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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음악평론가)
사진 출처Little Simz X

영국 런던 북부로부터 시작된 목소리가 세계 힙합 씬을 뒤흔들고 있다. 리틀 심즈(Little Simz) 이야기다. 그는 훌륭한 랩 실력과 심도 있는 주제의 가사, 탁월한 앨범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불길처럼 피어났다. 랩은 그에게 단순한 표현의 수단 이상이다. 살아남고 세상을 구조화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심즈는 랩을 통해 정체성의 조각들을 끼워 맞췄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지, 여성이라는 것과 흑인이라는 사실이 사회 속에서 어떤 무게를 갖는지 등등. 그의 음악은 이 같은 질문의 연속선상에서 태어났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다수의 신예 아티스트들이 대형 레이블의 울타리 속에서 방향을 찾을 때 심즈는 혼자의 힘으로 나침반을 살펴 항로를 찾았다. 에이지 101 뮤직(Age 101 Music). 그가 설립한 독립 레이블 이름이다. 이 선택만 봐도 심즈의 철학적 성향과 창작 윤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게다가 엄청난 다작가다. 2010년에 첫 번째 믹스테이프(Mixtape) ‘STRATOSPHERE’를 내놓은 이래 2015년 9월에 정규 데뷔작 ‘A Curious Tale Of Trials + Persons’를 발표하기까지 무려 3장의 또 다른 믹스테이프와 7장의 EP를 발매했다. 그것도 고른 완성도의 음악들을 담아서 말이다. 

무엇보다 심즈의 음악은 단지 음악 차트에 머무르지 않는다. 힙합이라는 장르 안에서 젠더, 인종, 성향, 자아, 정신 건강 등 수많은 교차점에 위치한다. 그리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여성이고, 흑인이고, 내향적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 그 어느 것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그만큼 심즈는 어떤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더불어 랩을 사회적 운동으로, 감정적 도구로, 철학적 장르로 확장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그런 심즈의 가사는 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교육적이며, 때로는 거리의 시처럼 저항적이다. 

‘A Curious Tale Of Trials + Persons’(2015)는 이미 완성형이나 다름없는 신예 아티스트가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 방식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두 번째 정규작 ‘Stillness In Wonderland’(2016)에서는 자아를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풀어놓았고, 이후 ‘GREY Area’(2019)를 통해 평단의 극찬 속에서 위상을 높였다. 이어진 앨범 ‘Sometimes I Might Be Introvert’(2021)는 그야말로 문학이자 연설이며 장대한 연극이었다. 곡 사이에는 서사적 독백과 오케스트레이션이 혼재되었고, 은유와 진실 섞인 문장의 끝은 시작처럼 다가왔다. 심즈는 이 앨범으로 그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매한 최고의 앨범을 선정하는 ‘머큐리상(Mercury Prize)’을 수상했다. 그리고 전 세계 많은 평론가들이 그를 “우리 시대 가장 지적인 래퍼 중 하나”로 꼽기 시작했다. 다음 앨범인 ‘No Thank You’(2022) 역시 상업성과 거리를 둔 채 완성한 역작이다. 음악 산업과 미디어에 대한 거절의 언어를 통해 치열한 자기 탐구와 업계 내부의 위선을 담아냈다. 

이렇듯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지만, 심즈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돈 문제였다. 그는 올해 초 170만 파운드(약 31억 4,508만 원)의 대출금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 프로듀서 인플로(Inflo)를 고소했다. ‘GREY Area’부터 쭉 함께 앨범을 만들어온 인플로는 이 돈의 대부분을 심즈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라이브 공연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심즈는 2024년에 세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플로는 그의 정말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가장 가까웠던 협력자로부터 배신당한 셈이다. 놀랍게도 심즈는 분노와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고 이를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여섯 번째 정규 앨범 ‘Lotus’를 만들어낸 것이다. 새로운 프로듀서 마일스 클린턴 제임스(Miles Clinton James)가 함께였다. 

그러니까 ‘Lotus’는 배신과 분노, 상처와 회복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래서 심즈가 오래도록 천착해온 주제, 이를테면 고통, 갈등, 치유에 대한 가사가 더욱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첫 곡 ‘Thief’부터 그는 관계의 붕괴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상처받은 심경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내가 평생 알고 지낸 이 사람은 변장한 악마처럼 다가왔어(This person I've known my whole life coming like the devil in disguise)”. 비록 직접적으로 대상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지만, 해당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둑’을 뜻하는 제목이 누굴 가리키는지 알 수밖에 없다. 이 곡에서 심즈의 래핑은 마치 법정 증언처럼 들린다. 플로우는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는 억눌린 듯한 분노가 느껴지며, 심장을 짓누르듯 조여오는 역동적인 비트가 배신이란 감정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포착했다.

‘Thief’가 분노와 배신의 감정으로 채워졌다면, ‘Hollow’는 ‘Lotus’의 감정 궤도에서 분노와 치유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심즈는 고독과 상실이 축조한 공허의 공간을 깊은 자각과 사유 그리고 차분하며 아름다운 현악 선율로 재구성했다. 이처럼 감정의 나락을 섬세하게 조명한 작업은 후반부에 수록된 ‘Lonely’에서도 이어진다. 심즈는 앨범을 만들면서 느낀 외로움과 잃어버린 자신감을 고백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시적인 언어로 무너져가는 한 개인의 고독을 토로한다. 서정적인 피아노와 기타 리프, 서서히 차오르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현악 파트와 몽환적인 코러스까지, 가사적으로나 프로덕션적으로나 앨범에서 가장 내면지향적인 순간이자 조용히 폭발하는 곡이다.

그런가 하면 ‘Blood’란 곡에서는 멀어져 가는 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사이의 거리감과 해결 방안을 이야기한다. 같은 영국의 베테랑 래퍼 레치 32(Wretch 32)가 피처링했다. 두 아티스트는 전화를 하며 각자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그러는 동안 우아하게 스며든 스트링이 힙합의 중심축을 감싸고 사운드는 감정의 풍경이 되며 울컥한 감흥을 자아낸다. 심즈는 앨범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궤적을 섬세하게 배치한 가운데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앨범에서 가장 전통적인 힙합 프로덕션을 들려준 ‘Free’에서 본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결국 사랑의 힘임을 강조한다. 

‘Lotus’는 음악적 완성도와 정서적 깊이가 참으로 빼어난 앨범이다. 힙합의 골격 위에 소울, 재즈, 아프로비트(Afrobeat), 클래식 등이 절묘하게 융합된 프로덕션은 실험적이며 세밀한 사운드 디자인이 돋보인다. 마일스 클린턴 제임스와의 새로운 협업은 인플로의 빈자리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이다. 그 안에서 예의 감탄을 자아내는 시적 언어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심즈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을 온전히 껴안으며 아픔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힘을 발견하는 법을 노래한다. 그리고 래핑은 감정의 파동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때로는 격렬하게 쏟아지고, 때로는 사려 깊게 가라앉는다. 

‘Lotus’에 담긴 곡 대부분은 ‘듣기 편한’ 음악과 다소 거리가 있다. 깊이 음미하지 않으면 쉽게 놓칠 수 있는 감정의 결, 미묘한 사운드의 층위를 지닌다. 그래서 한 번의 감상으로는 진가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듣다 보면 어느새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서사로 확장되는 순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흙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연꽃(Lotus)처럼 이번 앨범에서 심즈는 상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예술가의 모습을 우아하게 증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랩으로 쓴 자기 서사 속에서 그는 우리 모두를 연꽃의 잎 위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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