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R&B는 과거의 그림자를 품으면서도 새로운 날개를 달고 있다. 전통적인 소울의 울림 위에 힙합 리듬이 얹히고, 전자음의 차가움이 더해지는가 하면, 세계 각지의 리듬이 스며든다. 그렇게 태어난 노래들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 그 중심에서 몇몇 아티스트들은 유난히 또렷한 별빛으로 떠오른다. 그들은 단지 멜로디를 부르는 것을 넘어 감정을 조율하고 시간을 기록하기도 한다. 머라이어 더 사이언티스트(Mariah The Scientist)처럼 말이다. 그는 현재 R&B 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본명 뒤에 붙인 ‘과학자(Scientist)’는 단순한 예명이 아니다.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에서 뮤지션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감정을 실험하고 사랑을 해부하며, 상처의 조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연구자처럼 노래한다. 배신, 집착, 소유욕과 같은 위험한 감정들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한다. 그만큼 머라이어의 가사는 서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매우 날카롭고 통찰력 있다. 그리고 이 점은 그를 동시대 많은 R&B 가수들과 구분 짓는다.

데뷔 앨범 ‘MASTER’(2019)에서부터 트렌드에 민감하지 않은 접근이 돋보였다. 그는 미니멀한 프로덕션 위에서 억제하는 듯한 보컬을 통해 주류 R&B 음악들과 차별화했다. 특히 기존의 많은 여성 싱어들이 내비친 수동적 정서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적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사랑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도 찾아보기 어렵다. 예컨대 그의 가사 속 화자는 상처 입은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한마디로 화자의 위치가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을 듣다 보면 사랑이라는 관계 권력을 곱씹게 된다.
새로운 정규작 ‘HEARTS SOLD SEPARATELY’에서 머라이어가 그려온 감정의 궤적은 더더욱 깊어졌다. 이른바 ‘감정의 해부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사랑에 대한 냉혹한 진실을 담은 듯한 앨범 제목은 물론, 서사의 은유적 시작점과도 같은 커버 아트워크(‘녹색의 장난감 병사’)만 봐도 그렇다. 사랑을 위해 총구를 겨누지만, 결국은 아이의 장난 속에 소모되고 버려지는 전사들. 머라이어는 사랑을 무작정 찬미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하듯 사랑이 감정의 전쟁터라면, ‘HEARTS SOLD SEPARATELY’는 그 전장을 집요하게 더듬은 기록서다. 사랑은 여기서 거래되고, 파괴되고, 다시 재조립된다. 그리고 그 기록은 담백하지만 여운이 긴 목소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리드 싱글 ‘Burning Blue’는 사랑이란 감정을 마주하고 다루는 머라이어의 남다른 방식을 대변한다. 제목에 담긴 모순적 이미지 속에서 사랑의 열기와 냉기가 같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했다. 머라이어는 타는 듯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혹시 닥칠지도 모를 상대의 배신을 몹시 경계한다. 그렇게 푸른 불길처럼 차갑고도 뜨거운 감정을 병치하면서 순간의 전율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곡의 무드와 멜로디는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런가 하면 ‘Is It a Crime’에서는 금지된 사랑과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열망을 탐구한다. 또 한 명의 놀라운 싱어송라이터 칼리 우치스(Kali Uchis)가 함께했다. 두 아티스트의 태도는 확실하다. 사랑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겠다는 것. 서로 다른 질감의 두 보컬이 윤리적 질문을 남기는 관계가 지닌 죄와 욕망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듯해 더욱 흥미롭다. 특히 머라이어의 선형적인 톤의 보컬이 칼리 우치스의 곡선적인 톤의 보컬과 대비되며 곡에 내포된 윤리적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한편 앨범의 사운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1980년대’다. 당대의 R&B와 팝이 지닌 매끈함을 오늘날의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융화하여 다시 한번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보편적인 장르 퓨전과는 다르다. 1980년대 음악 특유의 매끈함을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현대적 사운드로 빈 공간을 채웠다. 그 덕분에 모든 곡이 유기적이다. 당시의 팝, R&B, 소프트 록 스타일이 어우러진 ‘Eternal Flame’이나 파워 발라드까지 껴안은 ‘More’ 등의 곡에서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이 같은 프로덕션이 서사를 뒷받침하는 부분도 ‘HEARTS SOLD SEPARATELY’의 절묘한 지점이다. 얼터너티브 R&B에 기반을 둔 ‘Is It a Crime’의 몽환적인 사운드와 곡조가 다음 곡 ‘Burning Blue’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구조라든지 ‘Rainy Days’에서 약한 빗방울처럼 차분하게 시작한 피아노가 폭우의 전조처럼 쌓여 가는 전개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곡 ‘No More Entertainers’도 빼놓을 수 없다. 그윽하게 내려앉는 현악 사운드가 일방적인 애정으로 엮인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머라이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하다. 참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다.
이번 앨범을 듣고 느낀 바, 머라이어 더 사이언티스트는 확실히 오늘의 유행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의 내일을 예고하는 아티스트다. 음악적으로 섬세한 동시에 매우 과감하다. 그래서 때로는 반복해 들어야만 세밀한 변주와 감정의 균열을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그가 만든 음악 속에서 욕망, 불안, 배신, 집착, 상실, 회복 등의 감정이 혼합되어 하나의 화학식을 이룬다. 이러한 부분이 머라이어가 ‘과학자’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머라이어는 8월 22일 공개된 ‘AP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앨범 제목을 정한 배경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나 관계, 우정, 결혼, 심지어 직업의 기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열정적인 측면도 마찬가지고요. 마음이 없으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인터넷에서 논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제가 올린 대부분의 콘텐츠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그리고 제 대시보드에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정말 흥미로워요.”
프로덕션, 서사, 정서의 세 축이 교차하는 ‘HEARTS SOLD SEPARATELY’는 단언컨대 머라이어의 최고작이다. 그만큼 그의 창작 여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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