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안에서 ‘비비’라는 인물은 늘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모습은 처절한 모양으로 묘사된다. ‘인생은 나쁜X’에서 그는 홀로 오롯이 살아낼 수 없는 존재다. 사랑하는 상대를 구원이라 생각한다. 그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그가 떠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생일 케이크’를 먹는 것조차 허락이 필요할 정도의 주종 관계 양상으로 표현된다. ‘Lowlife Princess: Noir’에서는 불공평한 세상에서 부족하게 태어난 인물로 노래한다. 이러한 설정 안에서도 ‘인생은 나쁜X’처럼 처절한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보다 공격적이다. 스스로를 멸시하면서도 자신을 무시하는 누군가를 향해 칼을 찌를 듯 행동한다. 동시에 사랑으로 포장된 욕망을 좇는다. 아무리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인은 구원이 될 수 없다. ‘나’를 오롯이 설 수 있게 해주는 건 ‘나 자신’이다. 어쩌면 그는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기 전, 모든 것을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욕을 하고, 그 욕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기도 하면서. 사랑은 그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남기고, 그의 통제 바깥에 서 있다. 결국 사랑에 의해 망가진 자신을 혐오했을 것이다.
‘EVE: ROMANCE’에서 그는 혼자인 자신을 견디지 못해 또 하나의 ‘나’를 복제한다. 이브(EVE)와 그리고 복제인간 이브(EVE)-1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전작에서 그려진 ‘비비’라는 인물의 행적과 감정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 앨범에서 자신을 복제하는 행위는 일종의 위로처럼 느껴진다. 사랑을 갈구했던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싶어서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 ‘이브’는 한때는 삶의 목적이자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했던 사랑의 면면을 빤히 응시하기도, 샅샅이 관찰하기도 한다.

사랑의 근원 혹은 사랑의 모양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초의 인류를 떠올려보자. 어느 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떠올릴 것이고, 생물학적 진화론에서는 LUCA(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를 언급할 수도 있다. 그 둘의 공통점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여러 질문들이 떠오른다. 태초부터 인류는 혼자일 수 없고, 홀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였다면? 그러한 생체적 구조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탐욕을 심어주었다면? 그는 ‘종말의 사과나무’를 통해 은연중에 노래한다. 사랑은 어쩌면 너무나도 탐스러운 선악과 같은 거라고.
그러한 사랑의 정의는 ‘책방오빠 문학소녀’에서도 이어진다. 이 곡에서 비비는 사랑과 욕망을 은유하는 방식으로, 가장 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야기의 표면은 단출하다. 우드 향이 가득한 작은 서점, 짝사랑하는 책방 오빠 그리고 몰래 그 오빠를 바라보는 소녀. 그러나 그 안에는 탐욕과 갈망, 억눌린 감각이 단어마다 숨어 있다. ‘펼쳐 보다’, ‘침 묻히다’, ‘꼬집다’, ‘넘기다’, ‘읽다’, ‘갈피를 꽂다’ 같은 동사들은 단지 독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욕망을 대변하는 언어가 되고, 책은 하나의 몸이 된다. 신체를 직접적으로 읊는 ‘몸’, 자신이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Sugar Rush’, 성적 행위를 환기시키는 ‘Burn It (feat. DEAN)’까지 비비가 말하는 사랑은 결국, 욕망의 감각적 지도다. 그에게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경험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 또한 이를 알게 되었다는 듯 ‘Real Man’을 통해 허무주의를 노래한다. 그가 탐하던 것들이 다 무색하다는 듯이. 그 뒤로 깨달은 사랑은 정서적이고 사소한 것이다. 이를테면 곁에 있지 않아도 꿈결에 등장할 정도로 그리워하는 것(‘왔다갔는교’), 또는 같이 나눠먹는 달디단 ‘밤양갱’ 같은 것. 피부를 비비고 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그저 같은 기억을 공유한 것이, 떠나간 후에도 미련처럼 남아 있는 감정이 사랑의 또 다른 모양일지도 모른다.

