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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인,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윤해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퍼피디아 베벌리힐스(테야나 테일러)와 팻 캘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급진적인 혁명 조직 ‘프렌치75’의 단원이자 연인 사이다. 이상을 위해 무력도 불사하던 두 사람의 혁명 생활은 퍼피디아가 임신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아이를 돌보기보다는 혁명 최전선에 나가고 싶은 퍼피디아와 가장으로서의 삶에 전념하고픈 팻은 서로 갈등한다. 이로 인해 충동성이 극에 달한 퍼피디아는 은행에서 돈을 탈취하던 중 보안 직원에게 총을 쏘고 도주하다 경찰에 붙잡힌다. 감옥에 갈 위기에 봉착한 퍼피디아는 전부터 자신에게 집착적으로 접근하여 협박한 후 관계를 맺은 스티브 J. 록조 대령(숀 펜)에게 동료들의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한편, 팻과 그들의 딸은 프렌치75의 도움으로 밥과 윌라 퍼거슨(체이스 인피니티)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가상의 도시 박탄 크로스에 숨어든다. 

16년 후, 국경 지대의 불법 이민자 수용소를 관리하던 록조 대령은 순혈주의에 빠진 백인 남성 상류층 모임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클럽 입회 과정에서 받은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나?”라는 질문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는 퍼피디아의 딸 윌라가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부녀를 찾고자 박탄 크로스로 군을 파견하고, 그간 나름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던 밥과 윌라는 록조 대령에게 쫓기게 된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블랙 코미디처럼 보여준다. 예컨대 밥과 딸의 위험 상황을 알리고자 전화를 건 프렌치75가 과거 매뉴얼대로 암구호를 대야만 정보를 줄 수 있다고 되풀이하자, 밥은 이렇게 답한다. “지금 약을 해서 몽롱하거든. 그간 세월이 얼마인데 힌트 좀 줘.” 마약과 술에 취해 딸이 아침을 챙겨줘야 하는 밥을 보고 있으면, 그가 딸을 구하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의 안위는 지킬는지 걱정될 정도다. 또한 열여섯 살 소녀 한 명을 찾는답시고 고등학교 댄스 파티에 군대를 투입하는 록조 대령이나 진지하게 인종적 우월함이 실존한다는 듯 대화하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회원들의 모습은 실소가 터지게 한다. 

다만 그 우스꽝스러운 순혈주의자들이 박탄 크로스 주민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위협하는 건 현실이다. 프렌치75가 과거의 이론에 매몰되어 암구호를 최우선시할 때, 이민자들을 위한 지하 탈출망을 대가 없이 운영하는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네시오 델 토로)와 그 가족들은 일상이 혁명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유머러스하게 현실을 계속해서 꼬집는 동시에, 사회의 일면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리는 순간을 만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제목처럼 러닝타임 내내 인종과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층위와 무게를 지닌 싸움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윌라를 통해 다음 세대의 자리까지 마련하기에 이른다. 윌라는 어머니의 혁명가적 유전자를 물려받고, 10대로서 어른들의 도움과 보호를 받지만, 이것이 전 세대의 레거시를 계승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윌라는 부모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싸워 나갈 테다. 영화의 후반부, 위아래로 굽이치는 도로에서 자신을 뒤쫓던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일원을 윌라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통쾌하게 처치해냈듯이. 거스를 수 없는 파도의 흐름이다.

‘まにまに’ - 크랙/랙스(CRCK/LCKS)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일본 음악을 꽤나 챙겨 듣는다 자부하는 이들에게도 크랙/랙스라는 이름은 다소 낯설게 들려온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들이 참여한 작업물들을 은연중 꽤나 많이 접해왔을 테니. 재즈 기반의 커리어라는 명함을 들고 세션과 사운드 프로듀서 등 다양한 역할로 팝 씬을 종횡무진하는 연주 멤버들과 도쿄예술대학 작곡과 출신으로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시부야 케이이치로 이후 흔치 않은 비클래식계 아티스트로 언급되는 보컬 오다 토모미까지. 각자 명확한 개성을 지닌 멤버들이 여러 번의 충돌과 시도, 위기를 넘어 데뷔 10년 만에, 정규작으로는 6년 만에 선보이는 이 작품은, 마침내 팀으로 기능하며 아슬아슬했던 밸런스가 마침내 증폭되는 광경을 만나볼 수 있는 수작으로 자리한다.

이전처럼 재즈와 팝의 중간점에서 각자의 리듬을 전개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이전엔 다소 벌어져 있던 틈을 메우는 것은 신뢰라는 접착제. 만개하는 즉흥성으로 빚어내는 기적과 같은 유기성은 마치 황량하고도 신비로운, 공존할 수 없을 듯한 풍경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발을 일부러 맞춰 걷지는 않지만 여러 걸음 끝에 기어코 겹쳐지는 우연과 같은 한 발자국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결과물이랄까. 드럼과 베이스가 폭주하고 색소폰이 맥락 없이 뒹굴며, 기타는 건조하게 리프를 반복하는 그 아슬아슬함 위로 대중적인 보컬과 선율을 겹쳐내는 ‘まにまに’는 이 앨범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표 곡이라 할 만하다. ‘무언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내려놓으니 전에 없던 무언가가 되는 아이러니. 각자의 방향으로 힘차게 뻗어나감으로써 성립되는 이 크로스오버 뮤직을 접하니, 얼마 전 서치모스의 복귀 공연에서 욘스가 관객을 향해 건네던 MC가 불현듯 떠오른다.

“모두 하나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가 된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실패한 여름휴가’ - 허희정
김복숭(작가): 허희정 작가의 데뷔 단편집 ‘실패한 여름휴가’를 소개한다.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최신 소설을 번역한 페이지 모리스가 영어로 옮긴 버전이 출간되며, 이 작품은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책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기이한 매력을 보여준다. SF와 초현실의 경계 어딘가에 자리한 작품들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제목이 암시하듯 우울한 결을 띠지만,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독특한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만, 다소 노골적인 묘사들이 있어 읽기 전 마음의 준비는 필요하다.
단편집의 대부분은 단순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예상을 비약적으로 뛰어넘고, 시간은 불연속적으로 흘러가며, 등장인물과 배경은 익명성 속에서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주제는 다양하지만, 그중 팬덤을 다룬 한 작품은 비교적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물론 그 의미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책 전반에 반복되는 ‘집착’이라는 주제는 작품이 요구하는 몰입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이 진정으로 파고드는 것은 여름의 햇살 아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그 반대편에 선 감정 —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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