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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채(CINE21 기자)
사진 출처IMDb

*‘세브란스: 단절’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 안. ‘띵’ 하는 도착음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승객이 있다면, 그를 애플TV+ ‘세브란스: 단절’의 시청자로 의심해봄 직하다. 이 걸출한 시리즈의 지하층 회사원들은 출근과 동시에 ‘일하는 나(이니, Innie)’와 ‘일상의 나(아우티, Outie)’로 자아가 분리된다. 흔히 회사원이 매일 아침 자신에게 거는 출근 모드 주문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단절 시술’이라는 명백한 수술적 개입이 존재하며, 시술자는 육체는 하나지만 정신은 둘로 나뉜다. 예컨대 주인공 마크(애덤 스콧)는 아내 제마(디천 라크먼)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는 시간을 줄이고자 단절을 택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슬픈 남편 마크’와 ‘루먼 인더스트리 MDR(Macrodata Refinement) 부서 팀장 마크’가 교대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핵심은 두 자아가 자신의 활동만 기억하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그래서 이런 사내 스몰 토크가 가능하다. “이 상처는 뭐지?” “글쎄. 아우티 때 다쳤나 봐.”). 일과 일상의 완벽한 온 앤 오프. 워라밸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이 기발한 설정은 ‘세브란스: 단절’ 앞으로 구경꾼이 몰린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이 콘셉트에 그쳤다면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가 3년 만에 나온 시즌 2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거다. 연출, 극본, 미술, 음악, 연기까지 전 파트가 주제를 향한 결과 ‘세브란스: 단절’은 ‘질문자로서의 이야기’라는 역할에 도달한다.

단절된 세계에서 연결을 꿈꾸다
그렇다면 ‘세브란스: 단절’은 무엇을 묻는가.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일하는 나와 일상의 내가 깔끔히 분리되면 정말 좋을까? 단절 시술을 통한 완벽한 분리는 언뜻 높은 생산성과 삶의 질을 동시에 끌어올릴 혁신적인 라이프스타일처럼 보인다. 가족 걱정이 틈입하지 않는 일터와 업무 연락이 오지 않는 집 안은 낙원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 그 삶을 실현한 단절 노동자 중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지하층의 이니들은 매일 데이터를 정제하는 자기 업무에만 집중하고, 집 안의 아우티들은 육체적 피로 없이 개인적 시간을 보내는데도 모두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해 보인다. 양극단의 ‘언캐니 밸리’한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이들 삶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지 문득 깨닫게 된다. 그것은 연결이다. ‘세브란스: 단절’이 삶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진 기억과 고통을 제거한 사람들에게 남긴 건 효율이나 평온이 아니라 무감각과 공허함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느리지만 단호히 말한다. 인간은 단절되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간절히 연결되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연결에 대한 갈망은 ‘세브란스: 단절’의 인물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다. 마크는 죽은 제마에게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여전히 아내를 놓아줄 마음이 없다. 이니 마크가 동료들과 일으킨 혁명에서 아우티의 삶을 엿보고, 지하층의 상담사 케이시가 죽은 줄 알았던 제마란 걸 알아챘을 때 마크라는 한 인간은 그래서 심하게 흔들린다. 신입 헬리는 이상할 정도로 경직된 회사 분위기와 모호한 자기 존재에 반감을 품으며 입사 첫날부터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는 신호를 세상에 보낸다. 그 신호는 자살 시도를 할 만큼 강력하다(그리고 마크와 헬리는 서로에게 끌린다. 마크에게는 그리워하는 아내가 있고 헬리가 실은 루먼 CEO의 딸이라는 사실을 안 뒤에도 둘은 서로를 원한다.). 어빙(존 터투로)은 타 부서의 동성 동료 버트(크리스토퍼 워컨)에게 호감을 가진다. 퇴근 뒤에도 어빙이 버트를 찾는 모습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충동을 상기시킨다. 딜런(제크 체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아들이다. 어쩌다 아우티의 집에서 깨어나 자기 아들을 본 이니 딜런은 그 뒤로 아이와의 재회에 사활을 건다. 아들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음에도 본능적으로 아버지처럼 행동한다. 마크, 헬리, 어빙, 딜런. 이 MDR 부서 직원들은 의도적으로 고립된 존재들임에도 분명한 애정과 유대감을 주고받는다. 마크는 자신도 모르게 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가장 연장자인 어빙 역시 팀을 보호하려 한다. 딜런은 동료들의 이니도 바깥세상을 알 수 있게 위험을 감수하고 헬리는 팀을 위해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회사 관리자도 예외가 아니다. 단절층을 총괄하는 하모니(패트리샤 아퀘트)에게는 소속되고 싶다는 욕망이 전제한다. 가족과의 불화를 겪어온 그는 창립자 키어 이건을 신봉하며 회사에 충성한다. 완전한 분리 대신 불완전한 연결을 택한 인간들을 앞세워 ‘세브란스: 단절’은 단절의 낙원을 상상하는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연결이 고통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은 연결되어야 한다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붙잡는 그 순간들에 진짜 우리가 있다고.

