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이연우(게임문화연구자)
사진 출처STEAM

2025년 10월, 중국풍 옷을 입은 한 여성이 게임 관련 유튜브 채널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화려한 장식을 한 채 화면을 응시하는 이 여인은 ‘몰입력’, ‘개복치(*필자 주: 게임 문화에서 극도의 나약함과 불안정성을 상징한다. 개복치가 다양한 방식으로 돌연사하는 것을 다루는 모바일 게임 ‘살아남아라! 개복치 (일본명: 生きろ! マンボウ)’가 유행하며 게이머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궁중암투’ 등의 자극적인 키워드와 함께 다양한 게임 유튜버들에게 소개되며 시청자들의 화면을 장악해 나갔다. 화면 속 여인은 바로 ‘성세천하: 여제의 탄생(이하 ‘성세천하’)’이라는 게임의 주인공으로, 중국 유일의 여제인 측천무후(또는 무미랑)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이 여성의 입장이 되어 100가지가 넘는 분기점 속에서 선택지를 고르며 여제로 나아가는 주인공의 역경을 함께한다. 

숏폼 드라마의 게임화
게이머로서는 다소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 고장(古裝)극이 국제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10년 말부터 ‘삼생삼세 십리도화’, ‘연희공략: 건륭황제의 여인’, ‘진정령’ 등이 높은 퀄리티의 의상과 탄탄한 각본으로 아시아권 팬덤을 구축했으며, ‘미미일소흔경성’, ‘치아문단순적소미호’ 등의 현대 로맨스 드라마와 함께 ‘중드’의 시장을 열어나갔다. 최근 한국에서의 인기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티빙과 웨이브, 왓챠에 등록된 중화권 드라마는 각 800편 이상으로 3년 전과 비교해 약 2배 이상 증가했으며, 그중 웨이브에서의 올초 해외 드라마 중 중국 드라마 시청 점유율은 50% 이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중국 궁중 암투물인 ‘성세천하’의 흥행 역시 위 ‘중드 흥행’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수많은 ‘중드’ 중에서도 ‘성세천하’는 최근 유행하는 ‘숏폼 드라마’와 궤를 같이한다. 근래 미디어 콘텐츠 산업은 점차 ‘틱톡’, ‘숏츠’, ‘릴스’와 같이 짧은 집중력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존 1시간 분량의 영화나 드라마를 10분 내외로 축약하는 것부터 드라마를 아예 짧은 길이로 만드는 것까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숏폼 드라마는 회당 길이가 1분에서 10분 정도로 제작된 드라마로, 일반적으로 50개에서 10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짧은 시간에 주요 주제를 명확하고 완결성 있게 다루면서도 다음 에피소드에 대한 흥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부분의 영상 길이는 3~5분 정도다.

‘성세천하’ 역시 같은 구조를 취한다. 게임은 자잘한 분기로 나뉘어 있고, 각 분기는 대부분 3분에서 5분 내외의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긴 영상조차 10분 정도일 뿐이다. 모든 영상은 핵심 내용을 밀도 있게 담아 플레이어의 선택 직전 상황을 빠르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게임적’ 요소 역시 엄청난 ‘컨트롤’을 요구하기보다는 콘텐츠를 강화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간단한 상호작용 요소는 주인공이 도망치거나 피해야 하는 상황에 등장하여 플레이어의 긴박감을 더하거나,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 이를 표현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각 영상 사이에 위치하는 선택지는 결과에 대한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시리즈물 특유의 클리프행어(cliffhanger) 역할을 한다. 

