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물이란 무엇일까? 단순하게 보자면 “마법을 쓰는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복잡한 층위가 존재한다. 먼저 ‘평범한 소녀가 우연히 마법의 힘을 일시적으로 얻게 된다는 설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마법의 힘을 쓰기 위한 ‘마법 도구’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주 소비층인 ‘소녀’들이 이입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서사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일릿은 이 마법소녀물의 서사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2023년 JTBC에서 방영한 걸그룹 서바이벌 프로그램 ‘알유넥스트’를 통해 데뷔한 아일릿은 현실 속 소녀(연습생)에서 마법소녀(아이돌)로 변한다는 스토리를 구현해 냈을 뿐 아니라 데뷔 이래로 꾸준히 ‘마법소녀’ 콘셉트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아일릿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마법소녀물을 참고하면 좋을지 여섯 개 작품을 뽑아봤다. 최대한 다양한 시대상의 작품을 골라왔으니 아는 작품이 있으면 반갑게, 모르는 작품이 있다면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좋을 듯하다. 순서는 방영 연도순이다.
‘천사소녀 새롬이’(원제: 마법의 천사 크리미 마미(魔法の天使クリィミーマミ))
스튜디오 피에로에서 제작하여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방영했던 작품이다. 국내에는 ‘천사소녀 새롬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스튜디오 피에로는 평범한 소녀가 성인 여성으로 변신하여 아이돌 등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 피에로만의 ‘마법소녀’ 시리즈를 계속 제작하게 된다. 내용은 간단하다. 10세 소녀 ‘장유리(모리사와 유우)’는 우연히 다른 세계에서 온 요정들을 도와주게 되는데, 그 보답으로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콤팩트’를 선물 받는다. 이 도구를 통해 17세 미소녀 ‘새롬이(크리미마미)’로 변신한 유리는 이후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리는 평범한 일상과 연예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건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어른으로서 한 발짝 성장하게 된다. 마법이 만들어낸 인기 아이돌이라는 자아와 현실 속 본래의 자신 사이를 오가며, 주인공 유리의 감정과 성장 과정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방영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이돌물과 마법소녀물을 최초로 접목한 작품인 동시에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상을 처음으로 확립해낸 이 작품은, 아일릿이 표현해오고 있는 ‘SUPER ME’와 ‘REAL ME’ 사이의 괴리와 가장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있는 곳이 없지만, 2026년에 스튜디오 피에로가 28년 만의 신작 ‘마법의 자매 룰루토 릴리(魔法の姉妹ルルットリリィ)’를 제작 및 방영한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그쪽을 살펴봐도 좋겠다.

‘달의 요정 세일러 문’(원제: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美少女戦士セーラームーン))
무엇보다 아일릿의 이번 ‘bomb’ 앨범을 보면서 가장 많은 이들이 떠올린 작품은 역시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일 것이다. ‘little monster’ 뮤비이자 ‘bomb’의 브랜드 필름을 보면 민주와 모카, 원희가 이마에 착용한 티아라나 롱 헤어 트윈테일을 한 민주의 헤어스타일, 다리나 팔에 착용한 뱅글이나 초커 등의 요소들은 ‘세일러 문’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해당 영상에서 여러 마법 도구들이 폐기되거나 모여 있는 모습이 나올 때, 아는 사람은 알 만한 익숙한 아이템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타케우치 나오코가 그린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세일러 문’은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5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세일러 문’은 말 그대로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은 21.7%를 찍고(간사이 지방 한정) 처음으로 발매된 완구였던 ‘문 스틱’은 약 50만 개에서 60만 개가 팔리는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1997년에 처음 방영되어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하게 흥행했으며, 지금까지도 마법소녀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기에 힘입어 2014년에는 탄생 20주년 기념 프로젝트로 새로이 리부트되어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크리스탈’ TV 시리즈가 제작되었고 2016년까지 방영했다. 현재 TV판 애니메이션은 구작과 신작 모두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이 없지만, 각각 2021년과 2023년에 공개된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이터널’과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코스모스’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꼬마 마법사 레미’(원제: 오자마녀 도레미(おジャ魔女どれみ))
비하인드 필름이나 자체 콘텐츠에서 아일릿 멤버 다섯 명이 우당탕탕 알콩달콩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다. 개성이 뚜렷한 다섯 명의 캐릭터 ‘도레미’, ‘유사랑’, ‘장메이’, ‘진보라’, ‘나모모’가 견습 마녀로서 좌충우돌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차츰 어른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상 속에 마법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스토리텔링 덕에, 국내에 방영될 때에도 주인공과 같은 연령대인 초등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bomb’의 브랜드 필름의 메이킹 필름에 등장하는 필름 크리에이터 디렉터 타나베 토시히코와 필름 디렉터 야나기사와 쇼는 “특별한 사람들만 마법소녀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나도, 너도, 너희도, 아이돌도, 평범한 사람도,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마법소녀라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We are all magical girls.”라고 이야기한다. 이 메시지야말로 마법을 소소한 규모로 축소하고 환상 속의 변신 대신 옷을 갈아입는 형태의 변신을 그려낸 ‘꼬마 마법사 레미’ 시리즈의 제작 방향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브랜드 필름에서 민주가 직접 입으로 전하는 “Remember, The Magic inside you.”라는 대사에 대해, 두 사람은 “살다 보면 매일 기분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슬픈 일도 겪고 스스로를 믿기 어려운 그런 매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예를 들면 자기가 어렸을 때 아직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자신감이나 마치 마법 같은 마음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런 매일과도 고개를 들고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애니메이션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라이트 노벨 ‘오자마녀 도레미 1620s’ 시리즈에서도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마녀를 그만둔 다섯 명은 각자가 그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괴로운 일도 겪고 힘든 일도 겪는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마법의 힘을 되찾고 재회한 친구들과의 우정을 통해 고난을 해결하며 한걸음 더 성장하게 된다. 현재 해당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확정된 상태다. ‘꼬마 마법사 레미’를 보고 자란 성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꼬마 마법사 레미: 견습 마법사를 찾아서’ 또한 국내의 여러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있으니 한번 참고해보자.

