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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서(객원 에디터), 배동미(CINE21 기자), 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디자인MHTL
사진 출처넷플릭스 X

‘로맨틱 어나니머스’ (넷플릭스)
최민서(객원 에디터): 하나(박효주)는 천재 쇼콜라티에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시선공포증을 가진 그녀는 매일 아침 헬멧을 쓴 채 스승 겐지의 가게 ‘르 소베르’에 익명의 쇼콜라티에로서 초콜릿을 두고 사라진다. 겐지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르 소베르에 직접 발을 들인 날, 그녀는 기적처럼 타인과 단번에 눈을 마주친다. 그 기적은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르 소베르를 위임받은 제과기업 후계자 소스케(오구리 슌)는 중증 결벽증 환자다. 그러나 하나와 손이 닿자 소름 대신 따뜻함이 퍼진다.

두 사람은 겐지의 ‘레인보우 팔레트’의 레시피를 재현하기 위해 협업하며 서로의 사연을 터놓는다. “나는 남을 만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 씨는 괜찮아요.” 비 오는 밤, 소스케는 빗속에서 홀로 걷는 하나에게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네며 말한다. 그러다 곧 비를 맞자마자 뒤돌아선다. “도저히 못하겠어요. 미안하지만 그냥 비 맞으면서 가면 안 되나요?” 황당해하는 하나를 남겨둔 채, 그는 우산을 도로 낚아채고 달아난다. 하나는 비에 쫄딱 젖은 채로 소스케를 쫒아가서는 말한다. “우리 둘, 서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둘은 서로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로 한다.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쌓게 되지만, 도망치기 일쑤인 두 고슴도치에게 사랑 고백은 완벽한 초콜릿을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기차 안, 잠든 하나의 이어폰 한쪽을 껴본 소스케는 박혜경의 ‘고백’을 듣게 된다. 낯선 언어의 가사가 마음 어딘가를 가만히 두드린 걸까? 그는 미소 지으며 하나에게 어깨 한쪽을 내어준다. 매 에피소드를 여는 ‘고백’의 일본어 리메이크와 맞물려 각자의 모국어로 울리는 러브레터는 보내는 이의 이름을 지우고 쓰고를 반복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다.”는 말이 있다. 맛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와 소스케의 만남 역시 그렇다. 그들은 기적 같은 우연을 통해 만나 기쁨과 슬픔, 설렘 같은 감정들을 하나씩 맛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달콤한 초콜릿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초콜릿은 사랑이에요. 소중한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요.” 자신이 누구를 위해 초콜릿을 만들고 있었는지 알게 된 하나가 말한다. “좋아해요.” “아니에요.” 소스케가 답한다. “이건 사랑이죠.” 두 사람은 마침내 마음속 초콜릿 상자의 마지막 조각을 채운다. 서로의 이름을 새긴 채로. 

‘부고니아’
배동미(CINE21 기자):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벌이 부족하면 ‘부고니아’라는 독특한 의식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소의 사체에서 벌이 탄생한다고 믿었던 지중해인들은 건강한 소를 죽여 막힌 공간에 넣어두고 허브를 뿌렸다. 3주 뒤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통하게 하고 또다시 11일을 보내고 나면, 소의 뼈와 털만 남고 많은 벌들이 태어나 있을 것이라고 고대인들은 믿었다. 실제로 부고니아가 널리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행위의 본질은 현대에도 유의미해 보인다. 목적을 위해 다른 존재를 희생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그 행동으로는 애초의 목적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일들. 그런 사건은 지금도 인류에 의해 왕왕 벌어진다.

가난한 노동자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자신만의 부고니아를 행하는 걸지도 모른다. 테디는 성공한 CEO 미셸(엠마 스톤)이 실은 외계인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미셸을 포함한 안드로메다인들이 인류를 조종하기 때문에 그들을 지구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테디는 믿는다. 안드로메다 황제를 만나서 지구를 떠나달라는 협상을 벌일 목적으로 테디는 어리숙한 사촌 동생 도니(에이단 델비스)와 함께 외계인 고위 관료로 예상되는 미셸을 납치하기에 이른다. 테디의 망상 속에서 안드로메다인들과의 교신 수단이던 미셸의 머리카락마저 잘려나갔다. 지하실에 묶여 난데없는 주장을 듣고는 자신은 “지역 경제의 심장”이자 “주지사보다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48시간 내에 실종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 강조하지만 테디는 강경하다. 거듭 미셸에게 외계인 황제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놓아주지 않는다. 테디는 부고니아처럼 허황된 의식을 치르는 것일까. 그러나 미셸 또한 목표를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난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 누가 진정으로 부고니아를 행하는 자인가.

영화 ‘부고니아’는 한국 컬트 영화의 걸작 ‘지구를 지켜라!’(2003)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점점 비인간화되는 노동 현장, 극심해지는 양극화 등 사회 변화로 인해 22년 전 세워진 서사의 뼈대는 과거보다 지금의 관객에게 더 와닿을 것 같다. 또한 ‘지구를 지켜라!’의 반전에 이미 충격을 받은 관객이라면 ‘부고니아’가 원작의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는 데 안도하며 극장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서사는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형식만큼은 차이가 있다. 가로가 너른 16:9 화면비였던 ‘지구를 지켜라!’와 달리, ‘부고니아’는 가로세로 비율이 유사한 1.50:1 화면비, 일명 ‘비스타비전’으로 제작되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인물을 프레임 가운데 두어 그를 둘러싼 환경을 더 많이 보여주면서 가난한 테디의 집과 여유로운 미셸의 공간을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또한 인물을 멀리서 포착할 때면 넓은 상하의 프레임 여백으로 인해 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압력까지 고스란히 전한다.

Jacob Collier - ‘The Light For Days’
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제이콥 콜리어의 음악은 기술적이고 정밀하다. 음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아 올려 궁극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악기를 쌓고 또 쌓는다. 목소리만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도 한다. 겹겹이 쌓인 화음만큼 그에 걸맞은 완벽한 소리를 구현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도 한다. 네 편의 ‘Djesse’ 시리즈에서 자신을 ‘지저스’에 비유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 느껴질 정도로 그는 ‘창작자’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다. 세상의 소리를 모아 우아하고 광대한 세계를 만든다.

그런 그가 이번엔 모든 것을 덜어내고 오로지 어쿠스틱 기타에만 의존했다. 그 위에 얹어진 것은 오로지 목소리 하나. 총 11곡이 담긴 ‘The Light For Days’는 단 4일 만에 완성됐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도적 제약은 4일 만에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훌륭한 앨범을 만들 수 있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주기도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음악의 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제이콥 콜리어는 음악으로 답한다. 자연 그 자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의 결을 닮은 음악들이 흐른다. 제이콥은 또다시 그 가운데에 서서 우리를 광활한 자연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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