플레이어가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한 순간에 뺨을 때리는 상호작용이 등장한다.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관계 역시 드라마적 문법을 계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와 주인공 캐릭터를 동일시하며 진행되는 고전적 디지털 게임과 달리, ‘성세천하’에서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외부에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입’이 아니라 ‘관람’이라는 점에서 이 게임은 숏폼 드라마가 게임적 문법으로 재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클릭하기
‘성세천하’는 선택지 기반의 다중분기 서사 구조(*필자 주: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이 스토리의 진행 방향과 결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임 내러티브 디자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선형적 스토리텔링 구조와 다르게 마치 나무처럼 이야기의 각 선택 지점이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다양한 경로와 복수의 엔딩으로 이어진다.)를 취한다. 흔히 다중분기 서사라 하면 선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하지만, 이 게임에서의 ‘다중’ 서사는 무수하게 갈라진 오답들에 가깝다. 게임 중 나타나는 거의 모든 선택지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고, 정답지가 아닌 분기를 타고 가면 ‘죽음’이나 ‘추방’ 등 소위 ‘배드 엔딩’이라고 불리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갈라진 분기 속에서 주인공이 여제가 아닌 다른 미래를 개척하는 서브 엔딩 역시 존재하지만, 이 역시 게임이 곧바로 종료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결코 완전한 ‘엔딩’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본 게임은 이야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적 실험이라기보다는, 정해진 길을 찾아가는 일종의 ‘정답 맞히기 게임’이라 볼 수 있다. 올바른 선택지를 찾기 위한 반복과 실패를 거치며 결국 ‘정답’으로 수렴하는 구조인 셈이다. 실제로, 진엔딩(True Ending) 이후 플레이어의 화면에는 ‘첫 클리어 성공률’과 전체 플레이어와의 비교 평가 지표가 표시된다. 이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정답을 잘 맞췄는지’를 표시한다. 즉, 게임이 제공하는 것은 치열한 궁중 암투 속에서 플레이어가 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전술과 모략을 평가하는 시험인 셈이다. 

진엔딩을 볼 때 나타나는 화면으로 첫 클리어 성공률이 표시되어 있다.

다만 주목할 만한 점은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스트레스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본 게임은 주인공이 ‘개복치’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사소해 보이는 선택을 하나만이라도 잘못하면 곧장 사망 엔딩을 맞이하는데, 플레이어 태반이 입궁을 하자마자 죽어나가고, 플레이 중간에도 수많은 계화탕을 맛본다. 그럼에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피로감은 극히 적은 편인데, 이는 실패의 무게가 매우 가볍기 때문이다. 먼저 ‘성세천하’는 실패에 대한 패널티가 거의 없는 게임이다. 선택에 따라 게임이 배드 엔딩을 맞이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곧장 자잘한 분기로 넘어가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각 영상의 길이가 매우 짧고, 배속을 하거나 영상을 전부 시청하기 전에도 게임을 나갈 수 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지를 고르고,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게임에서의 선택이 ‘성향’으로 비추어진다는 점 역시 실패에 대한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 요인이다. 본 게임은 플레이어가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에 따라 성격을 진단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제공한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오답을 고른 것이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에 따른 결과로 느끼게 된다. 

플레이어의 선택을 기반으로 생성되는 성격 테스트 보고서

따로 또 같이 보기 
‘성세천하’에는 독특한 수익 모델이 존재한다. 바로 꽃과 달걀을 구매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스토리를 해제하는 것 말고도 꽃과 달걀을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데, 이는 각각 호감/비호감 투표를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게임을 하다가 좋아하게 되거나 싫어하게 된 등장인물에 꽃을 보내거나 달걀을 던져 자신의 선호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플레이어 개인으로 하여금 ‘사이다’를 느끼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선호를 타인과 공유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꽃을 보내거나 달걀을 던질 때 플레이어는 이름(닉네임)을 입력하는데, 보낸 꽃과 달걀의 수는 닉네임과 함께 기록된다. 이렇게 모인 꽃과 달걀은 각각 집계되어 가장 호감/비호감인 캐릭터를 순위대로 표시한다. 이는 플레이어가 타인과 함께 시청하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준다. ‘나’를 넘어 집단의 선호를 확인하면서 공통분모를 찾고,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랭킹 화면. 플레이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와 싫어하는 캐릭터를 확인할 수 있다.

나가며: 게임적 숏폼의 탄생
결국 ‘성세천하’는 게임과 숏폼이라는 두 장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며, 새로운 서사적 몰입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 게임은 단순히 짧은 영상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클릭·선택·반복 시도와 같은 게임적 요소를 통해 사용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 참여를 곧 서사의 일부로 전환시킨다. 이는 수동적 소비에서 능동적 체험으로, 보는 것에서 ‘플레이하는 것’으로 숏폼의 성격을 확장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즉, ‘성세천하’는 단지 짧은 게임이 아니라, 숏폼 콘텐츠가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향—상호작용성과 몰입을 기반으로 한 ‘게임적 숏폼’—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숏폼이란 단지 짧은 영상이 아니라, 짧은 시간 속에서 깊이 있게 빠져드는 방식이며, ‘성세천하’는 그 안에서 ‘게임적 숏폼’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Copyright ⓒ Weverse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