‘베리베리 뮤우뮤우’(원제: 도쿄 뮤우뮤우(東京ミュウミュウ))
‘빌려온 고양이’를 듣자마자 이 작품 ‘베리베리 뮤우뮤우’를 떠올린 이들이 나 말고도 또 있을지 궁금하다. 주인공인 ‘홍베리(모모미야 이치고)’는 멸종 위기에 놓인 이리오모테삵의 DNA를 받아 고양이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형태의 ‘뮤 베리(뮤 이치고)’로 변신한다. 변신을 할 때는 재미있게도 리듬체조와 비슷한 춤을 추며 변신한다. ‘뮤 베리’뿐 아니라 ‘뮤 민트’나 ‘뮤 레타스’ 등 각 멤버들 또한 변신할 때마다 캐릭터에 맞는 춤을 춘다. 또한 홍베리는 마법소녀로 각성한 후에 놀라거나 지나치게 긴장하면 고양이 귀와 꼬리가 나오고 키스를 하면 고양이로 변하기도 한다. ‘빌려온 고양이’ 속 가사 “심장은 oh là là 두근대 이 순간 근데 왜 뚝딱대 빌려온 고양이가 돼”나 “날까? 아닐까? 네 맘속 그 아이 털 바짝 세워 feel you”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게 재밌다. 이 작품의 경우 일본에서는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방영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그보다 1년 5개월 후인 2004년 8월에 소개되어 꽤 인기를 끈 바 있다. 애니메이션 방영 20주년에 맞춰 지난 2022년과 2023년에 리메이크판이 제작되었고, 국내에도 KBS Kids를 통해 정식으로 더빙판이 방영되었다.

‘슈가 슈가 룬’(원제: 슈가 슈가 룬(シュガシュガルーン))
“당신의 하트를 픽-업!” 일본에서는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했고,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여름에 방영된 안노 모요코 원작의 애니메이션이다. 마계에서 여왕 쟁탈전을 위해 인간계로 내려온 ‘쇼콜라’와 ‘바닐라’가 인간의 하트를 최대한 많이 모으기 위해 경쟁하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기도 하면서 성숙해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쪽 눈에다 브이 자를 그린 손가락을 갖다 대면 상대방 마음속에 있는 하트를 볼 수 있다는 ‘엿보기 안경’과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많이 모아서 경쟁한다는 내용 등 여러 키치한 설정으로 당시 10대 여자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런 키치함은 아일릿의 콘셉트에서도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래 가사 속 아일릿은 어쩔 땐 당당하고 발랄하고 솔직한 쇼콜라처럼(“숨기고 싶지 않아 자석 같은 my heart 내 맘의 끌림대로 너를 향해 갈게 boy”, “내가 먼저 널 좋아하면 어때? 내 마음은 내가 정할 거야 baby”), 어쩔 땐 수줍음을 타고 감성적이지만 생각도 많은 바닐라처럼(“사랑은 괴롭지 또 늘어가는 고민 이런 내 맘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한순간 당겨진 먹구름 lever 질투 대폭발해 새빨간 flavor”)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포인트 중 하나다.
특히 원작가인 안노 모요코는 엄청난 패션 및 뷰티 마니아로 소문나 있는 만큼 ‘슈가 슈가 룬’뿐 아니라 ‘젤리 빈즈’, ‘사쿠란’ 등의 작품에서 세련된 패션 센스를 자랑한다. 아일릿 역시 교복과 스포츠 웨어, 캐주얼 스타일부터 마법소녀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레이스 의상과 볼드한 디자인의 장신구까지, 여러 가지 스타일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다양한 콘셉트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25년 7월, 신작 애니메이션 제작이 발표됨에 따라 ‘슈가 슈가 룬’을 기억하는 이들은 곧 새로운 작화로 쇼콜라와 바닐라를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마치 아일릿이 현실 속에서 마법소녀의 서사를 이어가듯, ‘슈가 슈가 룬’ 역시 새로운 세대에게 그 마법을 전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마법소녀의 서사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마치 아일릿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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