사운드로 펼쳐진 사랑의 스펙트럼
비비는 이러한 감정 서사를 견고하게 끌고 가는 동시에, 사운드의 결을 치밀하게 다듬으며 앨범 전체를 조각한다. 첫 곡인 ‘종말의 사과나무’에서는 하이햇과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어딘가 시니컬하면서도 뚱한 태도로 금단의 유혹을 내미는 듯한 사운드를 구축하여 앨범의 시작을 흥미롭게 그리더니, 이어지는 ‘홍대 R&B’에선 그루비한 기타 사운드로 분위기를 축조하며 축축한 홍대 앞 골목을 눈앞에 그려 넣는다. 감각적인 가사로 ‘몸’을 묘사하는 노랫말엔 스네어와 베이스로 그윽한 어둠을 표현하고 그 위에 색소폰 솔로로 재지한 사운드를 덧입혀 가사가 가진 분위기를 농밀하게 빚어낸다. 라틴 사운드를 구현한 ‘Pygma girl’, 귀엽고 살짝은 새초롬한 ‘책방오빠 문학소녀’, 힙합 붐뱁 사운드를 구현한 ‘Real Man’까지 각기 다른 결의 음악들이 앨범을 풍성하게 만든다.
뒤이어 ‘왔다갔는교’가 등장하며 앨범의 분위기가 크게 전환된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지점은 사랑의 또 다른 모양을 담은 챕터의 시작점이다. 앨범 2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챕터의 재밌는 점은 사운드의 공감각화다. 조금은 씁쓸한 가사와 밝은 사운드가 조화를 이루며 사랑의 모양이 눈으로 보이게끔, 손끝으로 느끼게 만드는 듯하다. 신시사이저와 브라스, 사이사이에 겹겹이 쌓인 코러스로 청량하면서도 아련한 분위기를 가진 멜로디는 그리움이 담긴 가사와 맞물려 쓸쓸한 마음이 한여름 밤의 도시 풍경으로 표현된다. 마칭밴드풍의 사운드를 가진 ‘밤양갱’은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처럼 느껴지지만 어딘가 씁쓸한 감정이 깔려 있다. 밝은 멜로디 아래 감춰진 그리움은 밤양갱처럼 진득하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해야 할 일
‘한강공원’부터는 또 다른 챕터의 시작이다. 음악적 분위기도 가사에 담긴 이야기도 앞 챕터와는 다르게 쓰여진다. 장르적으로는 미니멀한 구성이 두드러진다. ‘한강공원’은 피아노 사운드로 미니멀하게 진행되고 ‘행복에게’, ‘겨울(미발매)’은 기타 사운드로 잔잔하게 펼쳐진다. 앞선 프로덕션들에 비해 비교적 덜어진 구성은 자연스레 가사를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비비는 다 덜어낸 음악 속에서 자신을 위로한다. “이제 곧 해가 뜰 테니까” 괜찮다고 말하고(‘한강공원’) “나도 언젠가는 따사로운 봄”이 될 거라며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한다. (‘행복에게’) 마침내 홀로 서서 “기다리다 보면 흐름이 끝나는 곳에서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겨울(미발매)’).
‘한강공원’부터의 노래들에서 비비는 더 이상 타인의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누군가 곁에 없어도, 누구의 사랑을 확인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다독이고, 혼자 있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비워낸 사운드 위에 놓인 조심스러운 멜로디는 이제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손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토닥이는 손길처럼 들린다. 결국 이 앨범에 담긴 사랑은 비비 자신을 향한다.
그는 ‘EVE: ROMANCE’의 앨범 소개 글에 이렇게 적었다. ‘Ps. 다음 앨범은 다큐멘터리의 에라입니다. 저에 대해 이야기할 거예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사이의 모든 애매한 것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온전히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먼저 이 모든 감정의 찌꺼기들을 지나와야 했다. 자신을 망가뜨렸던 사랑의 면면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상처로 뒤덮인 자신을 위로해야 했다. 그렇게 이브는 더 이상 자신을 복제하지 않는다.
- ‘Ruby’, 제니라는 이름이 피워낸 공명2025.05.07
- 테이트 맥레이, 삶의 모순 한가운데2025.04.17
- 허윤진이 음악으로 그리는 사랑의 몽타주202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