음색과 보컬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촉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풍경과 같다. 여름날의 노곤한 오후이기도 하고, 가을날의 선선한 저녁이기도 하다. 가벼움과 무게가 공존하며 속삭임과 외침이 교차하고 나른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곡의 감정선을 따라 보컬의 강약과 질감을 조절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니까 미겔은 이 시대의 독보적인 싱어 중 한 명이다.

미겔이 현대 R&B 음악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기 위해선 얼터너티브 R&B란 장르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10년대 초반 알앤비/소울 씬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른 장르와의 실험적인 결합을 통해 전례 없는 무드와 사운드를 지닌 새로운 R&B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 몽환적인 사운드, 미니멀한 비트, 빈티지한 드럼, 우울한 멜로디, 가성 위주의 섬세하고 차가운 보컬, 앰비언트를 연상케 하는 믹싱 등 일부 매체와 마니아들은 이 음악을 힙스터 R&B, 혹은 PBR&B(*주: 힙스터 사이에서 인기였던 맥주 브랜드 ‘팹스트 블루 리본’과 ‘R&B’의 합성어다.)라 불렀다. 명칭부터 획일적인 주류 문화 혹은 다수가 열광하는 스타일의 반대 지점에 있음을 드러낸 장르였다.

특히 PBR&B 계열의 아티스트는 주로 곡의 구조를 비틀거나 전자음악 요소를 비중 있게 도입했다.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R&B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감성적인 요소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확장했다. 가사 면에서도 기존의 R&B보다 다양한 주제와 과감한 표현이 돋보였다. 이 같은 R&B가 점점 인기를 얻고 획기적인 흐름을 형성하자 비공식 장르명이었던 PBR&B는 얼터너티브 R&B란 정식 장르명으로 대체되었다. 보다 포괄적인 이름으로 변화한 만큼 음악의 무드와 사운드를 정의하는 영역도 넓어졌으며, 보컬 스타일 역시 다채로워졌다. 무엇보다 주류 음악계에서 전통적인 R&B의 입지가 줄어들던 시점에 정말로 이름처럼 대안적인 R&B가 됐다. 미겔이 바로 그 거대한 변화의 시작과 중심에 있었다.

미겔은 프랭크 오션(Frank Ocean), 위켄드(The Weeknd)와 함께 이른바 ‘얼터너티브 R&B의 선구자 3대장’으로 일컫는다. 셋 모두 신예였지만, 각각 정규 데뷔작과 믹스테이프를 낸 상태였던 둘과 달리 미겔은 이미 첫 번째 정규 앨범 ‘All I Want Is You (Feat. J.Cole)’(2010)를 발매한 후였다. 그의 앨범에선 전통적인 R&B, 힙합 소울, 네오소울이 균형을 이룬 가운데 장르 퓨전을 통한 음악적 실험도 일부 엿보였다. 그리고 미겔의 창의적인 시도는 두 번째 앨범 ‘Kaleidoscope Dream’(2012)에서 본격적으로 심화된다. 그 제목처럼 변화무쌍하고 환상적인 꿈과 같은 작품이었다. R&B를 기반으로 록, 펑크(Funk), 일렉트로닉 등 여러 장르가 녹아들어 미겔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가 구축되었으며, 기존 R&B가 지닌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다.

관능적인 멜로디가 피어오르는 대표곡 ‘Adorn’만 들어봐도 이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소울을 근간으로 하지만 미니멀한 비트와 몽환적인 신스, 미래지향적이며 차갑게 마감된 사운드가 어우러져서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담아낸 곡이다. 보컬 면에서도 달랐다. R&B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나 애드리브를 자제한 채 담백하게 노래하는 미겔의 보컬은 팝과 R&B의 경계에서 독특한 감흥을 자아낸다. 또 다른 명곡 ‘How Many Drinks?’도 마찬가지다. 역시 신스 기반의 미니멀한 비트와 묵직한 베이스라인이 돋보이며, 프로덕션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감각적인 리듬과 겹겹이 쌓은 보컬이 곡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특히 미겔의 보컬은 한없이 부드럽고 유려하게 흐르다가도 절정에 이르러 강렬한 감정선을 드러내며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프랭크 오션의 ‘channel ORANGE’, 위켄드의 ‘Trilogy’와 함께 얼터너티브 R&B의 시대를 열어젖힌 걸작으로 칭송하는 ‘Kaleidoscope Dream’ 이후에도 미겔의 음악적 야심은 여전히 커 보였다. 마치 프린스(Prince)가 생전에 선보인 대담한 실험 정신의 계보를 잇겠다는 듯이 단순한 유행을 초월하여 더 많은 장르와 융합하며 미겔식 R&B의 범주를 확장해 나갔다. 이어진 세 번째 앨범 ‘Wildheart’(2015)에선 사이키델릭 록과 뉴 웨이브 요소를 도드라지게 녹여내는가 하면, 다음 앨범 ‘War & Leisure’(2017)에서는 사이키델릭 펑크, 얼터너티브 팝, 일렉트로닉 등이 어우러진 실험적 사운드를 통해 시대정신과 개인적 서사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게다가 정치적 메시지마저도 유려한 멜로디 속에 녹여낸다.

‘Told You So’는 좋은 예다. 연인과의 이야기를 외피 삼아 핵전쟁의 위협과 독재 정권에 관한 주제를 풀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곡은 그가 ‘War & Leisure’에서 다룬 세상에 대한 어두운 주제와 잘 어울린다. 특히 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1980년대풍의 펑키한 에너지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려는 그의 예술적 야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가 하면 ‘Wildheart’에 수록된 ‘Coffee’ 같은 곡에서는 일상적인 행위를 특별한 순간으로 변모시키는 그의 주술을 체험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나누는 행위조차 미겔의 손길을 거치면 치명적인 로맨스가 된다.

비록 ‘War & Leisure’ 이후 꽤 오랫동안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미겔은 음악 여정을 멈춘 적이 없다. 변화하는 음악 산업 속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고 꾸준히 도전을 이어왔다. 2020년대에도 EP와 싱글을 내놓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안주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베니 블랑코(Benny Blanco), 캘빈 해리스(Calvin Harris), 디플로(Diplo), 릴 야티(Lil Yachty) 등 최근 몇 년 동안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을 진행해온 모습만 봐도 그렇다. 미겔은 그들과의 작업을 매개로 사운드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실험적인 음악을 탐색해오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새 정규 앨범도 발매될 예정이다.

또한 미겔은 트렌드를 넘어 현대 R&B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모델로 평가된다. R&B의 미학에 충실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를 감각적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그의 음악은 많은 후배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팬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서일까? 미겔의 음악은 단순한 트랙 리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감성적 서사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시대의 감성이 재해석되곤 한다. 그만큼 미겔의 음악을 듣는다는 건 사랑과 욕망, 희망과 현실이 뒤섞인 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언제나 너무 달콤하고 황홀해서 길을 잃고 싶어지는 그런 꿈속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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