우리의 웃지 못할 회사 이야기
앞선 철학적·정서적 무게감만으로도 ‘세브란스: 단절’은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이 시리즈가 유독 매혹적인 이유는 고도의 절묘한 풍자까지 해낸다는 것에 있다. ‘세브란스: 단절’은 곳곳에 블랙 코미디의 요소를 흩뿌려 이 심오한 이야기의 벽을 낮춘다. 루먼 인더스트리라는 회사 자체가 이미 거대한 풍자 장치처럼 작동한다. 일종의 종교처럼 기능하며 직원들에게 창립자의 유언과 철학을 학습시키는데, 과잉된 기업 문화와 신격화된 조직 이데올로기는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 또한 MDR 부서의 직원들은 주어진 업무가 정확히 어떤 일인지 모른다. 그저 시키는 대로 PC 화면 속 숫자 덩어리를 ‘무서운 느낌’에 따라 분류할 뿐이다. 목적성 없이 매뉴얼에만 의존해 반복하는 노동의 허무함을 정확히 포착한다. 간식과 장난감, 파티 따위로 성과를 보상받는 프로그램(W.I.C)이나 팀의 사기를 북돋우고자 제공하는 야외 단합 행사(ORTBO)도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특별한 복지처럼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직원 통제와 감시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특히 ORTBO는 야외에서조차 회사 규율과 상사의 눈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풍경을 보여주며 기업이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드러낸다. 오피스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은 제작진이 정교하게 구축한 시각적 언어로 더욱 빛난다. 루먼 사옥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니멀한데,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레미 힌들의 통제와 고립을 상징하는 건축적 디자인은 지나치게 단정한 색감과 구조까지 더해 기이한 유머를 자아낸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밀실에 조촐히 자리한 네 개의 데스크는 이니들의 존재론적 무력감을 상징한다. 카메라는 특징적으로 인물들을 먼 거리에서 혹은 정면의 대칭적 구도로 포착한다. 이는 인물들이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별성이 사라진 채 조직의 일부로만 존재한다는 걸 드러낸다. 불편하고 억제된 감정을 관객도 함께 경험하게 한다. 여기에 과잉 감정을 경계하면서도 불안과 긴장을 서서히 올리는 시어도어 샤피로의 음악이 화룡점정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총괄 프로듀서 겸 감독인 벤 스틸러의 이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간 코미디 배우로 관객을 웃겼던 그는 이제 스크린 바깥에서 서늘한 웃음을 선사하는 걸출한 창작자가 되었다.

끝내 사랑하고 마는 존재들
‘세브란스: 단절’은 지독하게 창백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러브 스토리로 부르고 싶다. 부서진 자신을, 옆에 있는 동료를 그리고 소중한 누군가를 보듬고 싶다는 감정이 ‘세브란스: 단절’ 안에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연결에 대한 갈망은 인간관계의 단순한 회복을 넘어 완전히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존재론적 진실에 닿아 있다. 서로를 기억하고, 닿고자 하는 본능을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절대 쉽지 않다. 연결되기 위해선 반드시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그 고통 중엔 감당 불가능한 슬픔과 상처도 포함되어 있다. ‘세브란스: 단절’은 이를 외면하지 않으며, 사랑이란 것이 고통을 동반함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야기 속 인물들은 상실의 아픔과 의심의 시간을 거쳐 서로를 향한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 고통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어떻게든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워간다. 단절을 넘어 연결로 가는 지난한 길 위에서 이들은 서서히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리고 이 변화야말로 ‘세브란스: 단절’의 가장 인간적인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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