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팬데믹 이후 미국 사회는 불안, 상실, 트라우마, 고립을 겪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어떤 음악을 필요로 했을까? 아마도 분노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유, 위로, 따뜻함을 제공하는 음악을 갈망해왔을 것이다. 음악은 감정을 담는 언어다. 팬데믹과 같은 전 지구적 위기 속에서 많은 이가 음악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고 버텨낼 힘을 얻었다.
장면 2. 오늘날 흑인 문화는 더 이상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넘어 트렌드의 중심에 있다. 특히 개성과 재능을 겸비한 힙합, R&B 아티스트들이 훌륭한 결과물을 통해 정서적 깊이와 역사적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이에 다양한 인종의 리스너들 역시 그들의 음악에 감응하며 공감을 표하고 있다.
장면 3. 인류 최대의 스포츠 축제라 일컫는 슈퍼볼. 슈퍼볼은 전통적으로 백인 중산층 중심의 소비 시장을 상징해왔지만, 최근 몇 년간은 달랐다. 여러 힙합, R&B 아티스트가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장식하면서 이젠 다문화성과 포용성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엔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 사회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강화된 현실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자, 그리고 여기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와 시저(SZA)가 함께 부른 ‘luther’가 있다. 5월 24일 기준 차트까지 빌보드 핫 100에서 13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역대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15곡 중 하나가 되었다. 더불어 핫 R&B/힙합 송과 핫 랩 송 차트에서도 무려 23주간 1위를 차지했다. 라디오 플레이와 음악 플랫폼 스트리밍 횟수도 굉장하다. 이처럼 ‘luther’가 불러일으킨 뜨거운 반응은 앞서 언급한 세 장면이 포개진 현실에서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켄드릭의 음악은 언제나 시대의 깊은 상처와 내면의 혼란을 정직하게 포착해왔다. 하지만 때로는 조용한 속삭임으로도 심장을 관통할 때가 있다. ‘luther’는 그런 순간 중 하나다. 켄드릭의 여섯 번째 정규작 ‘GNX’에서 가장 부드러운 이 곡은 표면적으로 사랑 노래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주제가 담겼다. 일례로 켄드릭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안에서 사랑이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지니는지를 고찰하는 듯하다.
곡에 샘플링된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와 셰릴 린(Cheryl Lynn)의 ‘If This World Were Mine’(1982)은 단지 프로덕션만을 위해 활용된 것이 아니다. 샘플은 기억의 잔향과도 같다. 그래서 샘플링은 단순히 소리를 빌려오는 것을 넘어 종종 원곡을 둘러싼 시대의 공기와 감정의 톤까지 함께 이식하는 행위처럼 여겨진다. 켄드릭과 시저는 루더 밴드로스가 노래하던 “이 세상이 내 것이라면(If this world were mine)”이란 가사를 번갈아 부르며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기억이자 신념처럼 받아들이게끔 한다. 또한 사랑은 이 세상을 상상하고 재구성하는 권력의 행위라고 역설하는 듯도 하다. 그런 가운데 “If this world was mine”이란 문장은 반복될수록 중력처럼 무게를 얻는다.

예컨대 다음에 이어지는 “이 세상이 내 것이라면, 너의 적들을 신 앞에 데려갈 거야, 빛으로 인도하고, 불로 엄중히 심판하겠어(If this world was mine, I'd take your enemies in front of God, Introduce 'em to that light, hit them strictly with that fire)”란 가사에서는 신의 심판과 개인의 사랑을 중첩시키는 대담한 이미지로 사랑을 신성화하는 동시에 보호의 무기로도 사용한다. 특히 ‘luther’에서 켄드릭은 유토피아적 상상을 품지만 그의 말투에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비관이 겹쳐 있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이든지 해주기 위해 ‘내 것이었으면’ 하는 세상은 억압된 현실을 반영한 역설적 구조물로 읽히기도 한다. 곧 그가 바꾸고자 하는 세계가 (인종, 젠더, 계급, 정치적 갈등 탓으로) 얼마나 고장났는지를 반증하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켄드릭이 잘하는 것이다. 복잡한 감정을 구조화한 다음 이를 통해 현실과 그 너머를 반성하며 살피게 만드는 일. 루더 밴드로스의 원곡은 1980년대 흑인 커뮤니티 안에서 탈정치적 공간으로 간주되었지만, 켄드릭은 이를 정치화된 정서 공간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위로와 감정적 회복까지 제공한다. 격앙된 정치적 메시지나 디스가 아닌 연인에게 속삭이듯이 말이다.
한편, 켄드릭의 선언적 사랑에 시저는 은근한 불신과 내면의 울림을 내비친다. ‘세상이 내 것이라면’이란 가정에 ‘세상이 그녀의 것이 아니었기에’ 겪어야 했던 구조적 고통을 환기시키는 식이다. 시저의 목소리는 어떤 질감으로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마치 부유하는 슬픔 혹은 쓸쓸해 보이는 별처럼 떠 있으면서 라마에게 응답한다. 오늘날 보컬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심오한 주제의 마지막 퍼즐까지 완벽하게 맞출 수 있는 최고의 힙합과 R&B 아티스트 조합은 누구일까? 난 이 두 아티스트 외에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luther’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주목받은 공간은 ‘슈퍼볼 하프타임 쇼’였다. 켄드릭은 종종 대안적인, 비상업적인 힙합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이 곡은 가장 미국적이고 상업적인 플랫폼에서 발표된 것이다. 켄드릭은 이 플랫폼을 활용하여 가장 솔직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내세워 ‘사랑’을 말함으로써 전 세계 많은 이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luther’가 인기 있는 제일 큰 이유는 좋은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드레이크(Drake)와의 살벌한 디스전 이후 서정적인 R&B를 선보인 라마의 이례적인 행보도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다만 그 폭발적인 반응의 배경을 음악적 완성도나 인상적인 멜로디만으로 설명하긴 부족하다. 그래서 현대 미국 사회의 구조적 현실과 대중의 정서적 욕망이 깊게 맞물려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켄드릭은 늘 한발 앞서 시대를 비추는 아티스트였다. 그는 억압의 메커니즘을 뜯어보며 개인의 고통과 사회구조의 연결 고리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luther’에서도 그의 장기는 여전히 돋보인다. 무엇보다 라마는 이 곡에서 단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이 세상이 당신의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을 바꾸겠습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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